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선봉 】
번쩍!
아이젠은 눈을 뜸과 동시에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그가 누워 있는 곳은 침대였다. 그리고 이곳은 넓은 방이었다.
“윽, 머리야.”
아이젠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만지려다 문득 정신이 들어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 위까지가 흰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붕대 색이 하얀 걸 보면 핏물이 새어 나오진 않은 모양이다.
“뭐야. 이 팔을 누가 고쳤지?”
아이젠의 오른팔 상태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웬만한 의원이라도, 심지어 사울 장로라도 완전히 치료하긴 어려울 텐데. 대체 누가 치료한 것일까?
“으으.”
아이젠은 두통을 호소하며 침대 옆에 있던 창문으로 불쑥 고개를 빼 내밀었다.
이곳은 성이었다. 밑에는 성을 경비하는 병사들 몇몇이 자리해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평화에 가까웠다.
“끄응.”
아이젠이 침대에서 나왔다. 몸에 내공이 없는 걸 보면 오래 잔 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게 문고리를 돌리려는 그때,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등장한 것은 이스보셋 장로였다.
한순간 이스보셋 장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 소가주님! 큼, 깨어나셨군요.”
“이스보셋 장로.”
꼬르륵. 그때 아이젠의 배가 크게 울었다. 이스보셋 장로는 미소도 짓지 않고 말했다.
“큼. 이틀 내내 잠들어 계셨으니 배고플 만도 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이틀? 제가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다고요?”
“예.”
이틀 밤이 지나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아이젠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니… 음, 어떻게 된 겁니까?”
“큼. 콜레몽의 영지장을 소가주님께서 쓰러뜨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망골대왕이라 불리는 그자의 시신은 저희가 수습했습니다. 시신이라기엔 녹아버린 뼈다귀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
영지장이 죽은 영지를 점거하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제국은 이틀 밤사이 콜레몽을 점거해 버렸다.
“콜레몽성 역시 저희가 깃발을 꽂았습니다.”
“그새 상황 정리가 다 끝났군요.”
“예. 큼, 반기를 띤 이들은 모두 사로잡았습니다.”
“영지민들 죽이지는 마세요. 선량한 시민들일 뿐이니까.”
“제국은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찌 무고한 영지민들을 죽이겠습니까. 큼.”
아이젠이 콜레몽에서 망골대왕을 쓰러뜨렸을 때, 그와 동시에 슌타리아의 공화국군도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젠은 아마 그들이 망골대왕의 힘을 빌려 쓴 탓이 아닐까 싶었다.
‘간츠펠트 때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라. 간츠펠트나 도강문은 내공의 일부만 준 것이지만, 내공을 본격적으로 다룬다면 그 내공의 본 주인과 명운을 같이하는 거다.’
즉 망골대왕이 죽었다면 그 내공을 쓴 이들도 모두 죽는 것이다. 아이젠은 생명이란 참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 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 보면 이따금 하인들이 청소도 했던 모양인데, 그럼에도 세상모르고 잤다는 사실이 아이젠에게는 당황스러웠다.
‘전시 상황에 잠이나 퍼질러 자다니. 그것도 이틀씩이나. 밥도 안 먹고. 반성하자.’
약 5초간의 짧은 반성을 끝낸 아이젠은 이스보셋 장로에게 고개를 쳐들었다.
“장로, 잠깐 혼자 있고 싶습니다. 나가 계셔주세요.”
이스보셋 장로가 나가고, 아이젠은 침대에 가지런히 앉아 무혈신공을 운공했다.
예상대로 내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젠은 결자해지를 통해 자신의 내공이 7성 상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거 없었다고 생각했던 망골대왕과의 싸움이 제법 혈투였던 모양이다.
“후우. 이제 곧 전생의 경지에 다다르는 건가.”
8성 현경의 경지. 그것이 아이젠이 이강철이던 시절에 올랐던 경지다. 그 경지에 올랐을 때 이강철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지금 아이젠은 그 절반 정도밖에 살지 않았다. 그런데 전생과 비슷한 경지다.
전쟁은 있어선 안 되지만 전쟁을 통해 아이젠은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7성 상위면 이제 그 힘을 시험해 볼 때다.’
아이젠이 결의를 다졌다. 7성에 올랐을 때부터 쓸 수 있었지만 아직 운용하지 않은 기술 체계가 있었다. 그것을 시험해 볼 때였다.
“그나저나 이 오른팔은 누가 고쳐놓은 거지?”
아이젠은 고민 끝에 붕대를 풀어버렸다. 붕대 안에는 아이기스와 함께, 그 밑에 상처투성이인 오른팔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흉터와 흠으로 가득한 오른팔은 절대 멀쩡하다고 볼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치명상인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만귀변국을 거친 팔이라기엔 너무 멀쩡했다. 누가 이렇게 해둔 걸까?
꼬르르륵.
그때 아이젠의 배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아이젠은 쩝쩝거리며 요깃거리를 찾았다. 이틀을 내리 잤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뭐 먹을 거 없나.”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울 만한 것도.
“하는 수 없군. 먹을 걸 찾으러 가볼까.”
그렇게 아이젠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 * *
아이젠은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성의 1층까지 내려가자 그곳에 식당이 있었다. 식당 문을 열어젖히자 30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듯한 기다란 식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식탁 저 멀리 끝 상석에는 오마르가 앉아 있었다. 오마르는 시중 한 명 두지 않은 채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아이젠이 식당 문을 닫자 오마르가 아이젠에게 시선을 주었다.
“음? 깨어났군?”
“오마르 대공전하를 뵙습니다.”
“쓸데없는 격식은 빼지. 이리 와 앉아. 한 끼 하겠나?”
딱! 오마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식당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두 명의 시종이 들어와 오마르의 옆자리에 스테이크를 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아이젠은 오마르의 옆자리로 발길을 옮겼다. 상석 바로 오른쪽 자리였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식사는 스테이크였다. 불맛을 잔뜩 입힌 안심스테이크. 너무 바싹 구운 게 아닌가 싶었지만 씹어보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오른팔은 괜찮나?”
“네.”
“그거 내가 고친 거다. 팔이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 있더군.”
“대공전하께서요?”
아이젠이 기억하기로 오마르는 화염성가의 가주. 그의 주특기는 다이아몬드마저 녹여 버리는 옥염(獄炎)이었다. 옥염은 너무나도 뜨거워,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폭격을 내뱉는다.
오마르가 아이젠의 표정을 읽었는지 쩝쩝대며 대꾸했다.
“화염이라고 무조건 지지고 불태우는 기술만 있는 건 아니야. 생명의 불꽃이라는 거다. 죽은 네 오른팔에 생명을 불어넣은 거지.”
“감사합니다. 오른팔을 못 쓸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그 귀한 오른팔을 못 쓰게 되면 안 되지. 콜레몽의 영지장 망골대왕을 쓰러뜨린 게 자네라면서?”
“예.”
“그놈의 흔적을 봤어. 대단했더군.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린우드의 소가주. 자네 주먹은 너무 뜨거워. 너무 뜨겁다고.”
이건 칭찬인가? 아이젠은 일단 대충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오마르가 남은 스테이크를 입에 털어 넣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아이젠을 바라보았다.
“자네, 정말로 열일곱 살 맞나?”
“네?”
“사실은 그 안에 나이 많은 능구렁이라도 들어차 있는 거 아니야?”
정곡이었지만 아이젠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마르가 껄껄 하고 웃어버렸다.
“주먹깨나 강한 줄은 알겠다. 하지만 모든 것을 불태우는 옥염마법을 쓰는 내게도 생명의 불꽃은 있지. 명심해라. 모든 것을 부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어야 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뭐, 이건 그냥 나이 많은 노인네 충고고. 잘했어. 덕분에 콜레몽까지 우리가 단숨에 먹어버렸군. 크하하! 참으로 뜨거운 진격이 아닌가!”
오마르의 웃음소리는 크고 시끄러웠다. 아이젠이 고막을 막아버릴까 생각하는데, 오마르는 쩝 입맛을 다셨다.
“뭐, 공화국을 끝장내려면 완전히 심장부까지 들어가야겠지만.”
“심장부?”
아이젠이 반응하자 오마르가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왜, 그곳까지 네놈이 무너뜨려 보려고?”
“…봐서요.”
“크하하! 고놈 참 뜨겁게 맹랑하네!”
뚝! 웃음을 그친 오마르는 아이젠의 눈앞에 손을 갖다 대 불길을 피워올렸다. 오마르의 손바닥에서 솟아오른 불길은 마치 하나의 지도처럼 보였다. 그건 공화국 지도였다. 붉게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유독 더 시뻘건 위치가 있었다.
“바로 여기다. 공화국의 심장부, 수도 라르페소.”
“수도.”
“그래. 이곳을 점령하면 공화국은 사실상 제국 손에 넘어온 것과 다름없다. 어때, 구미가 좀 당기나?”
아이젠은 씨익 웃어버렸다. 배고픔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그야 물론입니다.”
* * *
회의장의 긴 테이블 위에 지도가 깔렸다. 지도를 펼쳐 전황을 설명하는 이는 이스보셋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라르페소는 공화국의 심장부입니다. 그곳을 지키는 자의 이름은, 다들 익히 아시는 바로 그 지크프리트입니다.”
지크프리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회의장 안에 앉아 있던 다섯 영웅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특히 테오발트의 얼굴이 크게 찡그려지는 것을 아이젠은 보았다.
‘왜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거지?’
아이젠만 본 것이 아니었다. 레오 황제는 테이블 앞으로 몸을 숙여 테오발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테오발트 공작. 지크프리트는 그대와 악연이 있었지?”
“그렇습니다, 폐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지크프리트의 실력은 그대보다 위인가, 아래인가?”
레오 황제의 물음에 테오발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25년 전과는 저도 그도 많이 달라졌을 테지만, 제 실력으로는 무리입니다.”
“흐음. 그러한가…….”
테오발트가 맞서보지도 않고 패배를 선언하다니. 대체 지크프리트가 누구이길래? 이 자리에서 오직 아이젠만이 그 이름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아이젠이 손을 들었다.
“실례지만 지크프리트가 누굽니까?”
그러자 오마르가 아이젠을 돌아보고 말했다.
“지크프리트 중장. 라르페소의 영지장이다. 일명 리타스나트의 악마.”
“악마?”
“우리가 붙인 별명이지. 나를 포함해 제국의 전쟁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이 다섯이나 있는데도 공화국이 정복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아나? 바로 지크프리트 때문이야.”
지크프리트 중장은 25년 전 전쟁 당시에도 이미 노장이었던 자로, 벌써 여든을 넘긴 나이였지만 여전히 공화국의 최고 전력이었다.
“테오발트 공작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덤벼도 그 한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말까야.”
“그 정도인가요.”
“그 정도다.”
지크프리트가 버티고 서 있는 한 공화국 수도 라르페소를 뚫을 방도는 없다, 그것이 정론이었다.
“뭐, 지금은 지크프리트가 아니라 그 문지기인 라이언이란 녀석부터 처리해야 하지만 말이야.”
오마르가 짧은 설명을 마치자, 레오 황제가 그를 쳐다보았다.
“오마르 대공. 군사들을 불러 어찌하면 좋을지 전술을 세우도록 하세.”
“폐하 뜻대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