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갑자기, 아이젠이 불명석장의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망골대왕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니, 아이젠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공간 자체가 느려졌다. 망골대왕 자신조차 느렸으니까. 지금 다가오는 저 오른쪽 주먹을 피할 틈조차 낼 수 없었으니까.
‘뭐지?’
아. 설마 죽기 전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는, 바로 그런 현상인가?
아이젠의 오른쪽 주먹이 자신의 갈비뼈에 맞닿을 때까지, 망골대왕은 움직이지 못했다.
투카아아아아앙!!!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곡소리와 함께, 아이젠의 주먹에서 검은 빛살이 쏘아졌다.
검은 빛살은 망골대왕의 갈비뼈를 뚫고, 척추를 끊고, 그 몸 안 어딘가에 있을 영혼을 녹였다.
“그, 그오오오오오!!!”
망골대왕이 요란스러운 비명을 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망골대왕의 온몸 뼈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콜레몽의 영지장, 마혼 망골대왕.”
“그아아아아아아아!!!”
“잘 가라. 콜레몽은 내가 접수했다.”
“이노오옴! 이노오오오오옴!”
망골대왕이 녹아내리면서도 오른손의 불명석장을 꽉 쥐었다. 불명석장을 바닥에 내려치자 석장에서 빛이 나오며 아이젠을 감쌌다.
위이잉!
쩌적!
빛이 사라지자 아이젠의 몸이 굳어버렸다. 아이젠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망골대왕은 불명석장의 끝을 아이젠에게 겨누었다. 그 끝은 창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나는 스켈레톤들의 대부, 마혼 망골대왕이다! 수백 년간 살아온 내가 감히 네깟 녀석에게 패할 것 같으냐? 정녕 그럴 것 같으냐?!”
“응.”
“어림도 없다, 이놈! 나는 망골대왕이다아아아!!!”
슈우욱! 불명석장이 아이젠의 심장을 노리고 덤벼왔다. 아이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처억!
그렇게 불명석장이 아이젠의 가슴을 찌르려는, 그때였다.
사아아… 불명석장이 그 날카로운 끝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망골대왕을 녹이던 만귀변국의 힘이 불명석장에까지 가닿은 것이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 귀곡성이 들려왔다. 망골대왕은 이제 허리뼈와 다리뼈조차 녹아 더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찰박거리는 자신의 몸뚱이 위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나는… 나는 망골대왕이다. 이노오옴…….”
“휴. 쫄았잖아, 인마.”
아이젠은 속박에서 풀려난 몸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망골대왕의 가련한 죽음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아이젠은, 아직 녹다 만 그의 두개골 위에 왼손바닥을 얹었다.
“이미 늦었겠다만, 그래도 고통스럽지 않게 끝내주마. 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나는… 망골…….”
“알았다고.”
결사신권, 박살!
빠각! 손바닥을 주먹으로 뭉친 아이젠의 권기가 망골대왕의 두개골을 부서뜨렸다. 망골대왕은 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후우.”
아이젠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만귀변국은 생명을 담보로 써야 하는 기술. 천차횡도의 강화 형태다. 천차횡도로 끝장을 내기 어렵다면 훨씬 더 강한 만귀변국의 힘으로 영혼마저 불살라 버리면 된다. 그것이 아이젠이 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천차횡도도 그 반동이 어마어마한 기술인데, 만귀변국이라고 그 위험이 없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윽.”
아이젠이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녹아내리고 있는 망골대왕의 옆편이었다.
만귀변국을 시전했던 아이젠의 오른팔은 처참하게 뒤틀려 있었다. 살갗이 터져 뼈와 살이 흉측하게 드러나고, 그 안에서 핏물이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나왔다.
엄청난 상처. 의원에 데려간다고 한들 다시 치료할 수 있을까 싶은 상처였다. 전생에서도 아이젠은 만귀변국의 힘을 몇 번 사용하지 않았었다.
“으으, 더럽게 아프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젠의 몸 안에 남아 있던 내공은 완전히 사라져, 그는 현재 무공을 익히지 않은 맨몸뚱이 소년과 다를 바 없었다. 한 줌의 내공이라도 만들어내려면 사흘 밤낮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이, 괜찮아?]
현무도 걱정스러웠는지 말을 걸어왔다. 아이젠은 이제 대답할 힘도 쥐어짜 내야만 했다.
“아니.”
[도와줄 사람을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누가 도와줘. 여긴 나 혼자 온 건데.”
[그럼 어쩌려고? 너 오른팔 상태 좀 봐. 이거 가만 놔두면 영영 못 쓰게 될 거다.]
“그건 좀 아쉬운데.”
[아쉬운 정도로 끝날 게 아니잖아!]
“시끄러워. 귀 울린다.”
걸을 힘도, 몸을 일으켜 세울 힘도 없었던 아이젠은 허망하게 왼손만 쥐었다 폈다 하며 흙을 만졌다.
“아.”
[왜 그래?]
“미안. 나 먼저 좀 잔다.”
[뭐? 잠깐만!]
그러나 결국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풀썩.
아이젠의 고개가 떨어졌다. 이곳은 콜레몽으로 향하는 길목, 근방에는 공화국군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이젠을 발견한다면 아이젠은 전쟁 포로가 될 것이다.
[야! 아이젠! 정신 차려! 이런 데서 기절하면 어쩌자는 거야, 젠장!]
현무가 동동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기스 안에 있는 그이기에 주변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형편이 안 좋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에서 공화국군의 복장을 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으니.
저벅.
“…….”
그것은 바로 아이젠이 기절시켜 놓았던 위스퍼였다.
위스퍼는 죽은 눈으로 아이젠을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널 죽여서 데려가면 공화국에서 난 출셋길이 탄탄대로로 열리겠지.”
한마디 말을 중얼거린 위스퍼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아이젠을 질질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지금 슌타리아를 표현하자면, 혼란 그 자체였다.
모르겐슈테른, 아킬레스, 하인켈 반지 삼대위의 힘은 생각보다 거셌다.
“공화국의 전군이여, 진격! 진격하라!”
“아킬레스 대위님의 명령을 따라라! 와아아아!”
아킬레스의 아티팩트 ‘알파의 반지’는 근처 지정해 둔 장소에 있는 아군 다수를 자신의 전방으로 소환할 수 있다. 공화국군은 수도 없이 죽어 나갔지만 수도 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인켈 이놈, 몇 번이나 베어야 죽을 테냐.”
“크크크! 나 하인켈은 절대 죽지 않아!”
하인켈의 아티팩트 ‘니벨룽겐의 반지’는 근처에 있는 아군의 생명력을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렇기에 테오발트가 하인켈을 벌써 몇 번이나 베어 죽였는데도, 하인켈은 그때마다 멀쩡히 일어났다.
“모르겐슈테른!”
마지막으로 모르겐슈테른의 아티팩트 ‘롱기누스의 반지’는 근처 지정해 둔 장소에 있는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 아마 콜레몽 어디에 마법사들이 모여 있을 것이고, 그들의 마력은 지금 모르겐슈테른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모르겐슈테른이 외쳤다.
“마력폭탄!”
그러자 모르겐슈테른의 몸에서 수백 개의 구체가 토하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 앞에 서 있던 마테오 백작이 벽력마법을 넓게 펼쳐 보호막을 만들었다.
콰과과과광!
거대한 폭음. 모르겐슈테른은 저 강력해 보이는 기술을 벌써 수십 발이나 쓰고 있었다. 롱기누스의 반지가 있는 이상 그의 마력 양은 거의 반영구나 다름없었다.
처억!
제국의 다섯 영웅이 한자리에 모였다. 레오 황제, 오마르 대공, 테오발트 백작, 불라트 후작, 마테오 백작. 그들은 서로 등을 지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수없이 공화국 병졸들을 제거했는데 아직도 산더미만큼이나 많이 남았다. 오히려 더욱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폐하, 적의 숫자가 심상치 않습니다. 잠시 물러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만.”
“그럴 순 없네, 오마르 대공.”
오마르의 권유에도 레오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이 전쟁의 향방은 알 수 없게 되어버려.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나야 하네. 알겠나?”
“끄응, 폐하 말씀이 정 그러시다면, 제가 결국 힘을 쓰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군에도 피해가 있겠지만 어쩔 수 없―”
결국 오마르가 봉인을 풀고 옥염마법을 쏟아부으려는 그때였다.
“끄아악!”
“으헉!”
“큭!”
“우욱!”
별안간 공화국 병졸들이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반지 삼대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겐슈테른은 눈에 핏발을 세웠고, 아킬레스는 입을 틀어막았으며, 하인켈은 바닥에 쓰러져 부들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불라트가 말하는 그때, 마침내 공화국군 전부가 바닥에 엎어져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지 삼대위만이 질기게도 살아 부들거리고 있었다.
모르겐슈테른이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이럴 수가. 설마, 설마 망골대왕님께서!”
“그건 말도 안 돼! 크윽!”
“그어어억! 망골대왕님! 망골대왕니이이임!!”
그렇게 반지 삼대위마저 목을 부글거리다가 털썩 쓰러졌다. 모두 죽은 게 틀림없었다.
“허어. 이게 대체 무슨……?”
레오 황제도 그렇게 황망해했다. 마테오 백작만이 침착하게 뒤에 서 있던 제국군 몇몇에게 명령했다.
“시체를 하나하나 살펴 혹시 살아남은 자가 없는지 찾아라.”
“예!”
그렇게 제국군이 공화국 병졸들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땅굴에서부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
다섯 영웅이 경계하고 서는 찰나였다. 그들은 곧 경계를 풀게 되었다. 땅굴에서 걸어 나온 이가 공화국군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한 명이 아니라, 그 등에 누군가가 업혀 있었지만.
“아이젠?”
누군가가 말했다.
등에 업혀 있는 것은 아이젠, 그를 업고 있는 것은 위스퍼였다. 위스퍼는 조심스레 테오발트의 앞에 다가가, 그 발치에 아이젠을 내려놓았다.
“저를… 죽이지 마십시오. 저, 저는 이분을 살리고자 데려온 것입니다.”
위스퍼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불라트는 곧바로 창을 꺼내 들어 그 끝을 위스퍼의 턱에 겨누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네가 그린우드 소가주를 이 꼴로 만든 게 아니라는 보장이 어딨느냐?”
불라트는 아이젠의 뒤틀린 오른팔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위스퍼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도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죽는다 생각하고 말했다.
“윽, 이, 이러지 마십시오. 일개 병졸인 제가 어떻게 그린우드의 소가주를 이긴단 말입니까! 저분은 콜레몽의 영지장이신 망골대왕님마저 쓰러뜨리셨습니다!”
“뭐?”
“뭐라?”
“콜레몽의 영지장을?”
다른 영웅들도 반응했다. 그사이 아이젠이 부들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실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섯 영웅과 위스퍼의 면면을 살폈다.
‘뭐야, 이거. 꿈인가?’
그때 레오 황제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젠은 화들짝 놀랐으나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폐하.”
“그린우드의 아이젠 소가주. 그대가 콜레몽의 영지장을 쓰러뜨렸단 말이 사실인가?”
“네, 그렇습니다.”
“…허어.”
레오 황제는 다시 고개를 들고, 다른 영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모르는 새 콜레몽의 영지장까지 이기다니. 이 아이야말로 또 하나의 영웅 아닌가? 허허허!”
그의 호탕한 웃음을 뒤로하고, 아이젠은 꿈이 아니구나 생각하며 다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