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출전 】
요한이 쓰러지자, 주변에서 싸우고 있던 그린우드 소속 기사들과 공화국군 병졸들의 소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공화국군 병졸들 사이에서 하나둘씩 두려움의 음성이 퍼졌다.
“요, 요한 대장군님이 패하셨다.”
“요한 대장군님이 지셨다고?”
“이, 이럴 수가.”
그때 기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크게 고함쳤다.
“아이젠 소가주님이 적장을 쓰러뜨렸다!!!”
땡그랑! 땡그랑!
공화국군 병졸들이 검을 손에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요한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에 있던 장교들도 모두 패배했다. 적검 레온, 청검 미하일, 흑궁 테오도라까지.
녹추 이사키오스는 보이지 않았지만 후미 점령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그 역시 패한 게 분명했다.
“으, 으악!”
“도망쳐!”
“젠장, 공화국이 패배하다니! 이 일은 반드시 복수하겠다, 제국 놈들!”
“공화국군 놈들이 달아난다!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들여!”
“공화국의 머저리들을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일대에 소란이 일었다. 아이젠은 암화를 거두고 피곤한 기색으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후우.”
그러자 그에게 사울 장로가 다가왔다. 사울 장로는 옆구리가 살짝 검게 그을려 있는 것을 빼면 멀쩡해 보였다.
“소가주님, 무사하셨군요. 좀 다치신 것 같긴 합니다만.”
“괜찮아요.”
“적장을 쓰러뜨리시다니, 놀랍습니다. 더 강해지신 듯합니다?”
사울 장로의 말은 사탕발림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이젠의 성장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이젠은 사울 장로의 옆구리로 시선을 돌렸다.
“사울 장로야말로. 다치셨어요?”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낫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원에 가보세요.”
뒤이어 바네사도 다가왔다. 바네사는 한스를 등에 업고 있었다. 한스는 피범벅이 되어 있는 걸 보니 많이 다친 모양이었다.
“소가주님. 이 동생 녀석이 먼저 의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누님도 다치신 모양입니다만.”
“어머, 제 걱정을 다 해주시고. 하지만 저는 괜찮답니다.”
둘이 대화하는 사이 털레털레 멀리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모니카였다. 그녀는 피로 칠갑한 몸을 끌고 꾸역꾸역 아이젠에게 걸어왔다. 아이젠이 그녀를 발견하고 부축했다.
“모니카, 꼴이 왜 이래?”
“으윽…….”
“사울 장로.”
“예.”
아이젠의 부름에 사울 장로가 다가와 모니카에게 치료술을 사용했다. 그러자 모니카의 몸에서 흐르던 피가 조금씩 멎었다. 사울 장로는 한스에게도 치료술을 걸어주었다.
모니카는 왼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아이젠에게 내밀었다. 편지 내용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옆 마을에 가 있는 장로연합을 부르는 편지다.
아이젠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상황 끝났어, 모니카. 고생했다.”
“으… 무,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소가주님…….”
털썩! 모니카가 쓰러졌다. 사울 장로는 화급히 그녀의 목덜미에서 맥을 짚었다.
“잠시 기절한 것뿐입니다. 피로감이 상당했나 봅니다.”
“후우. 네.”
아이젠의 눈동자가 총명해졌다. 그는 선전포고를 받았고, 요한 일행을 일거에 박살 내버렸다. 아이젠뿐만이 아니라 식솔들까지 이렇게 다쳤다는 건 아이젠의 심기를 상당히 거스르는 일이었다.
- 아이젠 주인님. 후미에서 가문을 치려던 놈들을 모두 검거했습니다.
그때 아이젠의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슨의 음성이었다.
‘혼자서 고생했다, 제이슨.’
- 아닙니다. 주인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잡아놓은 놈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이젠이 처리 방안을 고민할 때, 사울 장로가 아이젠의 옆에 가까이 다가섰다.
“소가주님. 공화국의 선전포고를 받은 이상 제국의 소가주로서 물러서실 길은 없습니다.”
“물러날 생각 없어요.”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긴요.”
아이젠은 마음속으로 제이슨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죽여라.’
그리고 입 밖으로도 말했다.
“받아줘야죠.”
* * *
장로연합이 그린우드의 영지로 복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 있는 틈을 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했다.
하지만 그것과 전쟁은 조금 다른 일이다.
오드니엘 장로가 주축이 되어 말했다.
“전쟁이라니! 그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적국에서 야만적으로 나온다 하여 우리까지 야만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말을 하는 대상은 소가주 아이젠이었다.
이곳은 그린우드 가문의 회의장. 아이젠 및 상처를 치료한 바네사, 정신을 차린 한스, 세상모르고 천진난만한 에밀까지 모두 자리해 있었다.
아이젠의 자리는 본디 가주의 자리.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양익으로는 사울과 오드니엘을 포함한 공작가의 아홉 장로가 서열대로 앉아 있었다.
오드니엘은 강경하게 말했다.
“전쟁은 애꿎은 제국 시민들만 죽어나는 일입니다. 선전포고를 받았어도 전쟁을 피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예?”
아이젠의 반문에 오드니엘 장로가 멍청히 대답했다. 아이젠은 재차 물었다.
“어떻게 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건… 공화국의 수장과 만나서…….”
“그 공화국의 수장이 전쟁을 선포한 장본인입니다, 오드니엘 장로. 자기가 말해놓고 거두는 독재자가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공화국은 독재자 한 명에 의해 지배되는 구조 체계다. 그리고 아이젠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독재자란 자들은 절대 본인이 한 말을 번복하지 않는다. 본인들의 권력이 휘둘리는 일이라면 말이다.
오드니엘 장로는 할 말이 없어 침만 삼켰다.
“…크음.”
“전쟁을 막을 방법이 있다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오드니엘 장로 말이 맞아요. 애꿎은 시민들만 억울하게 죽어 나가겠죠. 하지만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정말 맞서 싸우기라도 하실 작정이란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테오발트 가주님께서도 최전선에 나가 있는 거 아닙니까.”
“크음… 그러나, 소가주님은 아직 나이가.”
벌컥! 그때 회의장의 문을 열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아이젠을 제외한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사람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바로 기젤라 폰 그린우드, 테오발트 가문의 공작부인이었다.
“다들 와 있었군요.”
“예, 공작부인.”
기젤라는 게오르크가 죽은 이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칩거했다. 조금 전 요한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도 그녀는 나와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한 달 만에 칩거에서 벗어나 회의장까지 나온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아이젠도 일어나 그녀에게 묵례했다.
“공작부인.”
아이젠은 기젤라를 마주한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을 깨달은 이후로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지나가다 슬쩍슬쩍 본 적은 있지만 말을 섞는 것은 간만이다.
“그래요, 아이젠… 소가주.”
“앉으시죠.”
아이젠은 비어 있는 옆자리로 기젤라를 안내했다. 기젤라는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한번 했다.
아이젠은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다는 것을 느꼈다.
‘기젤라 공작부인은…….’
초면이지만 기젤라가 자신에게 어떤 태도인지 정도는 대략 짐작이 가능한 아이젠이었다.
기젤라에게 있어 아이젠 자신은 장남 게오르크를 죽인 장본인. 물론 게오르크는 죽어 마땅했으나, 기젤라가 아이젠을 미워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는 아이젠이었다.
그때 기젤라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젠 소가주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
기젤라의 말에 좌중이 놀랐다. 기젤라는 장로들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재차 말했다.
“아이젠 소가주님도 벌써 열일곱이에요. 자기 결정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죠. 게다가 소가주……. 결정권자의 말에 우리 식솔들이 발언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 하지만 공작부인! 아이젠 소가주님은 전쟁의 경험도 없는 풋내― 아니, 아직은 어린아이입니다. 소가주님께서 만약 전선에 나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쩐단 말입니까.”
반론을 제기한 것은 역시나 오드니엘 장로였다. 기젤라의 눈이 번뜩였다.
“봉변이라뇨? 무슨 봉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커험, 그걸 꼭 제 입으로 말해야겠습니까?”
“소가주전을 정식으로 치르시고, 게오르크… 게오르크 그 아이도 이겨서 마땅하게 자리에 오른 것이 바로 아이젠 소가주님이세요.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나요?”
기젤라는 게오르크의 이름을 말할 때 유독 경직돼 보였으나, 말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아이젠은 그런 기젤라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왜 내 편을 들어주는 거지?’
하지만 어쨌든 말에 힘이 실렸다. 아이젠은 책상을 탁 내려치고 일어섰다.
“자, 결정된 것 같은데요. 저는 최전선으로 갑니다.”
“커흠… 가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큼. 그렇지 않습니다.”
벌컥! 또다시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모두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최전선에 있어야 할 이스보셋 장로였다.
“이, 이스보셋 장로?”
“그대가 여길 어떻게!”
“지금 옥사비나에서 가주님과 함께 싸우고 계신 것이 아니었소?”
장로들이 놀라서 이것저것 물을 때, 이스보셋 장로는 대답해 주겠다는 듯 품에서 봉인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펼쳐 그 내용을 읽었다.
“전령! 큼. 리타스나트 공화국에서 전쟁을 선포했으니 당장 전선에 합류하라는 테오발트 현 가주님의 명령입니다!”
이스보셋 장로는 그렇게 말하고 편지를 옆에 있던 오드니엘 장로에게 넘겨주었다. 오드니엘 장로가 편지 내용이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쩍 벌리자, 이스보셋 장로가 말했다.
“큼. 오드니엘, 정치 놀음은 그만 좀 하거라.”
“이, 이스보셋 형님…….”
“소가주님, 따라오시겠습니까?”
이스보셋 장로의 물음에, 아이젠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입니다.”
떠나기 전, 아이젠은 회의장에서 기젤라와 단둘이 남았다.
아이젠이 할 말이 있다며 그녀를 남긴 것이었다.
“소가주님, 어쩐 일로 그러시나요.”
“말씀 편히 하세요, 공작부인.”
“…….”
기젤라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아이젠은 눈앞에 놓인 찻잔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인께서는 제가 미우실 것도 같은데, 제 의견에 찬성표를 던져주셨어요.”
“…….”
“그건 제가 최전선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바네사 누님이 소가주 작위를 물려받는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그럴 리가요!”
아이젠의 터무니없는 추리에 기젤라가 크게 반박했다. 아이젠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그러진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
“…저는 그저.”
“그저?”
기젤라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역시 내 소중한 아이니까. 게오르크뿐만 아니라 너 역시도 내 소중한 아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고 싶을 뿐이란다, 아이젠. 내가 사랑하는 아들.”
기젤라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아이젠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을 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몸 성히 다녀올게요,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