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슌타리아 점거 】
아이젠이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스탕달이 별난 놈을 보는 얼굴로 물어왔다.
“넌 누구지?”
“소개가 늦었네. 아이젠. 제국군이다.”
“―!”
술렁술렁― 뒤편 막사 안에 있던 병졸들도 바깥으로 나와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숫자가 얼핏 헤아려도 일이백은 되었다.
아이젠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 한 번에 할까? 아니면 순서대로?”
아이젠이 대답을 기다리는데, 스탕달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이젠 앞에 다가와 섰다.
“나는 공화국의 스탕달 대위다. 제국 놈이… 여길 어떻게.”
“글쎄.”
아이젠은 스탕달의 모습을 살폈다. 바로 그때, 경계 근무를 서던 여덟 명의 병졸 중 일부가 웬 거울 하나를 들고 옆에 있던 마른 남자에게 갖다 바치는 것이 보였다.
‘이놈이 스탕달이라면, 저놈이 베우제츠.’
그리고 베우제츠는 암흑경이라는 아티팩트를 다룬다. 암흑경을 건네받은 베우제츠는 아이젠을 향해 그 거울면을 비췄다.
그사이 병졸들 사이에서는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 가만있어 봐. 힌 놈이잖아?
- 그러게. 다른 제국군은?
- 없는데?
- 그럼 혼자서 여길 왔다는 건가? 무슨 정신이야.
- 크크큭. 멍청한 제국 놈! 기습하려다가 실패한 거야!
스탕달과 베우제츠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한껏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베우제츠는 암흑경의 거울면을 계속 아이젠에게 비추면서 말했다.
“스탕달 대위님. 여긴 제게 맡기시지요.”
“그래, 자네가 처리해. 고작 한 놈뿐이니까.”
“큭큭. 거울 세계 속으로 저자를 가둬버리겠습니다. 다들 나서지 마라!”
“예!”
베우제츠의 암흑경이 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암적색이었다. 아이젠은 주저하지 않고 내공을 온몸에 흘려 넣었다.
“결사신권, 일수일도.”
콰아아! 뒤이어 암화를 시전했다. 아이젠은 청풍범람을 두른 몸으로 가볍게 뛰어, 베우제츠의 암흑경에 주먹을 던졌다.
카앙!
그러나 암흑경은 깨지지 않았다. 암화를 두른 주먹으로도 암흑경에는 흠결도 나지 않았다. 베우제츠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건 아티팩트다! 그런 가벼운 주먹이 통할 성싶나?”
씨익. 아이젠이 미소 지었다.
“알아. 시험해 본 거야.”
“어디서 나타난 건진 모르겠다만, 암흑경의 감시 범위를 벗어나 오다니 대단하구나.”
“뭘. 산 타고 왔어. 별로 어렵진 않던데.”
“큭큭. 그러냐? 홑몸으로 온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그 순간, 아이젠의 몸이 암흑경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휘오오오오!!!
소용돌이치며 암흑경의 거울 안으로 들어가 버린 아이젠은, 한순간 흔적도 남기지 않고 형체를 감췄다.
아이젠은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 *
아이젠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몹시 어둡고 광활한 대지 위에 서 있었다.
마치 도철이 지배하는 심상 세계와 비슷했지만, 차이가 있다면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디.”
아이젠이 고개를 들자 하늘에 무수히 많은 암흑경이 펼쳐져 있었다. 숫자를 세는 게 무의미했다. 하늘 전체가 거울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 하나하나에 아이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큭큭. 아이젠이라고 했나?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오다니. 그 용기는 가상하구나.
암흑경 어딘가에서 베우제츠의 음성이 들렸다.
그건 특이한 경험이었다. 목소리가 이 거울에서 저 거울로, 저 거울에서 다시 이 거울로 옮겨가며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 베우제츠 중위, 맞지? 암흑경이라는 아티팩트를 쓰는.”
- 호오. 그래. 날 아는군?
“너 유명해. 옥사비나에서는 말이지.”
- 큭큭. 이거 낯부끄러운걸.
아이젠은 자세를 잡고 온몸에 암화를 불어넣었다. 암흑경 속이라곤 해도 내공 운공조차 되지 않는 것은 아닌 듯했다.
베우제츠는 아이젠의 그 모습이 웃기는지 깔깔 웃어댔다.
- 큭큭큭! 뭐 하는 거냐? 오러라도 운용할 셈인가 보지?
“응. 그럴 생각인데.”
- 내가 유명하다더니 내 암흑경에 대해선 못 들었나 보군. 이곳은 완전한 나의 공간! 한 번 들어온 이상 네놈은 내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아이젠이 빙긋 웃었다. 그는 마침내 암화의 운공을 마쳤다. 몸 곳곳에 무혈신공이 자리해 아이젠의 몸이 자못 단단해졌다.
“알아. 이미 들었거든.”
- …….
아이젠이 너무 태연하게 나오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베우제츠 쪽이었다.
베우제츠는 하늘 위의 암흑경을 이리저리 쏘다니며 아이젠의 모습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나이는 어린 듯한데 단련된 몸이 심상치 않았다.
‘뭐지, 이 녀석? 어떻게 저렇게 고강한 몸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내가 지배하는 공간. 제아무리 강자라 해도 내게는 손쓸 수 없다!’
판단을 마친 베우제츠는 지체할 것 없이 아이젠의 숨통을 끊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사라락― 허공에서 암적색 연기가 피어나더니 베우제츠의 손에 단도가 쥐였다.
팟! 베우제츠가 펄쩍 뛰자, 하늘에 떠 있는 수백 개의 암흑경에서 일제히 베우제츠의 환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두는 환상이 아니라 실체였다. 암흑경을 지배하는 시전자는 공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빠르게 죽어라! 제국 놈!”
아이젠은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베우제츠‘들’을 보았다. 하나하나가 속도가 화살 이상으로 빨랐다. 아이젠은 주먹에 암화를 품었다.
‘권왕백무.’
퍼버버버버벅!!
아이젠의 주먹에 맞은 베우제츠가 모조리 날아갔다. 몇몇 개체는 실체화가 풀려 암적색 연기로 화하기도 했다.
“크억!”
베우제츠 본체는 벌떡 상반신만 일으켜 코에 묻은 피를 닦았다.
“으, 윽! 뭐야! 어떻게!”
“잘.”
아이젠은 아직 암화를 해제하지 않았다. 그는 숨을 크게 내뱉고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사신강림.”
콰아아아아!!!
아이젠의 몸 밖으로 암화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꿀꺽 침을 삼킨 베우제츠는 혹시 자신이 상대를 잘못 건드린 건가 싶었다.
‘하, 하지만! 여전히 내가 더 유리해! 조금 전에는 방심했을 뿐이다!’
베우제츠도 자신의 오러를 운용했다. 그의 몸 안에 오러가 넘실거리며 차오르는 것을 느낀 아이젠이 감탄의 박수를 쳤다.
“이야. 네 수준도 제법인데?”
“흥, 이제라도 알았다면 무릎을 꿇고 빌어라!”
“그럴 생각은 없고. 어서 와.”
아이젠이 손을 까딱까딱하자, 베우제츠가 발작하듯 아이젠에게 달려들었다. 베우제츠의 손에는 이제 단도뿐만이 아니라 창과 칼이 들려 있었다.
전부 이 공간 밖에서는 아티팩트라 불리는 것 이상의 위력을 낼 무기들이었다.
“죽어버려!!”
“―!”
아이젠도 그 두 무기에 담긴 위력을 알아채고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아이젠이 양팔을 교차해 올리는 그 위로 베우제츠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카앙! 까앙!
아이젠의 팔은 잘리지 않았다. 아이젠이 절세지경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부러져 나간 것은 오히려 베우제츠의 창칼이었다.
후두둑― 삽시간에 날붙이를 잃은 두 무기를 베우제츠는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 이 새끼! 어떻게 아티팩트급의 무기를!”
“내 몸이 아티팩트보다 단단한 모양이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절세지경은 펑펑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상시로 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시전할 수 있는 비기였다.
그게 무엇이든, 설령 운석이 떨어진들 절세지경은 막아낼 수 있었지만 시전 시간이 짧다.
“가볼까.”
아이젠은 이제 방어보다 공격에 치중하기로 했다.
팟! 사라졌던 아이젠의 신형이 베우제츠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박살!’
“끄응?!”
베우제츠는 재빨리 등 뒤에 삼각방패를 소환했다. 마찬가지로 아티팩트급의 방패였다.
떠엉!! 아이젠의 주먹이 방패를 때리고, 방패가 움푹 패며 베우제츠가 반동으로 밀려났다.
다행히 크게 밀려나진 않고 베우제츠 역시 안전했다. 다만 방패는 더 못 쓰게 되었다.
베우제츠가 방패를 집어 던질 때, 아이젠은 이미 베우제츠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철권!’
“으윽!”
떠엉!! 이번에도 아이젠이 때린 것은 방패였다. 베우제츠는 원형방패를 소환해 막아냈으나, 방패가 뒤로 밀리며 베우제츠의 코를 때렸다.
후두둑! 베우제츠가 비틀하더니 코피를 쏟았다.
“이, 이런 씨발!”
‘박살.’
뻐억!! 아이젠의 주먹이 베우제츠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베우제츠는 또다시 작은 원형방패를 소환해 아이젠의 주먹을 막았다.
‘연타!’
“윽?!”
떠엉! 떠엉! 떠엉! 퍼엉! 뻐억! 떠엉!
아이젠의 주먹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베우제츠는 그때그때 방패를 소환해 막았지만 모두 주먹 두세 방이면 일그러져 쓸 수 없게 되었다.
베우제츠는 이 공간 안에서는 어떤 물건이든 만들어낼 수 있고 그 수는 무한하다.
그러나 공격이 이 정도로 쏟아진다면 제아무리 그라도 겁을 집어먹게 마련이다.
‘미, 미친! 이 새끼는 대체 뭐야?!’
보통 공간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하면 상대는 두려워하는 게 일반적이다. 근데 이놈은 오히려 좋다는 듯한 기색으로 덤벼오고 있잖은가!
물론 베우제츠는 아직 전력을 다한 게 아닌지라 좀 더 본격적으로 나서면 아이젠을 이길 수도 있었다.
그게 문제다. 이길 ‘수도’ 있다니? 이 공간에서만큼은 자신이 이기는 게 ‘당연한’ 일인데!
‘끄으으으!! 어떻게! 여긴 나의 공간인데!’
“여긴 네 공간이니까 네가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나?”
“?!”
생각을 읽힌 베우제츠가 흠칫 아이젠을 올려다봤다. 아이젠은 주먹을 계속 휘두르며 말했다.
“간단한 얘기야. 네 상상력 안에서도 난 너보다 뛰어난 거다.”
“그게 무슨―!”
“계속해 볼까?”
떠엉! 떠엉! 떠엉! 떠엉!
아이젠의 주먹이 점점 더 거세지고 빨라졌다. 더는 못 버티겠던 베우제츠는 갑옷을 생성해 아이젠의 주먹을 잠시간 막아냈다.
‘이 개새끼!’
그리고 커다란 충차(衝車)를 생성해 그 끝을 아이젠에게 겨눴다. 충차의 창살이 아이젠을 퍽! 쳐버렸고, 아이젠은 반동을 못 이겨 멀리 날아갔다.
베우제츠가 긴 숨을 토해냈다.
“크하악! 이 새끼, 넌 나한테 안 돼! 뛰어나긴 무슨!”
“흠, 그래?”
아이젠은 날아가며 턱에 손을 받쳤다. 아이젠의 판단대로라면 베우제츠는 이 정도 수준이어선 안 된다.
치이익! 발을 끌며 멈춰 선 아이젠이 다시 베우제츠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충차로도 아이젠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절세지경이 아니다. 아이젠은 그저 암화를 둘러 막아냈을 뿐이다.
경계하는 베우제츠에게 아이젠이 손짓했다.
“지금까지보단 더 강하길 바란다. 내가 일부러 이 안에 잡혀 들어온 이유가 그 때문이니까.”
“뭐, 뭐라고? 일부러 잡혀 들어와?”
꿀꺽. 베우제츠가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자신이 암흑경을 가리킬 때도 피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암흑경에 대해 무지하다고 해도, 전장에서 적이 물건으로 뭔가 수를 쓰려 한다면 회피부터 하는 게 정상이지 않나?
아이젠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난 네놈을 이용해 이곳에서 한 단계 더 오를 예정이거든.”
“한 단계 더?”
“그래. 구체적으로는.”
아이젠이 다시 암화를 품었다. 검보랏빛 내공의 색이 어쩐지 전보다 더 진해진 느낌이었다.
“7성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