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회의는 싱겁게 끝났다. 결국 라르페소를 어떻게 뚫을 수 있을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아이젠은 회의장 바깥을 나오며 찌뿌드드한 몸을 풀었다. 역시 가만히 앉아 있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스보셋 장로가 그에게 인사하며 지나치자, 아이젠이 문득 그를 불러 세웠다.
“이스보셋 장로. 아니, 여기선 영기사라 불러야 하나요?”
“큼. 편히 부르십시오, 소가주님.”
“지크프리트란 사람, 장로도 본 적이 있어요?”
“큼. 예, 있습니다. 멀리서 본 것뿐이지만.”
“어떤가요?”
이스보셋은 턱에 손을 얹고 고민하는 듯싶다가 말했다.
“큼. 지금은 아마 여든을 넘긴 나이일 테지만, 그 실력은 전성기 못지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25년 전에 그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래요…….”
아이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기대감이었다. 지크프리트가 그 정도로 대단한 자라면, 모름지기 마땅히 주먹 한번 부딪쳐 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바로 아이젠이 아니었던가.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이스보셋을 불렀다.
“아, 그. 절 구해준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아, 위스퍼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자는 도로 공화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큼. 소가주님을 내려놓은 대가로 목숨을 한 번 빌어 사라졌지요.”
“흐음.”
“큼. 살려 보내지 말 걸 그랬습니까?”
이스보셋의 살벌한 물음에 아이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려 했는데. 이미 없다면 어쩔 수 없죠.”
* * *
“끌고 가! 배신자 녀석이다!”
“크윽.”
위스퍼는 양손이 뒤로 포박당한 채로 공화국 병졸들에게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는 속으로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중이었다.
‘젠장, 살아서 귀환했더니 이게 갑자기 뭔 꼴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제국에 남아 있을걸!’
퍽! 마침내 병졸 하나가 위스퍼의 등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자연히 조아리는 자세가 된 위스퍼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수도 라르페소의 문지기 라이언이었다.
이곳은 공화국의 수도 라르페소. 하나밖에 없는 문지기를 지키는 것은 최근 공화국의 떠오르는 신예 라이언 소장이었다. 그는 마흔 살을 갓 넘긴 나이에 벌써 소장 자리에 오른 기념비적인 인물이었다.
“위스퍼 일병이라고?”
라이언은 마치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뒤로 얼기설기 넘긴 남자로,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르고 싶었지만 숱이 적고 잘 자라지 않는다는 비하인드가 있었다. 그래서 수염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의 컴플렉스였다.
위스퍼는 부들거리다가 대답했다.
“에, 예! 라이언 소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자 라이언 소장이 몇 가닥 없는 그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슌타리아에서 네놈이 제국에 포로를 바치고 그 대가로 목숨을 구걸했다는 것을 본 자가 있다. 듣자 하니 그대는 망골대왕의 힘을 일부러 받지 않았다던데. 왜 그랬지?”
“저, 저는 순수히 저만의 힘으로…….”
“그 탓에 공화국군이 모두 죽었어도 자네는 살아 있군.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는데 느끼는 바는 없나?”
위스퍼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라이언 소장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어처구니가 없었다.
포로 아이젠을 바치고 목숨을 구걸했다고?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절한 아이젠을 몰래 살해하고 도주할 수도 있었다. 위스퍼가 그러지 않았던 것은 괜한 저항을 할 바엔 제국에 잘 보여서 차후에 뒤통수 칠 기회라도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망골대왕의 힘을 왜 받지 않았느냐고? 그야 망골대왕이 죽으면 자신도 죽을 테니까! 위스퍼의 입장에서는 자기 명운을 망골대왕과 같이하는 다른 병졸들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
그리고,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다니? 자신은 스스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럼 그 자리에서 자신도 똑같이 장렬히 전사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
위스퍼가 입만 다실 뿐 아무 말도 못 하자, 라이언 소장이 쿵 발을 내려쳤다. 그의 오른손에는 한 손에 꼭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의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위스퍼 일병. 그래, 지난 일은 이제 묻지 않기로 하겠다.”
“예? 가, 감사합니다!”
“대신 대답해라. 제국의 전력은 현재 어떻지? 25년 전의 전쟁영웅들이 모두 출전했다는 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거기에 더해 아이젠이라고 하는, 웬 미친놈도 한 명 같이 있는데…….”
위스퍼는 아이젠에 대해 최대한 상세히 보고했다. 주먹 하나로 망골대왕을 박살 냈다는 둥, 실력만으로 보았을 땐 다른 전쟁영웅들과도 충분히 견줄 만하다는 둥, 나이가 성인을 넘지 않아 보였는데 무의 화신처럼 보였다는 둥.
설명을 듣는 라이언 소장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이 되어갔다. 이내 그가 손을 들어 위스퍼의 보고를 멈췄다.
“그만. 더는 못 들어주겠군. 자네는 공화국군인가, 제국군인가? 왜 제국 놈 따위를 그렇게 추켜세우는 거지?”
“예? 저, 저는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
“더 듣고 싶지 않다. 위스퍼 일병, 그대는 반역죄로 압축형에 처한다.”
“예?! 바, 반역죄라니요! 억울합니다!”
“이미 결정됐다. 미안하군.”
그 직후였다. 위스퍼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위스퍼의 온몸이, 마치 정육면체의 보이지 않는 유리막 같은 것에 에워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눌리기 시작했다. 정육면체는 점점 부피를 좁혔다.
“우, 우욱……!”
그러다가.
빠지직!
“끄어어어!!”
위스퍼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는 입도 눌려서 비명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빠지직! 우드득! 와그작!
뼈가 튀어나오고, 핏물이 넘쳐흐르는 동안에도. 위스퍼를 바라보는 라이언 소장의 눈은 마치 동물을 도축하는 듯 무미건조했다.
“살려주어어!”
우드득!!!
마침내.
통― 통―
위스퍼는 아주 작은 하나의 큐브 형태로 압축되었다. 그것은 각설탕 하나보다도 작았다. 라이언 소장은 큐브를 집어 들더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종대로 서 있던 공화국 병졸들에게 외쳤다.
“라르페소에 방벽을 세워라. 방벽은 진격의 형태다.”
“예!!”
쩌렁쩌렁한 병졸들의 울림.
라이언 소장은 손바닥을 접어 큐브를 와락 박살 내버렸다. 큐브는 가루가 되어 그의 손 위에서 흩어졌다.
“슌타리아를 빼앗긴 채로 둘 수야 없지. 아이젠이라고 했던가?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죽여주마.”
* * *
테오발트는 콜레몽의 성 밖에 나와 있었다. 평화로운 영지민들 사이로 제국 사람이 지나다녀도, 영지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영지민들은 공화국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군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지민들은 콜레몽의 영지장이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만 하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테오발트는 콜레몽의 장터로 나와, 오랜만에 느껴보는 활기찬 기운을 코로 맡았다. 그의 미소에도 자연히 미소가 번졌다.
“클라우디아…….”
테오발트가 중얼거리는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젠이 거기 서 있었다. 아이젠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아니, 아이젠. 네가 여기까진 웬일이냐.”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내게?”
그렇게 아이젠과 테오발트는 대화를 위해 한적한 곳을 찾으러 다녔다. 그때 아이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자,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여기 서 있는 램버트를 이기면 진귀한 다이아몬드가 공짜! 참가비만 내고 이기신다면 완벽한 이득!”
단상 위에서 확성기를 든 깡마른 남자가 옆에 있는 덩치 큰 청년을 홍보하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램버트로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웃통을 까고 있어 단련된 몸이 훤히 드러났다.
두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이 망설이는 그때, 아이젠이 테오발트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내가 해보죠.”
“아이젠? 뭐 하는 게냐.”
“일단 보세요.”
“오~ 어린 소년이 도전을 하겠다고 합니다! 자, 다들 박수~!”
아이젠은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확성기 남자에게 내밀었다. 돈을 확인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램버트가 목을 우두둑 풀며 아이젠에게 다가섰다.
“어이, 비리비리한데 돈만 날리는 거 아니냐?”
“램버트라고 했나? 초면인데 미안하게 됐어.”
“응?”
“자리 좀 비켜주지.”
“뭔 소리―”
슈욱― 한순간 램버트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콰앙!! 램버트는 그대로 수직 낙하해 단상 위에 떨어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봤어, 방금?”
“갑자기 혼자 붕 떠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몰랐다. 아이젠이 램버트의 어깨를 잡고 집어 던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이 자리에서 테오발트밖에 없었다.
아이젠은 테오발트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가주님. 올라오시지요.”
“…하하. 참으로 건방지구나, 아이젠.”
아이젠의 행동은 소가주로서 올바르지 못하다. 하지만 테오발트는 어째선지 그 치기 어린 행동에 미소가 지어졌다.
테오발트도 아이젠을 따라 단상에 오르자, 확성기 남자는 어느새 나 몰라라 줄행랑을 쳐버렸다.
아이젠은 그가 가지고 튀었을 다이아몬드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가주님, 가주님과 힘겨루기를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바로 테오발트와 제대로 한 판 해보는 것.
테오발트가 빙긋 웃었다.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는 듯한 웃음이다. 허리춤 위 에레디아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테오발트는 장난스레 숨을 뱉었다.
“그러하더냐. 하나 힘겨루기는 그냥 해선 재미가 없는 법. 뭔가 걸었으면 한다만?”
“먼저 말씀하세요.”
“가주가 되기 전까지는 건방 떨지 말거라, 아이젠. 네 언동은 제국의 공작이 되기엔 너무 무례하구나.”
“음. 네, 뭐. 알겠습니다. 가능한 한 예의 있게 행동하죠.”
“그러는 너는? 네가 이긴다면 뭘 걸 테지?”
테오발트의 물음에 아이젠이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이기면, 라르페소 침공의 선봉장 자리를 주십시오.”
“―!”
테오발트가 크게 놀랐다. 아이젠은 지금 라르페소를 치러 갈 때, 가장 최전방에 서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젠이 말을 덧붙였다.
“아이젠.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진 알고 있는 것이냐?”
“네. 슌타리아에서는 후방을 맡았으니, 라르페소에서는 제가 전방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젠의 불만은 확실했다. 그는 슌타리아에서처럼 후방에 남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전쟁터에서 원하는 것은 최전방에서의 혈전이었다.
그리고, 아이젠은 다름 아닌 지크프리트와의 대결을 원했다. 공화국 최고 전력과의 대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씨익. 아이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