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테오발트, 그대와 한 번 더 검을 맞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련만.”
25년 전의 유령전쟁에서 지크프리트는 일평생 유일하게 검 대 검으로 상대할 만한 대적자를 만났었다. 그것이 바로 테오발트.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긴 그가 이번 전쟁에 참전한 것도 그와의 결투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테오발트 역시 전쟁에 나오리란 확신이 있었다. 확신은 현실이 되었다.
“없다, 없어. 날 만족시켜 줄 강자가 없다. 역시 테오발트 그대뿐인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크프리트의 그런 외침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허탈한 한숨을 흘린 지크프리트는 홀리 소드를 도로 검집에 넣었다.
그러다가 문득, 제국군이 후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소년을 떠올렸다.
‘라이언을 쓰러뜨린 그 소년.’
라이언은 결코 약하지 않다. 지크프리트조차 그가 가진 압축의 힘은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 그런 라이언을 상대로 승리하다니. 소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테오발트와 언뜻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 아이가 날 만족시켜 줄지도 모르지.’
일대일 대결은 좀 어려울지도 모른다. 피와 살점이 튀기는 참혹한 전장에서 일대일 대결이란 좀처럼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아이젠이 직접 지크프리트를 지명해 온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제국에서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나.’
제국은 지크프리트를 공화국의 최대 전력으로 여기고 있다.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지크프리트와 일대일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지크프리트가 아쉬워하며 그도 첨탑에서 내려가려는, 바로 그때였다.
파지지지직!!!
대기를 빛의 속도로 찢어내는 극한의 파열음과 함께 지크프리트의 눈앞이 번쩍였다.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는 눈앞에 나타나 있는 두 사람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역시 지크프리트를 꼿꼿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젠과 마테오 백작이었다.
마테오 백작은 나타나자마자 아이젠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더니, 이내 다시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라르페소성의 첨탑 위에는 아이젠과 지크프리트 단둘만 남게 되었다.
“지크프리트 중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벼락 소리를 듣고 찾아온 공화국군 몇몇이 첨탑 위에 올라섰다. 달빛이 적은 날이라 그들은 지크프리트의 맞은편에 올곧게 서 있는 아이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중장님?”
지크프리트는 뒤를 돌아 공화국 병졸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전에 없이 허허실실 웃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아, 별일 아니네. 새 기술을 시험해 보다가 그만.”
“예?”
“다들 별일 아니었으니 내려가 보게. 나도 곧 따라가지. 어서.”
“아! 예, 중장님! 혹시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렇게 공화국 병졸들이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아이젠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지크프리트는 아이젠을 쳐다보았다.
“자, 그럼 제국군의 소년병이 왜 이곳에 왔는지 들어보도록 할까. 자네가 바랐던 게 이것일 테지? 아무도 없이 나와 단둘이서만 있는.”
지크프리트의 손은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집으로 향해 있었다. 홀리 소드가 언제라도 뽑혀 나올 수 있도록 매와 같은 품새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젠은 씨익 웃었다.
“지크프리트. 당신이 원할 것 같아서 찾아왔다.”
“무엇을?”
아이젠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어느새 온몸에 암화의 기운을 실은 뒤였다.
“나와의 일대일 대결을.”
* * *
제국이 점거한 콜레몽성. 상석에 앉아 있던 레오 황제는 양손으로 기도 자세를 취했다. 무언가를 비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보니 자연히 그런 자세가 되었을 뿐.
그는 자신의 오른편에서 다리를 달달달 떨고 있는 오마르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리 좀 그만 떨게, 오마르 대공.”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폐하.”
오마르는 다리를 멈췄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조바심이 나는 듯했다. 레오 황제가 그런 오마르의 심경을 헤아리고 말했다.
“정말 괜찮겠나? 아이젠 그 소년 말일세.”
“…그 소년이 직접 해내겠다고 한 것이니. 믿어봐야지요. 안 그런가, 테오발트 공작?”
오마르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테오발트에게 말을 걸었다. 테오발트는 눈을 감고 있다가, 오마르의 부름에 눈을 희미하게 떴다.
“그 아이라면 해낼 것입니다.”
테오발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없었다.
조금 전 아이젠이 제시한 ‘계획’은 실로 간단했다. 바로 아이젠이 지크프리트와 일대일로 대결하는 것.
‘지크프리트라면 분명 수락해 올 겁니다.’
아이젠의 말이었다. 오마르는 긴가민가했지만 테오발트는 아이젠의 말이 정답이라고 확신했다. 지크프리트, 그라면 닥쳐오는 일대일 대결을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설마하니 아이젠이 지크프리트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25년 전의 전쟁영웅 중 한 명인 그 불라트마저 단칼에 베어 죽인 지크프리트다. 아이젠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10분? 5분? 1분 안에 성패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오마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잊지 말게. 이 무모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책임은 테오발트 공작 자네가 져야 할걸세.”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테오발트는 뒷말을 삼켰다. 그러자 오마르가 말했다.
“테오발트 공작, 자네도 못 해낸 것 아닌가. 기억하고 있겠지? 지크프리트의 이마에 난 상처 말이야. 25년 전 바로 자네가 남긴.”
지크프리트의 이마에는 커다랗게 칼에 베인 흉터가 나 있는데 그것은 테오발트의 솜씨였다. 25년 전 테오발트가 지크프리트의 이마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테오발트는 괜스레 오른손으로 왼팔을 움켜쥐었다. 욱신욱신! 아직도 생각만 하면 이 갑옷 안에 숨겨놓은 왼팔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 상처를 남기고 저는 왼팔을 내줄 뻔했지요.”
“자네조차 그 지크프리트에게 상처 하나 남기는 것에 그쳤네. 그런데, 자네는 정말로 아이젠 그 어린아이가 지크프리트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나?”
“예. 확실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아이젠, 그 아이에겐. 제게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네에게 없는 것? 그게 뭐지?”
오마르가 묻자, 테오발트는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인정이지요.”
“인정? 누구의?”
“바로 초대 가주님의―”
그때였다.
파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있는 공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마테오 백작이었다. 마테오는 등장함과 동시에 세 사람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이젠 소가주님을 모셔다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고생했네, 마테오 백작. 그대의 그 좌표 지정 공간이동 마법은 어마어마한 마력을 소모할 터인데.”
“아닙니다.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마테오 백작이 착석할 때, 오마르 대공이 그에게도 물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아이젠이 지크프리트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예.”
마테오 역시 대답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오마르는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그것이 참 신기했다.
마테오가 말을 이었다.
“아이젠 소가주님이라면 해내실 겁니다. 반드시.”
* * *
훌러덩― 아이젠은 웃통을 벗어 깠다. 한겨울의 밤은 춥다. 제아무리 아이젠이라 해도 한파를 못 느끼진 않을 텐데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지크프리트가 바라본 아이젠의 몸통은 실로 대단했다. ‘훌륭하다’, 그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럽게 빠진 몸매 하며, 근육은 너무 과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게 딱 적정량만큼만 여기저기 분배돼 있었다.
다만 아이젠의 몸 앞은 살짝 짓무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그 상처를 제공한 이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차렸다. 라이언의 솜씨인 듯했다.
‘라이언을 상대로 겨우 저 정도의 상처로 그쳤단 말인가.’
지크프리트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뿐 아이젠의 실력을 상당히 높게 점쳐두고 있었다.
한편 아이젠이 웃통을 벗어 깐 이유는, 상처를 꿰매기 위해서였다. 라이언에게 압축의 힘을 당한 이후 곧바로 콜레몽성으로 복귀한 아이젠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결사신권 5성 ‘홍련치’를 사용해 상처 부위를 꿰매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분홍빛의 내공이 아이젠의 가슴을 꿰매었다.
“신기한 기술을 쓰는군.”
“지크프리트… 음, 뭐라고 부르면 되지?”
“그냥 이름으로 부르게. 나야말로 뭐라고 부르면 되겠나.”
“아이젠. 아이젠 폰 그린우드.”
“―!”
아이젠이 이름을 밝히자 지크프리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흥미 가득한 눈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호오. 그렇다면 테오발트의 아들인가?”
“그래. 그린우드의 소가주다.”
“오, 소가주라니. 단순한 소년병이 아니었군. 그렇다면 라이언을 쓰러뜨린 그 실력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구먼.”
“그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지크프리트, 당신과 일대일 대결을 하기 위해서. 승낙할 건가?”
아이젠이 홍련치로 상처를 꿰매는 것을 마친 뒤 물었다. 아이젠이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지크프리트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대답이 어떨지는 자명했다.
“기꺼이 맞이하겠네.”
“…좋아.”
화악! 아이젠의 몸에서 암화가 피어올랐다. 아이젠은 곧바로 6성을 뛰어넘어 몸 안의 내기를 7성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결사신권, 사신강림!’
화악! 그리고 곧바로 사신강림을 사용했다. 지크프리트와의 싸움에서 주저할 이유는 없다.
아이젠은 내공을 면밀하게 운용하며 물었다.
“어머니가 이 도시에 있다지?”
“어머니? 아. 그렇다면 그대가 클라우디아의 아들이로군? 서자라고 들었는데 그 신분으로 소가주까지 오르다니, 대단하구먼.”
“입에 발린 말은 됐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멀리 있지 않다네. 바로 이곳 지하에 있지.”
지크프리트가 손으로 첨탑 아래를 가리켰다.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프리트, 당신을 쓰러뜨린 후 어머니를 되찾아가겠다.”
“그렇게 해보게. 뜻대로 된다면…….”
스릉― 지크프리트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그의 아티팩트 ‘홀리 소드’는 거창한 무기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평범한 수준에 가깝다.
검신은 짧아 숏소드라 부르기에 마땅하고, 어느 대장장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지도 않았으며, 그저 지크프리트와 오랜 세월 함께해왔기에 아티팩트라 불리는 쪽이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리타스나트 공화국의 최대 전력이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