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망골대왕 】
아이젠은 터널을 따라 계속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으나 한참 걷다 보니 이내 저 멀리서 빛이 보였다.
“이 터널은 꺾이는 곳 없이 그냥 ‘엄청나게 긴’ 터널이었던 모양이군. 왜 이런 공간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거지?”
[나야 모르지만. 계속 갈 거야?]
“안 갈 거면 왜 걷고 있겠어.”
현무의 말을 가볍게 받아치는 아이젠이었다.
아이젠은 이윽고 터널의 끝에 도달했다. 그러자 양옆으로 기다란 회벽이 나란히 서 있는, 또 다른 길에 도착했다. 한 쌍의 회벽은 하늘을 가리며 높이 서 있었다.
아이젠은 이 길이 콜레몽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공화국군은 이 길을 따라, 터널을 지나, 지하 동굴을 돌파해 슌타리아에 도달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제국군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흠.”
아이젠은 길을 걷기 전 자세히 살펴보았다. 회벽은 군데군데 부서져 있고, 길은 몇 해 동안 비가 내리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렇게 아이젠이 길 위에 첫발을 내디딘 바로 그 순간.
- 애송이 녀석아, 이 이상 접근해 오지 마라.
머릿속을 가득 채울 듯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진동이 함께라 아이젠은 이명이 온 것처럼 귀를 후볐다.
[이런, 나왔다. 그럼 난 이만.]
현무는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아이기스의 빛이 꺼졌다.
“이 자식이. 저 좋을 대로만 나타나네.”
아이젠은 선제적으로 온몸에 암화를 불어넣은 다음, 좌우를 살폈다. 높이 솟은 회벽과 앞에 나 있는 길 어디에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나와서 말하지.”
- 애송이와 말을 섞을 이유는 없다. 나는 친히 경고해 주는 게야. 이 이상 접근해 오지 말라고.
“싫다고 하면?”
아이젠이 한 발짝 더 내디뎠다. 그러자 목소리의 한숨이 들렸다.
- 정 그렇다면.
쉬이이이.
어디선가 뭔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아이젠이 경계하며 좌우를 살피는 그때였다.
“―!”
아이젠은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높이 솟아오른 두 개의 회벽 위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얼핏 세어봐도 수십 개는 되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아이젠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결사신권―’
쾅!!
아이젠이 뭔가 펼치려는 그때 아이젠의 머리통 위로 정확히 바위가 떨어졌다. 그 뒤로도 이어서 바위가 계속 떨어졌다.
쾅! 쾅! 쾅! 쾅! 쾅!!
이 길 자체를 폐쇄하려는 듯한 폭격.
슈우우우―
마침내 바위가 더 이상 떨어지기를 멈췄다. 그러자 깔려 있던 바위 중 맨 밑에 있는 것이 흔들흔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직! 바위가 반으로 쪼개지며 그 뒤에서 등장한 것은 아이젠이었다.
‘무음목랑보.’
아이젠은 무음목랑보를 펼친 뒤 바위 뒤에 몸을 바싹 붙여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옷에 묻은 먼지만 조금 털어냈다.
터벅터벅 걸어 나온 아이젠은 암화의 기감을 펼쳐 적을 추적하려 했다. 근데, 추적할 필요도 없었다.
“너냐?”
아이젠의 코앞, 바위의 잔해 사이에 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적은 마물이었다. 온몸이 뼈만 남아 있는 마물. 게다가 덩치가 몹시 큰 마물이었다.
‘말을 할 줄 아는 걸 보면 상급 마물? 아니면 마혼인가.’
아이젠이 생각할 때, 마물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석장을 바닥에 쿵 내려쳤다. 그리고 왼손으로 아이젠을 가리켰다.
“접근해 오지 말란 명령을 왜 무시했느냐.”
“내가 네 따까리냐? 오지 말란다고 안 가게?”
“그도 그렇군. 가만, 이제 보니 제국 놈이었구나?”
망골대왕은 턱뼈를 매만지며 뭔가 생각하다가, 이내 다시 아이젠을 가리켰다.
“알았다. 슌타리아를 뚫었다는 그놈이로군.”
“그래. 아이젠이라고 한다.”
“통성명인가? 그래, 나는 망골대왕이라고 한다. 이 뒤편에 있는 지역, 콜레몽의 영지장이지.”
“응?”
아이젠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곤 망골대왕에게 한두 걸음 더 다가섰다.
“마물이 영지장이야? 세상 말세다, 말세. 그 나라에서는 영지장이 될 때 최소한의 자격 요건도 없나 보지?”
“자격 요건?”
“인간이어야 한다든지.”
“세상은 강자의 논리로 굴러가는 법. 날 이 자리에 앉힌 자가 강자이니, 그의 말에 따르는 게 옳지 않겠느냐?”
“맞는 말이네.”
혓바닥 굴리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아이젠의 직감대로 망골대왕은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라 마혼인 듯 보였다. 영설산의 화이트오크처럼 말이다.
망골대왕이 허리를 스윽 굽혔다. 그 두개골의 눈 파인 부분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러더니 그는 팔에 쥐고 있던 석장을 쾅 내려쳤다.
“알았다.”
“알아? 뭘.”
“네놈 애송이의 실력 말이다.”
“…그래? 어떤데?”
망골대왕이 씨익 웃었다. 해골뿐인 얼굴로 짓는 미소는 섬뜩하기 짝없었다.
“형편없구나. 공화국에서는 널리고 널린 것이야.”
“그러냐? 그럼 시험해 보시든가.”
아이젠의 주먹에 검보랏빛 불꽃이 피었다. 그는 주먹을 길게 뻗어 망골대왕의 턱뼈를 노렸다.
‘결사신권, 박살!’
그와 동시에 망골대왕도 석장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쿵! 바닥에 내려쳤다. 그러자 석장 뒷부분 끝이 찬란하게 빛나더니 원을 그리며 퍼졌다.
“불명석장(不明錫杖).”
쩌적! 그러자 아이젠의 왼손 주먹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굳은 것은 정확히 아이젠의 주먹뿐, 다른 곳은 움직일 수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허공 한가운데에서 주먹이 그냥 멈춰 있는 것은.
아이젠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주먹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음. 어떻게 푸는 거지?”
“내가 손가락을 튕기면.”
“튕겨, 그럼.”
“그럴 수야 없다.”
망골대왕은 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망골대왕의 집게손가락 끝에서 주황빛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아이젠이 뭔가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어디서 들었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쉬이이이.
어디선가 뭔가가 날아오는 소리. 아이젠은 불과 조금 전에 이 소리를 들었다.
“바위에 깔려 죽어라.”
“아?”
부우우웅!! 또다시 수십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이젠을 향해 날아왔다. 아이젠의 주먹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망골대왕은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런 젠장.”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아이젠은 지금 보는 풍경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높이 솟아오른 두 개의 회벽 아래로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내린다. 이 상황은.
‘조금 전이랑 똑같아.’
바위가 떨어지고 있으니 당연히 전과 똑같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젠이 말하는 건 단순히 상황의 일치가 아니었다.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 개수, 위치, 심지어 각도까지. 모든 것이 조금 전과 똑같았다.
쾅! 쾅! 쾅! 쾅! 쾅!!
마침내 바위가 똑같이 떨어져 내렸다. 아이젠은 이번에는 무음목랑보로 피하지 않았다. 주먹이 멈춰 있어서 무음목랑보를 시전하기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이젠은 알고 있었다.
‘절세지경.’
아이젠이 오른손으로 바위를 밀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를 온몸으로 맞은 아이젠은 절세지경 덕에 작은 상처 하나도 입지 않았다. 절세지경은 곧바로 해제되었지만.
팟 하고 다시 망골대왕이 나타났다. 그는 아직도 주황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집게로 아이젠을 가리켰다.
“오. 살아 있군? 좀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역시 상처 하나 없다니. 놀랍도다.”
“이상한데. 망골대왕, 네 기술은 이상해.”
아이젠은 암화를 일으켰다.
“다시 한번 보여줘야겠어.”
그러자 망골대왕이 어째선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이젠의 왼손도 봉인에서 풀려났다.
아이젠이 암화를 온몸에 두르고 덤벼드는데, 망골대왕이 다시 한번 석장을 쿵! 내려쳤다. 그러자 빠르게 돌진하던 아이젠의 몸이 느릿느릿해졌다. 마치 아이젠의 속도만 급격하게 줄어든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그사이, 망골대왕은 천천히 움직여 아이젠의 이마에 검지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형편없다고.”
따악―! 딱밤을 맞은 아이젠의 고개가 뒤로 크게 꺾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파괴적인 위력에 목이 부러졌을 테지만 아이젠은 아니었다. 아이젠의 몸이 뒤로 넘어지며, 그를 둘러싸고 있던 느릿느릿한 기운도 사라졌다.
아이젠의 눈이 망골대왕이 들고 있는 석장으로 향했다.
“이상한 물건이군. 그것도 아티팩트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오냐.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자만이 들 수 있는 물건, 불명석장이지.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게다, 애송아.”
“이젠 개나 소나 다 들고 다니는구만, 그 아티팩트라는 물건.”
아이젠은 왠지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을 쳐다보았다. 그것 역시 아티팩트. 그러나 단순한 아티팩트는 아니다. 그린우드의 초대 가주, 지안니 폰 그린우드의 물건이다.
“그 불명석장이란 물건을 없애버려 주지.”
아이젠이 다시 암화를 둘렀다. 이번엔 사신강림과 천수관음도 함께였다.
푸화악! 아이젠의 몸에서 검보랏빛 내공이 쏟아져 나왔다.
‘결사신권―’
슈팟! 아이젠이 목롱보를 이용해 망골대왕의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망골대왕이 불명석장을 내려치기 전에, 그의 허리에 주먹을 먹여줬다.
‘박살!’
뻐억! 으지지직!!
뼈 부러지는 소리. 아이젠의 주먹에 금이 갔으나 망골대왕도 마냥 무사하지만은 못했다. 앞으로 쭈욱 밀려난 망골대왕은 허리뼈를 움켜쥐었다.
“아이고, 이놈. 허리를.”
“마물도 요통은 똑같은가 보지?”
망골대왕이 다시 불명석장을 들어 올렸다. 아이젠은 저것이 내려오는 것을 막기는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손을 쫙 펼쳐 넓은 방향으로 휘둘렀다.
‘교아!’
촤악!! 거대한 손바닥이 망골대왕을 긋고, 그는 손 힘이 풀려 불명석장을 떨어뜨려 버렸다. 아이젠이 ‘나교아’로 그것을 낚아채 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망골대왕이 황망한 눈으로 아이젠을 바라봤다.
“이놈아. 그거 돌려줘.”
“싫다면.”
“쭛쯧. 말 듣거라.”
망골대왕이 다시 집게손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주황빛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젠이 기다리던 것이었다. 아이젠은 불명석장을 대충 왼쪽으로 던져 버리고, 이어질 공격을 기다렸다.
쉬이이이.
수십 개의 바위가 날아온다. 조금 전, 그리고 또 그 전과 똑같이!
‘이젠 더 서 있을 데도 없겠어!’
두 개의 회벽이 나란히 서 있는 이 좁은 공간은 이제 저 수십 개의 바위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바닥을 디딘 채 싸워야 하는 아이젠의 손해다.
아이젠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바위들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뽐내며 주먹을 내질렀다.
‘결사신권, 권왕백무!’
뻐버버버버버벅!
콰과과과과과광!
권왕백무는 정확히 두 발씩 하나의 바위에게 적중해, 바위를 중심에서부터 갈라지게 만들어 파괴했다. 한 조각 한 조각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게 작아진 바위가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망골대왕은 그사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불명석장을 집어 들고 아이젠을 보았다. 그의 손에서는 아직도 주황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는 아이젠을 보며 말했다.
“바위로는 네놈을 잡을 수 없겠구나.”
“망골대왕. 네가 가진 힘을 이제 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