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망골대왕. 네가 가진 힘을 이제 좀 알겠다.”
아이젠이 뒤를 돌아보곤 성큼성큼 망골대왕에게 다가섰다.
“한 번 있었던 일을 다시 만들어내는 힘. 그게 너의 고유한 힘이군.”
“그렇다. 눈치가 빠른 애송이로구나.”
바위는 한 번 날아온 모양대로, 그 각도까지 철저하게 똑같이 유지한 채 날아왔다. 완벽하게 똑같은 바위란 세상에 없다. 다시 똑같이 만들어내지 않는 한.
망골대왕이 석장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나의 힘은 ‘재현(再現)’.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다시 펼쳐내는 힘. 이 폐로와 터널, 그 너머의 지하 땅굴도 마찬가지다. 25년 전에 있던 것을 내가 재현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지.”
“아무도 이 길을 찾지 못했던 건, 최근에 새로 만들어냈기 때문인가.”
“그렇다. 제국에는 훌륭한 기습이었을 테지?”
아이젠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다면 재현의 힘은 몹시 광범위하다는 말이 된다. 폐로, 터널, 지하 땅굴에 이르기까지, 그 거대한 지형을 단순히 손가락 까딱거리는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니.
‘마혼은 마혼이다 이건가.’
망골대왕의 손에서 주황빛 연기가 사라졌다. 그것을 신호로 아이젠이 주먹을 꽉 쥐었다. 발에도 힘이 들어갔다. 콰아아! 아이젠의 몸에서 암화의 내기가 넘실거렸다.
‘강망태신.’
“뭐냐.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잖으냐?”
“그렇게 보여? 실제로도 그래.”
팟! 아이젠이 사라졌다. 아이젠은 망골대왕의 턱밑에 있었다. 키가 워낙 커서 망골대왕은 아이젠이 자신의 밑에 있다는 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알았다.
“죽어라, 이 마물 새끼야.”
천차횡도 염적양!
모든 것을 불사르는 아이젠의 최강 권기가 망골대왕의 턱을 목표로 날아들었다.
“우오오옷?!”
콰아아아아!!!
불길이 일어난 듯한 착각, 망골대왕과 그 뒤편의 모든 걸 집어삼킨 아이젠의 암화는 주변에 아지랑이를 남기며 장렬히 산화했다.
아이젠은 염적양을 시전한 뒤 재빨리 물러나 상황을 살폈다.
두웅!
드러난 망골대왕의 모습은 죽어 있었다. 그는 암화의 잔상으로 인한 검은색 연기와 정체 모를 주황빛 연기에 둘러싸인 채 온몸 뼈가 바스라져 사망했다.
‘…아니. 끝이 아니다.’
아이젠은 죽은 상대에게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황빛 연기에서 불길함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드득! 우드득! 빠직! 빠그작!
망골대왕의 몸 뼈가 다시 형태를 갖추고 맞춰지기 시작했다. 듣기 불쾌한 뼈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분명 조각나 부서졌던 그의 두개골마저 온전한 형태로 되살아났다.
망골대왕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입에서 주황빛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크아. 강하구나, 네놈. 방금 건 꽤나 위협적이었다.”
“…이런 미친.”
죽어도 되살아나? 이런 미친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온몸의 뼈가 다 박살 나도 살아나는 놈을 이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젠은 그럼에도 씨익 웃어 보였다.
천차횡도. 그것은 몸 안에 있는 모든 내공을 소진해 하나의 일격으로 불살라 버리는 것. 위력은 아이젠이 가진 기술 중 최강이며, 염적양으로 응용할 경우 한 점 불꽃마저 남기지 않는 필살의 일격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염적양을 쓴 아이젠은 지금 몸 안에 내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야 했다. 원래라면 그렇다. 하지만, 암화를 넘어 7성의 경지에 오른 지금은 다르다.
‘앞으로 두 발.’
마치 섬광권기처럼, 천차횡도를 여러 발로 축적해 사용할 수 있다. 7성에 오른 아이젠이 사용할 수 있는 천차횡도는, 남은 내공의 양으로 가늠해 보건대 총 세 발.
한 발은 방금 썼으니 이제 두 발 남았다.
“끄응.”
비틀! 아이젠의 무릎이 꺾였다. 천차횡도를 쓴 여파는 그대로 만끽하는 중이었다. 한순간 몸이 완연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아이젠은 눈앞의 적 망골대왕을 바라보았다. 망골대왕의 몸에서 주황빛 연기가 사라지고, 빠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온몸 뼈가 제자리를 되찾았다.
“후우. 매섭도다, 매서워. 제국 야인의 주먹이란 이 정도로 매서운가.”
“재현의 힘이냐.”
“그렇다. 나 자신을 재현하는 것이지. 즉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내가 수백 년간 살아 대왕이라 불릴 수 있게 된 것도 거기에 기인하는 것이지.”
“흥. 말은 번지르르하군.”
“재현뿐만이 아니다. 네놈의 주먹은 확실히 매서우나 나의 영혼마저 부술 수는 없지.”
“영혼?”
뭔 소린가 싶어 아이젠이 바라보는데, 망골대왕이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수백 년간 살아왔다. 그 기간 동안 단단해진 게 비단 나의 몸뚱이뿐이겠느냐? 나의 이 영혼도 고난의 연마를 겪었다. 갈고 닦인 내 영혼을, 고작 그 작은 주먹으로 날려 버리겠다니. 어불성설이지.”
“지랄.”
아이젠은 천차횡도를 오른쪽 주먹에 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망골대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천차횡도는 소용없지 않아.’
망골대왕은 염적양에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몸을 수복해 냈다. 하지만 그것은 재현의 힘일 뿐. 제대로 맞힌다면 공격은 반드시 먹혀들 것이다. 실제로 망골대왕은 조금 전 한 번 ‘죽었다’.
하지만 망골대왕이 쓰는 재현의 힘을 어떻게 제어한담?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그 방법이란 게 너무 위험해서 탈이지만 말이다.
팟! 아이젠은 망골대왕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에게 달려들었다. 망골대왕이 불명석장을 집어 들어 그 끝으로 공격해 올 때, 아이젠은 발을 디뎌 한 번 정지한 다음 왼쪽 주먹을 날렸다.
‘환교신권!’
타앙! 아이젠의 주먹에서 쏘아진 권기가 망골대왕의 머리통을 꺾이게 하고, 그사이 아이젠은 오른쪽 주먹을 힘껏 당겼다.
‘천차횡도 염적―?!’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별안간 아이젠의 주먹에서 염적양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젠은 아직 자세도 잡지 않았기에 그 반동으로 뒤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아이젠의 시야가 흐려지고, 한순간 몸 안의 내공 3분의 1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아이젠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기절하지는 않았다.
치이이익!
아이젠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바닥을 발로 그어 멈춰 섰다. 무슨 일이 있었지?
‘뭐야. 왜 갑자기 염적양이.’
아이젠은 아직 쏘지 않았었다. 자세도 제대로 잡지 않고 주먹을 날릴 리가.
아이젠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망골대왕이 내민 집게손가락에서 주황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골대왕은 ‘아이젠이 염적양을 쓴 사실’을 재현한 것이다.
“크크크.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이 이상 접근해 오지 말라고!”
망골대왕이 주황빛 연기를 피워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아이젠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어쩔 거지?]
현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근육을 풀었다.
“너 자꾸 간헐적으로 나타나서 말 거는데 깜짝깜짝 놀라니까 하지 좀 마라.”
[놀라? 네가? 그럴 리가.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고?]
“글쎄.”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위험한 게 있다고 했잖아.]
“난 그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좋기는! 너 지금 죽게 생겼어. 알아?]
아이젠은 손가락 마디마디를 풀었다. 현무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아이젠은 상황을 분석했다.
망골대왕의 손에서는 아직도 주황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조금 전보다는 연기의 양이 잦아들긴 했지만.
그리고 아이젠이 볼 적에, 망골대왕은 재현의 힘을 쓸 때마다 주황빛 연기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 주황빛 연기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다시 재현의 힘을 쓰지 않는다.
즉.
‘무한히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야.’
만약 망골대왕이 재현의 힘을 무자비하게 펑펑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아이젠은 이미 몸 안에 한 줌의 내공만큼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염적양을 계속 재현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러지 않는 건 재현의 힘을 마음껏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저 주황빛 연기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다시 쓸 수 없다.
‘현무기공, 동심상.’
차랑― 아이젠의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죽게 생겼다고? 난 안 죽어, 현무.”
아이젠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팟! 아이젠이 망골대왕의 왼편으로 뛰었다. 망골대왕이 불명석장을 내밀자 아이젠은 아이기스를 내밀었다.
‘현무기공, 마비규정!’
쩌억! 그러자 망골대왕의 몸이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버렸다. 아이젠은 침착하게, 염적양 한 발 정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내공을 헤아렸다.
‘기회는 한 번뿐.’
재현의 힘의 주기는 매우 짧다. 아이젠이 기회를 놓치면 망골대왕을 영원히 이길 수 없다.
‘결사신권!’
아이젠의 왼쪽 주먹이 뻗었다. 망골대왕은 마비규정에 묶여 움직일 수 없다. 이 주먹이 닿는 순간 망골대왕은 재현의 힘도 쓸 수 없어 죽을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까드득!
망골대왕의 고개가 아이젠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젠이 놀라서 올려다볼 때, 망골대왕은 이미 불명석장을 쥔 손도 움직일 수 있었다.
“멍청한 놈. 겨우 이 정도 주술로 나를 포박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덥석! 아이젠의 왼손이 붙잡혔다. 그리고, 망골대왕의 손에서 주황빛 연기도 사라졌다. 빠지직! 아이젠의 왼손에서 쏘아진 권기가 망골대왕의 왼손 뼈를 박살 내버렸다. 그러나 그뿐, 권기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흩어졌다.
부서졌던 망골대왕의 왼손은 순식간에 수복되어 아이젠의 왼손 주먹을 다시 붙들어 막았다.
[끝났다. 네가 졌어, 아이젠.]
“…….”
아이젠은 자신의 왼쪽 주먹을 붙들고 있는 망골대왕을 올려다봤다. 엄청난 키다. 망골대왕은 개미라도 내려다보는 양 아이젠을 내리깔아 보았다.
“인간아. 수고 많았다. 그래도 제법 재밌었다. 네 왼손에 담겨 있던 이 힘으로, 널 끝장내 주마.”
우드득! 아이젠의 왼손이 망골대왕에게 붙들린 채로 돌아갔다. 그 끝은 아이젠의 명치였다.
“잘 가라!”
퍼엉!! 망골대왕이 재현의 힘을 사용함과 동시에 주황빛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이젠의 왼손에서 발사된 내공이 그 자신의 명치를 강타했다.
“커헉!”
아이젠이 피를 토했다. 그런데.
덥석! 그다음 순간 아이젠은 반대쪽 손으로 망골대왕의 팔을 붙잡았다.
“음?! 뭐지?!”
“이보쇼, 망골대왕 영지장 나리.”
아이젠이 눈을 희번득 뜨고 망골대왕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꼬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왼손에 염적양을 담았다고 누가 그래?”
“뭐라? 설마!”
“바로 그 설마다.”
아이젠의 왼쪽 주먹에 담겨 있던 힘은 단순한 박살.
오른쪽 주먹에 실려 있는 것이 바로 진짜였다.
아이젠의 오른손이, 망골대왕에게 뻗었다.
“그런 애송이 주먹으론 내 영혼을……!”
“갈고 닦인 영혼이랬나?”
“음?!”
“그렇다면 그 영혼마저 살라 먹어주마.”
쉬익―
‘결사신권 6성―’
아이젠의 눈동자는 암화의 검보랏빛 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만귀변국(萬鬼變國: 일만의 귀신이 나라를 무너뜨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