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 검은 칼날의 지크프리트 】
“간다! 그리고 끝이다, 지크프리트!”
부웅!!
불라트의 창 레오니다스가 크게 휘둘렸다. 창대는 마치 휘어지는 듯 지크프리트를 원형으로 감싸 안으려 했고, 그 끝의 창날이 독사처럼 노리는 먹이는 지크프리트의 머리통이었다.
샤아아!
그렇게 레오니다스가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잡아먹으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떨그렁! 레오니다스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 것은.
“……?”
주변에서 광경을 지켜보던 모두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잠시 인지하지 못했다. 눈치 빠른 자들만이 선제적으로 사실을 알아차렸다. 불라트의 아티팩트 레오니다스가, 반으로 두 동강 나 있었던 것.
레오니다스는 이름 그대로 아티팩트다. 그것도 웬만한 아티팩트가 아니라, 테오발트의 에레디아에 견줄 정도로 고강하다고 알려진 아티팩트. 그런데 마치 불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두 동강 나버린 것이다.
그 범인은 다름 아닌 지크프리트.
지크프리트는 어느새 왼손에 검을 뽑아 든 채였다.
“미안하군. 그 창술을 보았는데도 자네가 누군지 기억 못 하겠어.”
“…….”
“끝인 건 자네인 것 같구먼. 이름 모를 전사여, 잘 가시게.”
스르륵…….
두 동강 난 것은 레오니다스뿐만이 아니었다. 불라트의 몸이 왼쪽 골반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불라트는 입에 머금고 있던 피를 왈칵 토했다.
“커헉…….”
털썩! 마침내 불라트의 상반신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반신 역시 뒤이어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휘오오오―
잠시 고요한 바람이 불었다. 지크프리트는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아이젠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아이젠은 움찔했으나 물러서진 않았다.
“그대인가? 라이언을 이 꼴로 만든 것이.”
“…그렇다면?”
“강하군.”
거의 그와 동시에, 제국군 쪽에서 오마르의 함성이 퍼져 나왔다.
“전군 퇴각! 퇴각하라!!”
그러자 말에 타고 있던 제국군들이 일제히 콜레몽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다급하게 도망치는 사이에서, 아이젠만은 멈춰 선 채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테오발트는 아이젠이 근처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았다. 그런데 저 멀리 아이젠이 지크프리트와 대치하고 있었다.
‘안 된다, 아이젠! 지금은 안 돼!’
테오발트가 급히 말을 달렸다.
그런데 정작 지크프리트는, 아이젠과 싸울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눈에 힘을 풀고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가보게. 오늘은 한판 붙기 어려울 듯하군.”
“…날 죽이고 싶을 텐데?”
“물론 그러하다네. 지금은 아니겠지만.”
타닥! 히힝―! 테오발트의 말이 멈춰 섰다. 테오발트는 아이젠을 끌어 올려 말에 태웠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았다.
지크프리트가 분명 더 아래에 있었으나 약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랜만이군, 지크프리트.”
“그래. 테오발트.”
“…또 보세.”
“그러지.”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테오발트는 급히 고삐를 틀어쥐어 달아났다.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이젠 역시 그 떨림을 느꼈다.
‘기대감인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아이젠은 그 떨림의 진의를 헤아릴 수 없었다.
* * *
콜레몽성으로 돌아온 제국군들의 사기는 낮았다.
오마르, 마테오 백작, 테오발트 공작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들은 넓게 펼쳐진 회의장에 앉아 있었다. 오마르가 가장 상석에 있었고 아이젠은 끝자락 자리를 하나 얻어 앉았을 뿐이다.
“라르페소의 선봉장, 아이젠. 그대에게 책임을 물어야겠군.”
오마르가 말했다. 아이젠은 눈을 낮게 내리깔고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화살표와 쐐기의 형태로 돌파하자고 제안한 건 바로 자네였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라르페소를 뚫지 못했으니,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합당하지. 안 그런가?”
아이젠이 뭐라 대답하려 할 때, 테오발트가 끼어들었다.
“그곳에 오마르가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대공전하. 아이젠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패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물러났을 뿐이지요.”
“아들이라고 싸고돌지 말게, 테오발트 공작. 물러난 것뿐이다? 물러난 이유가 무엇인데? 바로 지크프리트 때문이잖나!”
쾅! 오마르가 회의실 탁자를 내려쳤다. 그의 뜨거운 불과 같은 손이 탁자 위를 시꺼멓게 불태우고 있었다.
“자네도 보았을 테지. 불라트 후작이 단칼에 베였네. 단칼에! 설마하니 방심했다는 둥 헛소리는 지껄이지 않길 바라지. 불라트 후작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고 그건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렇다 해도, 군사들에게 후퇴하라 지시한 것은 다름 아닌 대공전하이십니다.”
“테오발트 공작!”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숨소리만이 들리고 사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때 문을 열며 들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레오 황제였다.
모두가 일어나서 그를 맞이하려 했으나 레오 황제가 손을 휘저었다. 인사를 받을 틈도 없었다. 곧바로 상석을 내어준 오마르 대공의 자리로 레오 황제가 앉았다.
“불라트 후작이 죽었다는 게 사실인가?”
“…예, 폐하. 안타깝게도.”
“허어. 25년 전의 전쟁영웅을 잃다니. 지크프리트의 솜씨일 테지.”
“그렇습니다.”
레오 황제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내 아이젠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봉장의 의견을 듣고 싶네. 어찌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나?”
아이젠은 살짝 주저했지만, 여기서 말을 줄여봤자 의미가 없다는 판단하에 입을 열었다.
“다시 갑니다.”
“이보게!”
벌컥! 오마르가 화를 내며 일어섰다.
“불라트 후작이 전사했네! 자넨 그 의미를 모르나? 불라트는 일개 병사가 아니야! 전쟁영웅이라고! 지금 제국군의 사기가 어떨 것 같나!”
“그러니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저희는 커다란 전력을 잃었고 라르페소는 아직 건재합니다. 한 번 패배했으니 이제 등을 돌리시겠습니까?”
“자네 말을 아주 함부로 하는군! 선봉장으로 세우지 말 걸 그랬어. 그대 팔을 고쳐주지 말 걸 그랬다고!”
“이미 세우셨고, 이미 고쳐주셨습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돌이킬 수는 없어요. 불라트 후작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면 어쩌잔 거지? 또 이대로 다 같이 쳐들어가서 이번엔 자네 아비라도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나?!”
점점 고성과 막말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짧은 고민을 마치고 아이젠이 입을 열었다.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
“네. 하지만,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전부 동의해 주셔야 가능한 계획입니다.”
그 말에 오마르도 잠시 상기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레오 황제가 말을 받았다.
“무엇인가? 그 계획이라는 것이.”
아이젠이 삐질 흐르는 땀과 함께 씨익 웃었다.
“그것은…….”
* * *
리타스나트 공화국의 수도, 라르페소.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 라이언은 전사했고 현재는 임시로 지크프리트가 직접 성을 지키는 중이었다.
이곳은 라르페소성의 꼭대기층 첨탑. 날은 달빛도 적어 까마득히 어둡다. 발 디딜 자리도 거의 없는 이곳에는 지크프리트가 ‘적’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상반신은 탈의한 채 둔하게 생긴 목검만을 왼손에 들고 있었다. 아이젠과 비견될 만한 훌륭하고 두꺼운 몸체에는 수십 개의 자상이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는 맞은편에 있는 적들, 그러니까, 공화국군들에게 손짓했다.
“들어오게.”
공화국 병졸의 숫자는 총 열둘. 지크프리트와는 달리 그들은 온몸을 전신 갑옷으로 무장한 채였고, 창칼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이, 이야아!”
가장 앞에 있던 젊은 병졸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왔다. 지크프리트는 목검을 횡으로 휘둘러 그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카각! 분명 목검이었는데 병졸의 갑옷은 깔끔하게 베였다.
“히익!”
“자넨 무르구먼.”
퍽! 지크프리트가 병졸의 배를 쳐 넘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너댓 명 되는 병졸들이 일제히 공격해 왔다.
피할 곳은 없고, 지크프리트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주 빠른 속도로 목검을 다섯 번 휘둘렀을 뿐이다.
카가가가각!
목검은 병졸들의 심장이 있을 법한 부위의 갑옷을 정확히 찔렀다. 이것이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다면 그들은 즉사했을 것이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 속에서 병졸들이 뒤로 나가떨어지고, 남은 병졸들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지크프리트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지크프리트 중장님, 각오하십시오!”
그러나 그들 역시, 무엇에 당했는지도 못 볼 만큼 빠른 속도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크억!”
“뿌악!”
“퍼헙?!”
털썩, 털썩. 열둘이나 되는 병졸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음.”
지크프리트는 목검을 슬쩍 휘둘러 허리끈에 집어넣었다. 그는 몸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땀을 흘리는 것은 오히려 병졸들 쪽이었다. 지크프리트의 얼굴은 실망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참. 자랑스러운 공화국군 정예들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이러니 성이 어찌 뚫리지 않고 배기겠나.”
“죄, 죄송합니다, 지크프리트 중장님!”
병졸들은 일렬로 서서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곧 지크프리트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지크프리트는 뜻밖에도 평소와 달리 선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다들 가보게. 수련에 더욱 정진하도록.”
“예, 예! 중장님!”
후다닥 첨탑에서 내려가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지크프리트는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던 옷가지들을 챙겼다.
갑옷을 차려입은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아티팩트인 ‘홀리 소드’를 들어 올려 검집에서 꺼냈다. 칼날이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불과 몇 시간 전 불라트 후작의 몸을 두 동강 냈던 바로 그 검이었다.
“지치는구먼.”
지크프리트는 전쟁에 지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기나긴 냉전과 이번의 전쟁이 고되어서?
아니었다. 지크프리트는 실로 호전광으로서 전쟁을 즐기는 자였다. 82세의 고령이지만 전장에서 죽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지크프리트였다.
그가 지친 것은 대적자가 없다는 데 있었다. 전쟁터에서 그와 검을 맞대고 5분 이상 버틸 수 있는 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불라트도 그중 한 명이었으나 전쟁을 오래 쉬기라도 한 건지 지크프리트에게 단칼에 베여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자뿐인가.”
지크프리트는 테오발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테오발트에겐 미안한 것이 있다. 그의 두 번째 아내를 자신이 라르페소성의 지하에 칩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납치를 지시한 것은 바로 지크프리트 자신이었다.
그건 지크프리트의 방식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그 역시 국가 소속의 군인일 뿐. 인질을 납치하는 행위는 비열하다 생각했으나 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이상 불복종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러한 행동을 벌인 고로 테오발트에겐 미안한 바였다.
“테오발트, 그대와 한 번 더 검을 맞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