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알파의 반지. 소환.”
번쩍!! 아킬레스가 말하자 알파의 반지가 붉은빛을 발산했다.
한순간 아킬레스에게서 네모난 붉은 선이 뻗어 나오더니 50평 정도의 공간을 그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흐릿하게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공화국군들이었다. 이미 무기를 소지한 채 들고 있던 공화국 병졸들이 별안간 아킬레스의 주변에서 나타났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삼백.
“고, 공화국군?!”
“말도 안 돼!”
경비 서던 제국 병사들로는 감당하기 힘든 숫자였다. 어이가 없었다. 세 남자가 갑자기 등장한 것도말이 안 되는데, 갑자기 삼백이 넘는 공화국군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소환술사다!”
“어서 경계나팔을 불어!”
뿌우우― 제국 병사 한 명이 경계나팔을 불었다. 그사이 공화국군의 습격이 시작됐다. 제국 병사들이 당황해 도망치다 하나둘씩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반지 삼대위는 흐뭇한지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잠시 바람 쐴 겸 막사에서 나오던 아이젠은.
“응?”
저기 뒤편에서 경계를 서는 제국 병사들 사이로, 웬 세 남자가 뜬금없이 등장한 것을 보았다. 아이젠은 그들을 보자마자 적군이라고 확신했다.
‘무혈신공.’
그는 곧바로 무혈신공을 운공해 온몸에 암화를 불어넣었다. 아이젠의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팽창했다.
딱 그때 맞춰 막사에서 마테오 백작이 나왔다.
“아이젠 소가주… 지휘대장님?”
마테오 백작은 그렇게만 말하고 더 잇지 않았다. 아이젠이 전투태세에 임한 것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파악하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전방 병력을 요청하겠습니다.”
파직! 마테오 백작이 사라졌다.
파앙! 아이젠도 발을 내달렸다. 그가 제국 병사들 사이에 도착했을 땐 이미 별안간 나타난 공화국군들이 공세를 잇는 중이었다.
‘권왕백무!’
퍼버버버버벅!
아이젠의 주먹이 달려드는 공화국 병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날려 버렸다. 그들은 목소리도 못 내고 나가떨어져 기절했다.
모르겐슈테른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공화국군들이 잠시 공격을 멈췄다.
아이젠은 주먹에 품은 암화를 거두지 않은 채로 물었다.
“확인차 묻는 거다만. 공화국이냐?”
“그렇다. 나는 공화국 콜레몽을 지키는 대위 모르겐슈테른이다.”
아이젠의 예상대로 기습이 맞았다. 설마하니 뒤에서 갑자기, 아무도 없는 데서 등장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 많은 군인들과 함께.”
“이쪽에서 먼저 이름을 밝혔다. 네 이름도 말해라.”
이건 또 뭔 미친놈이야. 생각하면서도 아이젠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대답했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슌타리아 후방전선 지휘대장이다.”
“슌타리아를 점거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벌써 후방 지휘대장까지 선출하다니. 빠르군. 한데 지휘대장치고는 나이가 좀 어려 보이는데.”
“맞아. 열일곱 살이거든.”
꿈틀. 모르겐슈테른의 눈밑이 살짝 흔들렸다.
“이래서 제국 사회 놈들은……. 겨우 열일곱 소년에게 귀족이라는 이유로 지휘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기다니.”
“나이 어리다고 얕보면 큰코다치던데.”
“누가 그런 말을 하지?”
“내가. 나 무시하다가 코뼈 부러진 놈들 여럿 있었거든.”
“큭큭큭.”
모르겐슈테른의 오른손에 있던 반지가 보랏빛으로 빛났다. 그에 반응한 아이젠은 암화를 좀 더 견고하게 벼려냈다.
아이젠은 모르겐슈테른뿐만 아니라 간부로 보이는 다른 두 남자도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에서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레고리.”
“그레고리를 알고 있나?”
“…그러는 너희는 어떻게 알지?”
불과 한 달 전, 간츠펠트를 모시던 그레고리란 녀석이 있었다. 그는 차단의 반지라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아이젠을 까다롭게 했었다.
모르겐슈테른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리 동료였다. 원래는 공화국군이었으나 간츠펠트라는 소령을 따라 탈영했지. 요아힘, 헤르만, 발터와 함께 제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까진 들었는데… 아. 이런 말을 해봤자 넌 못 알아듣겠군. 아니면 아는 사이인가? 안다면 그놈은 지금 어딨지?”
그레고리도 원래는 공화국군이었다라.
아이젠은 묵혀둔 궁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레유리에는 간츠펠트를 가리켜 소령이라 했다. 그들 전체가 공화국군이었던 모양이다.
‘공화국에서 탈영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젠이 모르겐슈테른의 질문을 무시하고 곧바로 사신강림을 시전하려는, 그때였다.
“―! 다들 물러서라!”
모르겐슈테른의 외침에 공화국군들이 일제히 뒤로 뛰었다. 거의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파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일대에 벼락이 튀었다.
아이젠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았다. 다만 갑작스러운 번개에 눈을 한쪽만 뜨고 무슨 일인가 판단했다.
마테오 백작이 거기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테오발트, 불라트, 오마르, 레오 베네딕토 황제까지. 다섯 영웅이 모두 한곳에 등장했다.
마테오 백작이 아이젠을 돌아보았다.
“급한 대로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급한 대로라고요?”
그런 것치곤 제국 영웅들을 모두 데려온 것 아닌가. 심지어 황제까지 데려오다니?
아이젠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연히 온몸에 있던 암화를 거둬들였다.
모르겐슈테른을 위시한 공화국군들이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을 때.
레오 황제가 아이젠을 돌아보고 미소 지었다.
“전쟁은 잠시 우리에게 맡기게. 혈기왕성한 젊은이야.”
척! 다섯 영웅이 각자의 무기를 주먹에 품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르겐슈테른 등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전군! 진격!”
“와아아아!”
제국과 공화국이 맞붙었다.
* * *
아이젠은 전투에서 빠지기로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레오 황제가 빠져 있으라고 권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르겐슈테른 대위는 콜레몽을 지킨다고 자기를 소개했어.’
그 말인즉슨 모르겐슈테른은 콜레몽에서 이곳 슌타리아로 왔다는 뜻이 된다.
어떻게? 이곳은 후방인데 말이다. 다른 길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그 많은 병사가 한 번에 슌타리아로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젠은 뒤를 돌아보았다.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러다가 전선에서 떨어져 나온 공화국 병졸 한 명을 아이젠이 붙들었다.
“앗?!”
“너희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제, 제국의 쓰레기에게 말할 것 같냐? 퉷!”
병졸이 침을 뱉었으나 아이젠이 가볍게 피했다. 아이젠은 암화를 두른 주먹으로 병졸의 얼굴을 몇 차례 찜질해 줬다. 그러자 병졸이 아주 고분고분해졌다.
“어디서 나타났지?”
“아, 아킬레스 대위님의 아티팩트입니다. 주변 좌표계를 지정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럼 그 아킬레스라는 놈은 어디서 왔는데?”
“그게…….”
퍽! 퍽! 퍽!
“으어억, 저, 저기 땅굴입니다. 으흐흑.”
땅굴이라. 아이젠은 병졸의 목을 조심스레 졸랐다. 병졸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 이상하게 땅이 파여 있었다. 아이젠은 그리로 다가갔다.
병졸의 가리킴대로 그곳엔 땅굴이 있었다. 땅굴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은 아이젠은 그곳이 매우 어둡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랑곳없이 몸을 던졌다. 병졸과 함께.
“히이익!”
우당탕!
눈을 감고,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몇 초. 눈을 다시 뜬 아이젠은 흐릿하게 보이는 지하 땅굴을 따라 걸었다. 왼손에는 여전히 병졸을 붙들고 있었다. 병졸은 거의 끌려오다시피 하고 있었다.
“슌타리아에 이런 길이 있다는 사실은 들은 기억 없다. 무슨 땅굴이지?”
“그, 그건…….”
“또 맞을래? 패는 쪽도 피곤해.”
“큭, 그것만은 절대 말 못 해!”
병졸이 거칠게 저항하자 아이젠은 이번에도 그의 얼굴을 좀 만져주었다. 그러자 병졸은 힘이 풀렸지만 입을 열 기색은 없어 보였다.
“질문을 바꾸지. 이 땅굴은 콜레몽과 연결되어 있나?”
“큭, 그, 그렇습니다.”
“이름이 뭐지?”
“윽, 위스퍼.”
“위스퍼. 지금부터 얌전히 따라오지 않으면 주먹을 쓸 거다. 약속했다?”
“그게 무슨 약속―”
퍼억! 배를 맞은 위스퍼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땅굴은 길지 않았다. 어느새 출구에 다다른 아이젠은 또 다른 길과 마주해야 했다.
그건 땅굴처럼 얼기설기로 판 비포장길이 아니었다. 하나의 거대한, 오늘날의 ‘터널’ 같은 것이었다. 높이만 20m는 될 듯한 높다란 터널 입구에 아이젠이 감탄했다.
“이게 대체 무슨…….”
슌타리아성을 점거한 뒤, 이스보셋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사들에게 이곳 근방에 숨겨진 길이 없나 수색하라 지시한 것이었다.
심지어 슌타리아는 최격전지로, 일전에도 제국에 몇 번 점령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때에도 이런 거대한 터널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온 적이 없다. 아이젠도 이미 슌타리아 관련 자료를 전부 읽어봤기에 아는 사실이었다.
‘근데 어떻게 이런 거대한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거지?’
고요한 터널 안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때, 눈치를 보던 위스퍼가 아이젠의 손을 뿌리치고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터널 반대편은 싸라기눈이 깔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얌전히 따라오라니까.”
환교신권!
퍼억!
아이젠의 환교신권이 위스퍼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때렸다. 위스퍼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고.
“들어가 보면 알겠지.”
어째서 이런 거대한 길이 있는 것인지. 직접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아이젠은 터널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저벅저벅― 터널 안을 걷는 동안 아이젠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어두운 길이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터널 안이 세세하게 들여다보이는 아이젠이었다.
아이젠은 걷다가 멈춰 서서 터널 내벽을 만져봤다. 벽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흙의 질감은 메말랐다.
‘만들어진 지 오래됐어. 그런데 아무도 발견 못 했다고?’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아이젠은 궁금증을 지우고 다시 걸었다. 터널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멀리 불빛이 없는 걸 보면 중간에서 꺾이는 지점이 있거나, 아니면 터널이 너무 길어서 아직 불빛이 보이지 않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벅저벅―
그렇게 아이젠이 계속해서 나아가는 그때였다.
키이이잉!
별안간 아이기스가 시퍼런 빛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아이젠은 그린 오러를 흘려 넣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당장 멈춰, 아이젠 폰 그린우드.]
“현무?”
현무였다. 말 걸 땐 대답도 안 하더니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야, 너 내 말 다 씹을 땐 언제고. 이제 깨어났냐?”
[이 이상 가면 위험해. 널 위해서 경고하는 거다.]
“네 입에서 날 위한다는 소리가 다 나오다니. 뭐가 있는데?”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거 하나는 있지. 위험한 거.]
그 말에 아이젠은 빙긋 웃어 보였다.
“아, 그래? 괜찮아. 나 그런 거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