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한편 암흑경 바깥에서는.
고요―
공화국 병졸들이 베우제츠를 둘러싸고 가만히 있었다. 스탕달도 그 가운데 같이 있었다.
아이젠은 베우제츠의 앞에 서 있었다. 아이젠에게서 무언가 영혼 같은 것이 뽑혀 나와 암흑경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보았다.
베우제츠와 아이젠 두 사람 모두 조금 전부터 멈춰 있었다. 암흑경을 사용하는 시전자와 대상자에게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둘 다 암흑경 안에 들어가 있어서, 말하자면 정신이 없는 빈껍데기 상태이기에 멈춰 있는 것이다.
“흐음.”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시간이 너무 흘렀다. 벌써 10분은 이 상태였으니. 스탕달은 아이젠에게 시선을 한번 던졌다가, 이내 베우제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베우제츠 중위. 자네 괜찮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우제츠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였다. 깜빡이지조차 않았다면 시체로 착각했을 것이다.
“어떡할까요? 죽일까요?”
병졸 하나가 멀뚱멀뚱 서 있는 아이젠의 몸을 보며 말했다. 그는 날카로운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스탕달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니. 내가 하지.”
덥석! 병졸에게서 창을 뺏어 든 스탕달은 그 끝을 아이젠의 목덜미에 겨누었다.
‘죽여도 되는 거겠지?’
그러면 안 된다는 얘기는 베우제츠에게 들은 바 없다. 즉 이대로 죽여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흥, 별놈도 아니었군. 죽여주마. 응? 가만, 근데 이 녀석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스탕달은 창을 찌르려다 말고 아이젠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뭔가 익숙하다. 어디서 봤더라?
“!!”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적국의 전범 테오발트와 똑 닮지 않았는가!
검은 머리칼 하며 눈동자, 골격까지. 아이젠의 모습은 테오발트의 젊은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판박이였다.
‘설마… 그 테오발트의 아들이었나?’
꿀꺽. 스탕달은 긴장감에 침을 삼켰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테오발트의 아들이라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아이젠의 시체를 가져가면 스탕달의 진급은 그야말로 떼놓은 당상이었다.
“크흐흐. 이건 뭐, 하늘이 내려주신 은덕인가?!”
그렇게 결심을 굳힌 스탕달이 아이젠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푸욱!
아이젠의 목에 창날이 맞닿았다. 그리고 아주 살짝, 그 살갗이 베이는 그 순간이었다.
츠팟!
아이젠이 눈을 번쩍 뜨더니 스탕달의 창대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러자 스탕달은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이, 이놈……?!”
갑자기 깨어나다니?
아이젠은 싱그러운 미소로 웃어 보였다.
“기습? 좋지.”
뻐억!!
“??!!!”
아이젠의 주먹이 스탕달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스탕달은 입에서 피를 왈칵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떨그렁! 창이 떨어졌고, 아이젠은 목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흠. 생각보다는 좀 일찍 깨어났네. 더 있고 싶었는데.”
“으큭, 뭐라고?!”
바로 그때, 아이젠의 맞은편에 서 있던 베우제츠가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
“크흐악!!”
푸확― 쏟아지는 핏물은 몇몇 병졸들에게까지 튈 정도였다. 베우제츠는 비틀거리다 주변에 있던 병졸 하나를 붙들고 섰다.
“크헉! 크헉!”
“이봐, 베우제츠 중위!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스탕달의 목소리가 들리자 베우제츠는 기댈 대상을 옮겼다. 스탕달 가까이 다가가 양팔을 얹은 베우제츠는 낮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도, 도망치십시오…….”
“뭐?”
“저 녀석은 사신… 사신입니다아악!!”
쨍그랑! 베우제츠의 왼손에 들려 있던 암흑경에 금이 갔다. 거울 부분이 깨져 바닥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베우제츠도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스탕달이 맥을 짚어보니 죽지는 않았다. 쇼크로 기절한 듯 보였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놈!”
스탕달이 호통을 쳤으나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아이젠이었다.
아이젠은 뻐근한지 스트레칭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별일 없었어. 그 안에서 베우제츠라는 놈과 오랜 시간 함께 수련했지.”
“수련?”
“그래. 달력이 없지만 체감으론 대충 여섯 달 정도? 놈에게 자는 시간도 없이 주먹을 퍼부어줬다.”
“……!”
그러니까 지금 말은, 6개월 내내 주먹질로 싸웠다고?
스탕달은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베우제츠가 깨어나길 기다린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다. 어떻게 그사이 6개월이나 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예전에 베우제츠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암흑경 안에서는 시간이 아주아주 느리게 흐르고, 바깥에서는 찰나처럼 느껴진다던.
“확인해 보니 시간이 영원히 흐르지 않는 건 아니었네. 아까워. 두어 달 더 있고 싶었는데.”
“이, 이런 미친놈. 네놈이 그런 짓을 해서 얻는 게 대체 뭐가 있다고!”
“뭐가 있기는.”
후욱!
아이젠의 몸에서 촛불이 꺼졌다. 암화의 기운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아이젠의 몸 바깥으로 퍼져 나왔다.
마치 거대한 파장이 물결처럼 퍼져 나가듯, 아이젠의 암화가 주변 지대를 에워쌌다.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스탕달과 공화국 병졸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되었다.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내가 저 거울닦이와의 대결에서 얻어 나온 것은 무혈신공 7성, ‘화경’의 경지.”
“뭐가 몇 성이라고?”
“화경에 오른 나는…….”
팟! 아이젠이 사라졌다. 스탕달은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전쟁에서 구르고 구른 장교의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반발!’
스탕달이 몸밖으로 반발의 힘을 쏟아냈다. 스탕달의 오러에 닿는 모든 것은 다가오는 방향 반대쪽으로 튕겨난다.
만약 아이젠이 자신을 공격해 오고 있다면 이 반발의 힘에 튕겨 나갈 것이다.
퍽!
그러나.
‘어?’
스탕달은 어째서인지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육중한 몸이 기우뚱 넘어가며, 마침내 베우제츠의 옆에 나란히 털썩 쓰러졌다.
스탕달의 목덜미에는 주먹으로 찌른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6성일 때보다 몇 배는 강하다.”
터벅터벅. 아이젠은 사이좋게 누워 있는 스탕달과 베우제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맙다. 이렇게 빨리 7성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너희 덕이야.”
아이젠이 불라트 후작에게 베우제츠의 암흑경에 대해 들었을 때, 그가 슌타리아 길목에 혼자 침투하겠다고 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아이젠은 스스로 암흑경에 몸을 던져 7성에 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목표한 바를 이뤄냈다.
거울 안에서 보낸 시간은 여섯 달이었지만 현실 시간으로는 단 10분 만에 7성에 오른 아이젠. 그는 전과는 다른 폭발적인 내기를 품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은 무리해선 곤란하다. 아이젠은 몸을 일으켜 세워 공화국 병졸들을 둘러보았다. 숫자가 적지 않다.
아이젠은 그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테지?”
“고, 공격! 제국 놈을 죽여라!”
“죽여라!!”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아이젠이 그들 모두를 주검으로 만들어버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불라트와 테오발트는 선봉장이 되어 병력의 쐐기에 말을 타고 서 있었다. 그들의 뒤로 많은 제국 병사들이 말에 타 있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슌타리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철문. 이 문 뒤에는 공화국 병졸들이 수도 없이 많다. 베우제츠와 스탕달도 이 뒤에 있다.
그들을 떨쳐내고 아이젠이 돌파해 온다면 이 문이 열릴 것이다. 실패한다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즉 아이젠의 죽음을 의미한다.
“흠. 흠흠.”
불라트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아이젠을 그리로 보낸 것은 불라트다. 테오발트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테오발트는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 뒤를 한없이 노려보고만 있었다.
“아니, 테오발트 공작께서는 걱정도 안 되십니까?”
“걱정이라니?”
“아드님… 아니, 소가주님께서 적지로 혼자 가셨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변변찮은 놈들도 아니고 스탕달과 베우제츠입니다. 저희가 이곳을 뚫지 못해 헤맸던 걸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사실이 그랬다. 물론 단신으로 붙는다면 스탕달과 베우제츠 정도는 테오발트의 참철검술 한 번이면 썰려 나갈 것이다.
다만 이곳 길목은 경사가 져 있고, 스탕달의 반발은 모든 걸 튕겨내며, 베우제츠의 암흑경은 모든 것을 앞서 본다.
전술적 위치가 몹시 나쁘다. 테오발트와 불라트가 뚫지 못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라트가 중얼거렸다.
“문이라도 열어젖혀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적어도 우리 쪽에서 기습은 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 뒤의 승산은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자네 괜한 걱정을 하는군.”
“예? 그게 무슨.”
테오발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그러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아이젠 그 아이는, 열여섯이 된 이후론 단 한 번도 내게 실망감을 안겨준 적이 없다네.”
그렇다. 단 한 번도.
어느 날 갑자기 제 형 한스를 두들겨 팼을 때부터, 게오르크를 결딴내어 소가주에 오를 때까지.
아이젠은 단 한 번도 테오발트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것이 테오발트에겐 자랑거리였다. 외부인에게 아들 자랑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은 별로 없는 테오발트였지만 말이다.
“실망감을 안겨준 적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재밌는 얘기 있으면 같이 좀 들읍시다.”
“별일 아니니 자네가 더 신경 쓸 건 없을 듯하군.”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희 그래도 나름 25년 전의 전우 아닙니까? 서운하려 그럽니다.”
“하하. 거 자네 참.”
테오발트와 불라트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자 제국 병사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잠자코 기다려야 한다. 이 철문이 열리기까지.
그 순간이었다.
덜컹!
철문이 덜컹 흔들렸다. 무슨 소리일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그때 다시 한번 철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 뒤의 철 빗장이 열리는 소리였다.
끼릭! 드드드드.
이윽고 철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테오발트와 불라트는 표정을 굳히고 이 너머에 있을 적들을 살피고자 했다.
“다들 전투 준비!”
척―!
테오발트의 외침에 제국 병사들도 전열을 가다듬었다. 바짝 긴장된 가운데, 마침내 철문이 완전히 열어젖혔다.
그리고.
끼이이익!
문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단신으로 고고히 서 있는 아이젠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손에 든 빗장을 근처에 내동댕이쳤다.
“와아아아……??”
제국 병사들의 환호성이 의문과 함께 서서히 잦아 들어갔다.
불라트는 어벙한 얼굴로 말을 탔다. 터벅터벅 걷는 그의 말도 어딘가 허탈한 듯한 느낌이었다. 뒤편에 서 있던 제국군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아이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불라트가 물었다. 그때 테오발트는 이미 피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젠의 주변으로, 쓰러진 공화국군들이 무수히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젠의 몸 곳곳에 튀어 있는 핏자국 또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게 했다.
아이젠이 천연덕스레 말했다.
“어떻게 됐냐면… 제가 다 끝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