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아이젠은 말에 올라탔다. 소가주전을 처음 시작했던 때 이후로 오랜만에 타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제법 능숙하게 말을 다루는 아이젠이다.
“워워.”
“말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십니다. 큼.”
“별말씀을.”
옆에서 마상에 있던 이스보셋 장로의 칭찬에 아이젠은 손사래를 쳤다.
“정말입니다. 타고 있으신 말은 명마이긴 하지만 사납기로 소문난 녀석인데.”
“저한테 겁이라도 먹었나 보죠.”
“큼. 크하하.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젠의 갈 길에 마중나와 있는 것은 사울 장로뿐이었다. 다른 식솔들에게는 모두 나오지 말라고 아이젠이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건 아이젠이 이런 식의 접대에 익숙지 않은 탓이 제일 컸다. 사내대장부가 전쟁터에 나간다는데 우르르 몰려나오는 건 왠지 호들갑을 떠는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예.”
아이젠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러자 말이 털레털레 걷기 시작했다. 이스보셋 장로도 아이젠을 따라 말머리를 놀렸다.
그때 아이젠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사울 장로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울 장로.”
“예?”
사울 장로가 머리를 들어 보이자, 아이젠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그에게 지시했다.
“이곳을, 잘 책임져 주세요.”
그러자 사울 장로가 피식 웃었다.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유념하지 마십시오. 소가주님.”
* * *
아이젠과 이스보셋 장로의 말이 나란히 걸었다. 느릿느릿 걷는지라 이 상태로 최전선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다고 아이젠은 생각했다.
그때, 이스보셋 장로의 말이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완전히 멈춰 섰다.
“자, 이쯤 됐으니 잠시 서시지요, 소가주님.”
“네?”
불쑥. 이스보셋 장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투명한 구슬 같은 것이었다. 이스보셋 장로는 금과옥조를 다루듯 구슬을 한 손에 폭 담았다.
“그건?”
“알아보시는군요.”
“아뇨. 몰라서 물어본 건데.”
“큼. 최신형 마법무구인 ‘빛의 새’입니다.”
아이젠은 흥미가 붙어 말머리를 돌렸다.
“효과는요?”
“저희를 최전선 옥사비나까지 인도하겠지요.”
“…그럼 저희가 굳이 말을 타고 있는 이유는요? 걸어가기 어려우니까 탄 거 아니었나?”
“큼. 사소한 거 하나하나 신경 쓰실 때가 아닙니다, 소가주님.”
아이젠이 뭐라 몇 마디 더 딴지를 걸려는데, 이스보셋 장로가 빛의 새를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러자 구슬이 찬란히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새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매우 커졌다. 아이젠과 이스보셋과 두 마리의 말을 모두 태우고도 남을 만큼.
“와우.”
“타시지요.”
빛의 새가 삐익 소리를 내며 아이젠의 옆에 내려앉았다. 아이젠은 말에 탄 채로 조심스레 빛의 새의 날개 위에 올랐다. 이스보셋 장로도 그 뒤를 따랐다.
마침내 모두가 빛의 새 등 위에 탑승하자.
쉬이이익!!!
빛의 새가 날았다. 음속을 돌파하는 매서운 속도로. 아이젠이 말과 함께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그는 관성에 의해 금세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랬으면 지금쯤 저기 어디 처박혀 있겠지.’
아이젠은 밑으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사람들이 밥을 짓고, 주먹다짐을 하며 싸우고, 옥편을 든 채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제국 시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저 모든 모습이, 머지않아 하룻밤이면 사라질 수도 있다.
“빨리 가야겠네요. 이미 빠르지만.”
“예.”
아이젠의 진중한 표정을 보며 이스보셋 장로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몇 년 만에 뵌 건데, 이것참.’
아이젠 소가주, 아니, 아이젠 집쥐공자. 그가 달라졌다는 소식은 이스보셋이 옥사비나에 있을 때도 전해져 들려올 정도였다. 이스보셋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고 경험한 아이젠은 상상을 초월하는 망나니였기 때문이다.
여인을 희롱하고, 하인들을 칼로 위협하고, 빼빼 마른 주제에 활력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있었다.
그런 그가, 환골탈태라도 한 양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소가주가 될 정도로.
‘늠름하시구먼.’
이스보셋 장로가 볼 적에 아이젠의 한 줄 평이었다. 참철검을 들지 않는다고 했을 땐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그것이 소가주 아이젠이라면 자신은 장로로서 따를 뿐이다. 아이젠 소가주가 엇나가는 일이 없도록 충언을 아끼지 않을 따름이다.
‘그나저나, 당연히 넘어지실 줄 알았는데.’
빛의 새는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난다. 비단 이스보셋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사람은 그 매서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고 만다.
이스보셋 장로는 아이젠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해 커버넌트 오러를 미리 운용하고 있었다. 아이젠이 낙마라도 하면 곧바로 붙잡을 수 있도록.
불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스보셋에게는 가벼운 장난이었다. 그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설령 아이젠이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속도로 떨어진다 해도 가볍게 낚아챌 수 있으니까.
그런데, 떨어지기는커녕 흔들림조차 없다니.
아이젠은 지금 태연한 얼굴로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매섭게 때릴 텐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거참.”
“네? 부르셨어요?”
아이젠이 뒤돌아보자 이스보셋 장로는 자신이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뱉은 김에 할 말은 하기로 했다.
“큼. 이런 말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이젠 소가주님.”
“네. 말씀하세요.”
“커흠. 참으로 훤칠하니 멋지십니다.”
아이젠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빈말 아니죠?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 * *
빛의 새가 하늘을 난 지 몇십 분째.
어느새 도시의 전경은 사라지고, 살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용했다. 군데군데 제국군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문제였다.
바닥에는 피가 강을 이뤄 흐르고 있고, 건물은 무너졌으며, 그 건물 밑에는 시체가 깔려 있다. 몇몇 시체의 목덜미에는 창칼이 박혀 있기도 했다.
아이젠의 표정이 굳어지자 이스보셋 장로는 괜히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참혹하네요.”
“큼. 그렇습니다.”
“전부 공화국군 놈들 짓인가요?”
“그렇습니다. 투석기에 날붙이를 달아 쏘았다고 하더군요.”
투석기라면 요한 녀석이 썼을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젠은 뒷덜미가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옥사비나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제 5분 정도만 더 날아가면 됩니다.”
“빨리 가야겠네요. 제가 빨리 가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큼. 실언인 줄은 알지만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소가주님. 공화국은 일부러 이런 광경을 만들어둔 것입니다. 후발대로 찾아올 제국 병사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래요. 하지만 하나 틀렸어요.”
“예?”
아이젠이 뒤를 돌아 이스보셋 장로를 쳐다봤다. 아이젠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 초조한 게 아닙니다. 그냥 궁금할 뿐이에요. 이런 식으로 학살을 자행하는 놈들의 얼굴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아이젠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면으로 날아드는 찬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과연 전선에는 어떤 놈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생사경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으리라는.
‘9성의 경지에, 올라선다.’
아이젠은 굳은 다짐을 심장에 새겼다.
빛의 새가 착륙한 곳은 어떤 마법진이 그려진 위였다.
마법진에 내려앉자 빛의 새는 다시 구슬로 변해 이스보셋 장로의 손에 안착했다. 아이젠은 말에서 내렸다.
이곳은 옥사비나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올렘성. 올렘성 주민들이 아이젠과 이스보셋 장로에게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초췌하고 힘이 없었다.
“다들 절 보는데요?”
“처음 봐서 그럴 겁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아이젠이 이스보셋 장로의 인도를 따라 간 곳은 올렘성 내부였다. 천장이 끝없이 솟아오른 올렘성은 낡아서 청소가 필요해 보였다.
직후 웬 중년의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아이젠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양옆에 호위 병사를 둘 대동한 채였다. 뱃살이 두툼한지라 조금 빨리 걸었을 뿐인데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스보셋 영기사님 아니십니까. 이거 오랜만입니다.”
“큼. 패트릭 성주, 오랜만이군. 빛의 새 착륙 지점이 여기인지라 잠시 들렀네.”
성주의 이름은 패트릭. 패트릭은 이스보셋 장로를 영기사라 불렀다. 영기사는 기사 중에서도 특출난 성과를 낸 이들에게 붙는 칭호이지만, 더러는 황제가 하사하기도 했다.
이스보셋 장로는 냉전 중의 공로로 영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옥사비나로 가는 길을 열어주겠나? 한시가 시급하니 어서 가봐야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곤란… 음? 근데 이쪽의 어린 신사분은 누구이신지요?”
패트릭 성주가 아이젠에게 눈을 돌렸다. 아이젠은 이스보셋을 한번 쳐다봤다. 이스보셋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젠은 패트릭 성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린우드 공작가의 소가주, 아이젠 폰 그린우드입니다.”
“아, 아아! 이거 그린우드 소가주님이셨군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올렘성의 성주 패트릭 인사드립니다.”
극진한 인사를 하고 나서야 패트릭 성주가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당장은 옥사비나의 길을 개방하기 곤란합니다.”
“음? 그건 어째서인가?”
“잠시 따라와 보시겠습니까?”
패트릭 성주는 반대편에 나 있는 복도를 가리켰다. 복도를 따라 걸은 아이젠과 이스보셋은 옥사비나로 넘어가는 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이젠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건?”
“예. 보시다시피.”
올렘성 안쪽에는 철책이 쳐져 있다. 옥사비나의 길에서는 수십, 수백 마리의 프렘린들이 철책을 넘어오려 애쓰고 있었다.
“캬악! 캭! 인간!”
“인간들이다! 죽여!”
“캬악! 죽여라, 인간!”
제국 병사들이 넘어오려는 프렘린들의 대가리를 쳐 철책 바깥으로 떨어뜨리는 중이었다. 프렘린의 숫자가 너무 많아 철책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패트릭 성주가 말했다.
“얼마 전에 야생 프렘린들이 갑자기 몰려와서 급히 철책을 쳤습니다. 한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문을 개방했다간 프렘린들이 이곳 올렘성을 덮쳐올 겁니다.”
“갑자기 몰려왔다?”
“제 생각엔 공화국의 소행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이젠이 되묻자 패트릭 성주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젠은 다시 철책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소가주전에서 프렘린이라면 지겹도록 상대해 본 아이젠이지만, 한 마리를 상대할 때도 전력을 쏟아야만 했던 아이젠이다.
이스보셋 장로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큼. 큰일이군요, 소가주님. 어림잡아도 수백 마리는 되는 듯합니다.”
“옥사비나로 건너가는 길은 이거 하나뿐인가요?”
“예. 이럴 줄 알았다면 옥사비나에도 빛의 새 착륙 지점을 만들어둘 것을.”
“아니에요. 가죠.”
“예?”
아이젠은 대답하지 않고 빙 돌아 걸어온 길을 반대로 걸었다. 아이젠의 발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활짝!
곧장 성 밖으로 나온 아이젠은, 철책이 쳐져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스보셋과 패트릭이 뒤늦게 따라 나왔다. 패트릭이 이스보셋을 바라보았다.
“어, 어쩌시려고 저런답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다네.”
하지만 이스보셋의 얼굴에는 어딘가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마침내 아이젠이 철책 가까이 서자, 철책을 지키고 서 있는 제국 병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어서 막아! 이놈들 넘어오면 끝장이야!”
“저기, 저기 넘어온다! 대가리를 쳐버려!”
“젠장! 끝도 없네, 이 프렘린 놈들!”
“캭! 캬악!”
그때 프렘린 한 마리가 철책 사이로 손을 욱여넣어 한 병사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병사가 어어 하는 사이 프렘린의 날카로운 손톱이 병사의 목을 찢으려 했다.
그때.
덥석!
아이젠이 나타나 프렘린의 손을 붙잡았다. 풀려난 병사는 기우뚱 뒤로 넘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철책을 열어.”
“예? 그보다 누구신지…….”
“그린우드 소가주다. 철책을 열어.”
아이젠이 신분을 밝히자 좌중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병사들의 눈이 경이로 물들었다.
아이젠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했다.
“세 번째 말한다. 철책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