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아이젠의 비아냥을 라이언이 가볍게 흘렸다. 라이언은 일부러 시큰거리는 쪽 손을 들어 아이젠에게 펼쳐 보였다.
“압축!”
파앙! 신호탄처럼 아이젠은 몸을 깊이 숙여 돌진했고, 라이언을 향해 주먹을 올려붙였다.
‘공간제권, 턱 치기!’
그리고 라이언의 턱을 향해 공간제권을 날렸다.
퍼버버버버벅!
아무리 고강한 갑옷이라도 계속되는 충격엔 속부터 물러지는 법이다. 아이젠의 공간제권 연타를 맞은 라이언의 턱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골이 흔들리는지 라이언이 비틀거렸다.
“크으!”
라이언의 갑옷이 조금씩 흔들린다. 아이젠의 손에 닿는 감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금세 정신을 차려 비틀거리면서도 아이젠에게 주먹을 뻗었다.
“압축포!”
퍼엉! 라이언의 손에서 쏘아진 압축포가 공기를 짓누르며 돌진했다. 아이젠은 몸을 한 바퀴 돌려 압축포를 피했다. 그리고, 공간지배의 영역 안에서 발을 굴렀다.
‘공간참보.’
팟! 라이언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아이젠은 단호히 수도를 내려쳤다.
‘박살편!’
라이언의 머리를 두 동강 낼 각오였다. 라이언이 양손으로 아이젠의 손을 붙잡았지만 말이다.
퍽! 아이젠을 밀친 라이언은 또다시 손에서 압축포를 발사했고, 아이젠은 공간참보로 압축포를 관통해 지나쳐 라이언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악지섬!’
뻐억! 우드득!!
마침내 라이언의 턱뼈에 금이 갔다. 반복되는 공격이 효과가 들기 시작한 것이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라이언이 입에서 피와 침이 섞인 타액을 뱉어냈다.
“이, 씨발!”
“오러 양만 많으면 뭐하나.”
“뭐야?!”
“중요한 건 오러의 방대한 양이 아니다. 그 질이 얼마만큼 훌륭하냐에 달려 있지.”
아이젠은 자신의 말을 증명해 주겠다는 듯 주먹에 암화를 불어넣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질 좋은’ 내공이었다.
“살덩이만 뒤룩뒤룩 쪄봤자 힘은 별로 안 세잖아? 같은 이치야.”
아이젠은 강망태신의 불꽃을 태웠다. 아이젠의 등 뒤에서 섬광처럼 암화가 불타올라, 그의 몸을 공중에 붕 뜨게 만들었다. 아이젠의 주먹이 향하는 곳은 라이언의 얼굴이었다.
‘섬광권기.’
퓨뷰뷰뷰뷱!
“크하악!”
라이언의 몸이 반쯤 주저앉았다. 빛살에 맞은 그의 얼굴은 함몰되었고, 왼쪽 눈은 망가져 뜨지 못하는 처지였다. 라이언이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침을 퉤 뱉었다.
“크으으, 이 씨발 새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라이언은 아픈 와중에도 고개를 번쩍 쳐들고 일어섰다. 그는 아이젠을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방향을 돌려 정반대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먹에 암화를 품고 있던 아이젠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뭐야, 도망인가?’
그러나 아이젠은 흠칫했다. 도망이 아니다. 그의 본능적인 감각이 외쳐주고 있었다. 지금 라이언을 막아야 한다고!
라이언은 라르페소성의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덧 양손에 압축의 힘을 잔뜩 품은 채로, 그 방대한 양의 오러를 두 개의 점으로 끌어모으고 있었다.
“라르페소가 왜 뚫기 어려운지 모르는군! 내가 죽어도 너흰 절대 여기 통과 못 하게 해주마!”
그래, 인정한다. 아이젠은 확실히 강했다. 위스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라이언의 실책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라르페소성은 견고해야만 한다. 제국군을 한 발이라도 들이게 해선 안 된다.
라이언은 이윽고 라르페소 성문 앞에 섰다. 제국군과 공화국군이 근처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라이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내 라이언이 성문 위에 손을 얹어 무언가를 하려는 그때.
“라이언!”
뒤쪽에서 아이젠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라이언이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젠이 벌써 저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라이언은 피식 비웃었다.
“이 성문의 ‘공간’을 압축한다!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압축해 버리면 성문은 사라지지. 다시 말해, 너희 제국 놈들이 라르페소성으로 들어올 유일한 길이 사라지는 거다!”
라이언이 성문에 댄 손에 압축의 힘을 시전했다.
“스페이스 잼! 내 최대의 기술이다!”
휘오오오오!
슈와아아아압!
그렇게 라이언의 손에서 발출한 압축의 힘이, 성문 근처의 공간을 회오리치며 모조리 씹어 삼키려는 그 순간이었다.
팟! 아이젠은 다급히 펼친 공간지배의 검은 원 영역 안에서 공간참보를 사용해 성문에 도달했다. 라이언의 최대 기술인 스페이스 잼 탓에 아이젠조차 시공간과 함께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이젠 역시 이 공간과 같이 통째로 사라져 버리고 말 터.
그것을 가만 지켜볼 아이젠은 아니었다.
‘공간지배의 제공권 영역 안에서, 나는 무적이다. 가진 힘을 끌어올려라, 아이젠!’
파앙! 아이젠의 몸 안에서 암화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검은 원이 통째로 불을 뿜어댔다.
콰아아아아!
휘오오오오오!
아이젠의 검은 원과 라이언의 스페이스 잼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카가가가각! 공간이 뒤틀리는 기괴한 소리가 이어졌다.
드드드드드! 아이젠은 암화의 불길을 꺼뜨리지 않으려 계속해서 내공을 퍼부었다.
‘이거론 안 돼!’
아이젠은 양 주먹에 암화를 담아, 일그러지는 시공간을 향해 공간제권의 연타를 날렸다.
투다다다다다! 아이젠의 주먹이 빗발처럼 쏟아지며, 찌그러지는 공간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마치 잔뜩 뭉그러진 철판에 일정하게 고른 힘을 가하면 철판이 다시 얇게 펴지는 것처럼.
공간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투다다다다다다!
아이젠의 주먹 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근섬유가 찢어지고 근육이 탈진할 때까지, 아이젠은 주먹질을 그만두지 않았다.
“펼쳐…져라!!!”
마침내 아이젠의 마지막 주먹이 휘몰아치는 섬광권기를 날릴 때.
파앙!!
일그러지던 공간이 다시금 제자리를 되찾았다. 라이언은 황망한 눈으로 아이젠을 보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 스페이스 잼을 무위로 돌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기현상이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일그러지는 공간을 다시 펼 수 있단 말인가! 공간이 무슨 종잇장이라도 된단 말인가?
황당해 표정 관리조차 안 되는 라이언. 아이젠은 그의 어깨에 턱 하고 손을 올렸다.
“왜, 놀랐냐?”
“이……!”
“입 다물고 꺼져. 팔 빠질 것 같으니까!”
마침내 아이젠의 주먹에서 다시 한번 암화의 불길이 뭉쳐들었다. 아이젠의 주먹이 향한 것은 라이언의 명치. 이미 몸 안의 모든 오러를 다 써버린 라이언은 아이젠의 권법을 정통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천차횡도, 염적양!”
콰아아아아아!!!
라이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까맣게 질린 뒤였다. 염적양에 맞은 바로 그 순간 즉사해 버린 것.
떠나고 없는 그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전력을 얕봤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망자의 허상일 뿐이지만.
‘타이거와 하이에나는…….’
껌뻑이는 죽음의 너머로, 타이거와 하이에나 역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라이언의 눈에 보였다. 오늘 이날 전투는 공화국군의 패배로 마무리됐다.
털썩!
라이언의 시체가 군사들이 없는 땅 위에 내려앉았다. 그때,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이언의 시체 앞에 발을 디디는 자가 있었으니.
“…….”
그건은 바로 노령의 기사였다.
그가 등장하자마자였다. 마치 공기가 무거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제국군과 공화국군 모두 하던 싸움을 멈추고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바람이 오는 방향에는 바로 그 노령의 기사가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히 노령의 기사에게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때, 한편에서 공화국군들과 혈전 중이던 불라트가 외쳤다.
“지크프리트다!”
백발에 백안, 이마에는 커다란 흉터, 얼굴 전면을 뒤덮고 있는 새하얀 수염. 그리고 얇은 가닥의 주름들. 지크프리트의 첫인상은 영락없는 노인이었지만 그 하얀 눈동자 안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결함이 깃들어 있었다.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전신 갑옷과 허리춤에 매여 있는 마찬가지로 은빛인 검은, 지크프리트의 고결함을 한층 빛내고 있었다.
“…….”
지크프리트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을 때, 조용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이 자리에 수백, 수천 명의 군사가 모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거짓이기라도 한 양.
불라트는 쥐고 있던 창을 휘휘 휘두르며 지크프리트에게 걸어갔다. 그는 흥분감을 지우기 어려운 얼굴로 말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리타스나트의 악마’ 검은 칼날의 지크프리트. 은퇴도 안 하시나!”
불라트는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켰다. 상처가 나 있는 바로 그 눈이었다.
“이거 기억하겠지? 당신이 내게 남긴 거잖아.”
“…….”
“오늘에야말로 이것의 복수를 해야겠군. 다들 나서지 마십시오! 놈은 제가 상대할 거니까!”
불라트 후작은 테오발트 공작과 오마르 대공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언동은 분명 불경했으나 테오발트와 오마르는 뒤로 한발 물러서 줄 수밖에 없었다.
지크프리트는 25년 전 유령전쟁의 악적(惡敵). 그를 숙적으로 여기는 것은 테오발트뿐만이 아니었다. 불라트 역시 그랬던 것이다.
불라트는 창을 오른손에 꼬나쥐었다. 보랏빛 창대에 창끝은 신묘하게 빛나는 금빛이었다. 전체적인 길이는 불라트의 몸보다 1.5배 정도 되었다.
“드디어 나의 아티팩트 ‘결실의 창 레오니다스’가 네놈의 피 맛을 보겠군, 지크프리트.”
“…….”
“뭐라고 말 좀 해보지? 나이 먹고 노망이라도 드셨나?”
지크프리트는 줄곧 조용했고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82세로 고령인 그인지라 가는 귀가 먹었을 법도 한 나이였다. 하지만 지크프리트의 귀는 멀쩡했다. 그는 그저 불라트의 얼굴을 살펴볼 뿐이었다.
“미안하네만, 자네 누군가?”
“……?!”
“기억해 보려고 했는데 얼굴을 잘 모르겠구먼.”
“이… 영감탱이가 감히. 날 못 알아본단 말이냐?!”
불라트의 눈에 천불이 끓었다. 아이젠은 갑작스레 벌어진 현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용히 전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저기 끼어드는 것도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나저나, 저게 바로 지크프리트인가.’
라르페소에 클라우디아를 납치해 간 장본인, 지크프리트.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간사하고 추악한 노인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이건 뭐 자신보다 건장해 보이니 할 말이 없었다. 여든둘의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덩치와 기세였다.
“내 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날 기억도 못 하다니!”
불라트가 분노하며 한 걸음 더 지크프리트에게 다가섰다. 불라트의 창이 지크프리트를 찌를 위치까지 가까이 왔음에도 지크프리트는 검을 뽑지 않은 채였다.
“흥, 그럼 기억나게 해주겠다. 보여주마. 25년 전 전쟁영웅이라 불렸던 체호프 후작가의 신묘한 창술, ‘체호프 창술’의 정수를 말이지.”
불라트가 창을 풍차처럼 휘휘 돌렸다. 체호프 창술은 일반적인 창술과 달리 찌르기를 주 기술로 사용하지 않는다. 창 전체를 몸과 일체화시키는 ‘신창합일(身槍合一)’의 기법이 바로 체호프 창술의 정수였다.
“간다! 그리고 끝이다, 지크프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