188화
화아아아―
아이젠의 몸에서 그의 정순한 내기가 피어올랐다. 지크프리트는 경계하며 물러섰다. 그건 조금 전까지 그가 보았던 검보라색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분홍빛에 가까웠다.
아이젠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결사신권, 1성.”
아이젠의 내공이 반짝였다. 한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지크프리트의 옆쪽에서 나타났다. 지크프리트는 홀리 소드를 들어 아이젠의 주먹을 막았다.
“박살!”
태앵! 아이젠의 박살이 홀리 소드의 검면과 맞닿아 그것을 밀어냈다. 지크프리트는 힘에 부치는 얼굴로 검의 각도를 비틀어 아이젠을 튕겨냈다.
그리고 넘어진 아이젠을 노리려는데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젠은 지크프리트의 목말을 타고 있었다.
‘어느 틈에?!’
어깨에 뭐가 올라섰다는 감각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이젠의 양손이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노리고 예리하게 덤벼들었다.
“결사신권 2성. 뇌살!”
파앙!! 지크프리트는 양손을 교차해 귀를 막았다. 아이젠의 손가락은 지크프리트의 손을 때렸을 뿐이다.
슈왁! 그때 아이젠이 또다시 사라졌다. 지크프리트가 느끼기에 아이젠의 오러는 좀 전보다 확연히 약해져 있었다. 그 질도 대단치 않고, 오러의 양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이젠은 전에 비해 훨씬 더 빨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느새 저 멀리까지 떨어져 선 아이젠은, 오른손에 내공을 듬뿍 담아 휘둘렀다.
“교아!”
콰드드득! 아이젠의 오른손이 대기를 찢어발긴다. 마치 곰처럼 다가오는 참격을 지크프리트는 홀리 소드로 막아냈다. 홀리 소드에 와닿는 아이젠의 내공은 묵직했다.
“결사신권 3성. 목롱보.”
팟! 아이젠은 또다시 지크프리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지크프리트가 홀리 소드를 휘두르자, 아이젠의 몸이 종잇장처럼 유려하게 흔들렸다.
“유랑보.”
그리고 아이젠의 주먹에 내공이 피어오른다.
“권왕백무!”
뻐버버버버벅! 아이젠의 주먹이 지크프리트의 검면을 시원하게 타격한다. 지크프리트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났다. 그라고 이렇게 마냥 당하고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검은 칼날!’
츠팟! 지크프리트가 휘두른 홀리 소드에서 검은 참격이 쏘아졌다. 저것에 맞았다간 아이젠은 세상에서 지워지게 될 터다. 아이젠은 양 주먹에 내공을 불어넣어 전방으로 날렸다.
“환교신권!”
투웅! 쏘아진 두 발의 환교신권은 검은 참격을 목표물 삼았다. 파앙! 허공에서 부딪친 두 개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크프리트가 잠시 우두커니 서서 아이젠을 바라보았다. 아이젠의 내공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진 한 줌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네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게냐?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무것도. 그냥, 급할수록 차분히 돌아가는 중이야.”
아이젠은 1성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수위를 밟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3성. 아이젠은 몸에서 불길을 피워 올렸다.
“사신강림.”
푸화악! 아이젠의 몸에서 응축돼 있던 내공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 터졌던 내공이 다시 아이젠의 몸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아이젠의 눈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지지 않는다, 지크프리트. 왠지 알아?”
“…왜지?”
“날 이기는 걸,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이이이! 아이젠의 몸에서 새파란 기운이 빛났다. 관철의 룬을 통해 아이젠은 또 한 번 성장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내공은 분명 한 줌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이젠에게 그것은 무한대다.
그것은 지금 그가 사용하는 것이 단순한 내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진원진기(眞元眞氣).’
그가 쓰고 있는 것은 진원진기. 누구나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정순하고 근원적인 생명력.
진원진기는 혈공이 아니다. 타고나는 또 하나의 내공일 뿐. 하지만 이 진원진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이젠으로서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난생처음이었다.
‘관철의 룬 덕분인가.’
관철의 룬을 통해, 진원진기를 끌어다 쓸 수 있는 힘이 개화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이젠은 이것을 기회 삼기로 했다.
“결사신권 4성, 홍화. 천수관음!”
좀 더 연분홍빛을 띠게 된 그의 내공을 바탕으로, 아이젠의 등 뒤에서 천 다발의 손이 나타났다. 아이젠은 그대로 뛰어 지크프리트의 명치를 노리고 주먹을 뻗었다. 지크프리트는 직선으로 날아드는 아이젠의 주먹을 가볍게 잘라냈다.
싹둑!
그러나 아이젠의 주먹이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한순간 연분홍빛으로 변한 그의 몸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음?!”
“적도심경.”
“뭣―”
휘익! 지크프리트가 놀라 휘두른 홀리 소드를, 아이젠은 간단히 움직여 피했다.
“무음목랑보. 그리고―”
“앗?”
“천차횡도!”
아이젠의 오른손에 뭉쳐 있던 홍화의 내공이 폭발하듯 분출됐다. 목표 지점은 지크프리트였다. 첨탑의 지붕 몇 개가 떨어져 나가며 먼지가 피었고, 지크프리트는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음. 그거라면 이미 몇 번이나 맞았다.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모르는가 보구―”
“결사신권 5성, 섬광권기!”
퓨뷰뷰뷰뷱!
아이젠의 주먹이 지크프리트의 상반신을 날카롭게 연타했다. 빛에 맞은 지크프리트는 뒤로 기우뚱 넘어갔지만, 단단한 두 다리가 튼튼하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으으음!!”
“철권!”
우드드드득! 아이젠이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아이젠은 벌떡 일어선 지크프리트의 뱃가죽 위로 주먹을 던졌고, 그의 주먹은 지크프리트의 장기를 위태롭게 휘저었다.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찡그려졌으나.
“음!!”
파앙! 바람이 일어나며 아이젠이 뒤로 밀려났다.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오러로 철권을 역방향으로 돌려, 장기를 다시 원래 위치로 복구시켰다.
“아직 멀었다, 아이젠!”
검은 칼날, 연참!
츠파파팟! 지크프리트가 너댓 번 허공에 대고 홀리 소드를 휘두르자, 아이젠을 향해 검은 참격이 쏟아졌다.
피할 곳은 없다. 아이젠은 몸 안에 있던 선천진기를 다시 한번 무한대로 피웠다.
“결사신권 6성 암화. 절세지경!”
카앙! 캉! 카각! 카앙!
아이젠의 몸에 닿은 검은 참격이 튕겨 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젠의 몸에 있던 내공은 다시 검보랏빛이 되었다.
“결사신권 7성, 공간지배.”
부웅! 검은 원이 아이젠과 지크프리트를 안에 담았다. 지크프리트가 다음 일격을 기다리고 홀리 소드를 모로 잡아 쥐는데, 문득 아이젠의 반응이 이상해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젠은 울고 있었다. 그의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뚝뚝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눈물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와중에도 방심하지 않고 홀리 소드에 다크 폴리시를 불어넣었다. 아이젠 역시 주저하지 않고 온몸에 진원진기를 피웠다.
“왜 우는가?”
“아니. 좋아서.”
“좋아서?”
“그래. 이게 스승님의 가르침이었구나.”
아이젠은 지크프리트를 쳐다보았다. 비슷한 연배이기 때문인지, 지크프리트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스승 이화도와 겹쳐 보였다.
“마치 스승님과 싸우는 기분이야.”
아이젠은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눈앞에 스승의 모습이 선하다.
이화도는 생각 없이 주먹을 지르고 있는 강철의 자세를 봐주고 있었다. 그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연신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강철이 결사신권의 자세를 풀었다.
“아, 좀. 하실 말씀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자꾸 쯧쯧거리지 말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느냐?”
“아! 기분 상했습니다. 오늘 수련은 이쯤 하시죠.”
“그래라. 네놈 손해지 내 손해냐?”
토라져 투정이라도 부리려던 건데 생각보다 태연하게 나오는 스승의 태도에 강철은 기분만 더 꿀꿀해졌다. 옷가지를 챙기던 강철은 문득 궁금한 게 있어 스승을 돌아보았다.
“스승님. 저는 벌써 철의 속조차 파괴하는 철권을 구사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강한 경지가 있습니까?”
“겨우 철을 부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냐?”
“그게 아니라요. 저는 당연히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서고 싶은데, 그런 경지가 있긴 한 건가 싶은 거죠. 없으면 수련해 봤자 손해잖아요.”
“이놈이?”
뻑! 이화도가 강철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였다. 강철은 온몸에 암화를 운용하고 있어서 아프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깊게 느껴지는 통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
“아프지, 요놈아?”
“으윽, 아파. 내공을 실어서 때리시면 어떡합니까!”
“내공은 무슨? 내 손엔 아무것도 없다. 보면 모르냐?”
그 말을 듣고 강철이 스승의 손을 보자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강철이 스승을 올려다보자, 이화도는 어린아이처럼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철보다 단단한 게 뭔지 아느냐? 바로 종이란다.”
“종이요? 종잇장?”
“철조차 부수는 주먹으로 종잇장 한 장 ‘파괴하지’ 못한다면, 그건 전혀 강하지 않은 게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그리고 종이는 파괴하는 게 아니라 찢는 거죠. 손 하나 까딱하면 찢어지는 게 종이 아닙니까?”
“그런 게 있다, 이놈아. 너도 종이를 파괴하는 ‘쇄지(碎紙)’의 경지에 오른다면 오늘 내 말이 이해가 될 게다.”
팟! 아이젠이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검은 참격이 시야를 가득 메우며 날아들고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검은 참격을 쏜 것이다. 아이젠은 흠칫하며 고개를 틀어 참격을 피했으나, 뺨을 살짝 베이고 말았다. 베인 자국에서 검은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베였구나. 검은 칼날에.”
“무슨 일이 생기는데?”
“그 정도 상처로는 아무 일도. 하지만 그 이상 베인다면 너를 기억하는 이는 이 세상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단 한 명도.”
“…아. 그래?”
아이젠의 몸에서 진원진기가 훅 하고 꺼졌다. 그러더니, 아이젠의 몸 안에는 이제 그 단 한 줌의 내공조차도 남지 않게 되었다.
지크프리트는 오러를 얇게 펼쳐 아이젠의 몸에 깃든 내공을 헤아렸다. 조금 전까지 넘실거리고 있던 그의 내공이 완전히 증발했다.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둘 중 하나다. 마지막 남은 내공마저 모조리 소진했거나, 일부러 내공을 운공하지 않거나.’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 일반적으로는 내공을 모두 써버렸다고 봐야 옳으리라.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아이젠에게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그럴수록 홀리 소드를 더더욱 꽉 쥐게 될 따름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지?”
“아무 짓도.”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슈팟! 지크프리트가 홀리 소드를 휘둘렀다. 검은 참격이 세상을 통째로 찢어발길 듯 매서운 기세로 아이젠에게 날아들었다. 파앙! 아이젠의 머리통에 부딪힌 검은 참격은 흩어져 사라졌다.
아이젠은 분명 내공을 운공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이마에 지크프리트의 검은 참격을 정통으로 맞았다. 흐르는 피가 그를 증명했다. 이제 아이젠은 세상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아이젠 폰 그린우드…….”
아이젠의 신변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지크프리트 자신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말이다.
“결사신권 8성, 이가요새(李家要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