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름이 분명, 이강철이었던가.]
“그래. 지금은 아이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도철의 물음에 아이젠이 답했다. 도철이 말했다.
[이름은 달라졌어도 본질은 같을 터. 이강철이든 아이젠이든 거기 서 있는 네놈은 같은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일 뿐.]
“나약한가? 내가.”
[힘의 크기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한 세기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그 몸짓이 나약할 뿐이지.]
“재밌는 해석이네. 하지만, 한 세기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짧은 삶을 온 힘 다해 살아간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어?”
[흐음. 그 또한 재밌는 해석이로구나. 나약한 인간이여.]
쿵!! 쿵!!
도철이 아이젠을 향해 걸어왔다. 사자 같은 얼굴이 아이젠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간, 네가 이곳에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도 마찬가지야.”
무혈신공을 익힌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번 도철과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6성, 암화의 경지에 오를 때다.
결사신권은 아이젠이 만든 권법이지만 그 바탕은 무혈신공에 있다. 무혈신공을 배운 후 만들어낸 어떤 무술이라도 암화의 경지에 도달하면 도철을 만나게 된다.
물론 역대 무혈신공을 배운 사람은 이화도와 이강철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조금 놀라는 중이다. 한 번 본 인간을 다시 보게 되다니. 앞으로 인간을 만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무혈신공은 대가 끊겼다. 이화도가 죽고, 유일한 계승자였던 이강철 역시 중원 무림에서 죽었으니, 더 이상 무혈신공을 사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젠이 갑자기 떡하고 나타났으니 도철로서는 당황스러운 심경이었다.
“하하. 너무 놀라진 마. 내가 이강철 바로 그 본인이니까.”
[그래……. 그나저나 인간, 네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결국 또다시 암화의 경지에 올라선 것인가.]
“그렇다. 이번 생에선 몇 달 안 걸렸지.”
[그것참 대단하구나. 하나, 허락되지 않는 한 네가 암화에 곧바로 올라설 수는 없다. 알고 있겠지?]
“…그래. 알아.”
화륵!
아이젠이 대답함과 동시에 가까이에 계단이 생겨났다.
약 10층 높이로 끝 모를 듯 이어져 있는 계단의 종지부에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있었다. 그 불길의 색은 어두운 암색이었다.
[올라가거라. 가서 네게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증명해라.]
끄덕.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체할 이유가 없어 계단을 올랐다.
저벅저벅.
제단에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불길이 조금이나마 빛을 만들어내 아이젠은 자신의 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맨몸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당연하다. 아이젠이 있는 이곳은 그 자신의 상념. 무언가를 입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당연히 아이기스 역시 두 팔에 매여 있지 않았다.
‘현무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아이젠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다시 맨발로 계단을 올랐다. 10층 높이였지만 전부 오르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젠은 제단의 검은 불 앞에서 자신의 손에 작은 상처를 냈다. 따끔했다. 상념 속이어도 통증은 똑같이 느껴진다.
검은 불 위에 아이젠의 피가 몇 방울 떨어지고.
“…….”
아이젠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이내 벌어졌다. 제단의 검은 불이 화르륵 소리와 함께 꺼진 것이다. 그 탓에 더 이상 아이젠의 몸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계단도 마찬가지로 어둠에 잠식됐다.
아이젠은 눈을 감았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도철은 무표정으로 아이젠을 보고 있었다.
아이젠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옛날 일 생각나네. 전생에서도 한 번에 통과 못 했었는데.”
[그래, 기억나는군. 내게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일화다.]
“자, 이제 어쩌면 되는 거지?”
[답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이강철. 아니, 아이젠.]
번쩍! 도철의 눈이 푸르스름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도철의 얼굴에 다채로운 색의 빛이 퍼져 나가며 만면을 칠했다. 마치 물감이 칠해지는 것 같았다.
촤라라락!
마침내 물감의 행진이 멈추자, 도철의 얼굴은 얼룩덜룩한 사자의 형상이 되어 있었다. 이는 도철이 전투태세에 임하기 전 행하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 전투태세.
[떠나거라. 죽음으로써.]
도철의 몸놀림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퍽!
아이젠이 둔탁한 일격을 맞고 공중에 붕 떴다. 다행히 그사이 이미 무혈신공 운공을 마친 아이젠은, 결사신권을 펼쳐 도철의 공격을 막아냈다.
저릿저릿―
그의 팔뚝이 저릿한 것은 논외였지만 말이다.
치이이익!
아이젠이 낙법 자세로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발바닥을 끌며 멈춰 선 아이젠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사신강림을 발동했다.
‘사신강림: 강망태신!’
그것도 강망태신을. 아이젠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셈이었다.
[오너라, 아이젠. 오랜만에 네놈과 싸워보는구나.]
“그래. 대충 한 십 년 만이지?”
[그 정도 된 것 같군.]
화아아아아아!!!
한순간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아이젠은 뺨을 스치는 바람이 모두 도철에게로 몰려드는 것을 확인했다. 도철의 입에서 거대한 구체가 형성되고 있었다. 바람의 구체였다.
“야야야!”
아이젠은 삐질 땀을 흘리며 결사신권 자세를 잡았다. 그의 오른손에 회혼의 기운이 터질 듯이 모여들었다. 아이젠은 주먹이 폭발할 것처럼 꽉 쥐었다.
[네놈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면, 나 역시 그렇게 상대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느냐?]
“인간도 아닌 놈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은 무슨.”
구체 위에 자신의 내공을 얹은 도철은 그것을 대포처럼 쏘았다.
퍼엉!!!
그것은 문자 그대로 포탄이었다. 다만,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포탄.
‘결사신권, 섬광권기!’
퓨뷰뷰뷰뷱!!
회혼의 날카로운 기운을 주먹 바깥으로 내뻗은 아이젠. 섬광권기는 도철의 구체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쩌렁쩌렁한 파열음과 파공음. 바람이 갈기갈기 흩어지자 아이젠은 권왕백무를 주먹에 담았다. 그리고 높이 뛰어올라 도철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결사신권, 권왕백무 : 관!’
도철의 눈동자를 때리기 위해서였다. 세상 그 어떤 생물도 눈동자를 단련할 수는 없다.
콰앙!
관은 그대로 도철의 눈동자에 박혔다. 세상 그 어떤 생물도 눈동자를 단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철은 예외였다.
키이이잉.
도철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도철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말했다.
[십 년 만이라 잊은 모양이구나, 아이젠. 내겐 그 어떤 공격도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 텐데…….]
이윽고 도철의 눈동자가 빠직하는 소리를 내며 반짝이는 것을 멈추었다. 도철의 눈동자는 전보다 더 단단해진 것이다.
도철은 눈과 내장, 피부 안쪽과 맨살마저 단단하여 무쇠와 같다. 그리고 그 단단한 피부는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더 단단해지는 특성을 갖췄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먹을 다루는 아이젠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완벽한 천적이다. 마법이라면 또 모를까.
아이젠은 땅 위에 내려앉으며 회혼을 온몸에 고르게 분포해 운용했다. 너무 급작스럽게 섬광권기를 사용하느라 내기가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아니. 알고는 있었어. 근데 눈동자까지 그런 줄은 몰랐네. 십 년 전엔 눈은 안 때려봤거든.”
[이제 어쩔 텐가? 너도 알다시피 너의 그 권법으로는 날 절대 쓰러뜨릴 수 없다.]
“답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도철. 난 십 년 전에 이미 암화의 경지에 한 번 올라봤던 놈이야. 한 번 올라본 내가 정답을 모를까 봐?”
[그야 정답은 당연히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알지 않으냐? 정답을 알고 있어도 그 해답을 풀이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암화라는 것을.]
“…그렇지.”
아이젠의 이마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아이젠은 이미 암화에 오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이젠은 그 방법대로 할 생각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암화에 오른다. 그리고 상념에서 빠져나와 요한을 박살 낸다.’
그것이 아이젠의 계획이고, 아이젠의 계획은 흐트러지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후우. 계속해 볼까? 웬만하면 봐주면서 하지는 마. 나 자존심 상하니까.”
[그르르르. 그래, 소원대로.]
팟! 도철이 뛰어올랐다. 아이젠은 섬광권기를 주먹에 품었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섬광권기는 총 세 발. 세 발 뒤에 아이젠의 내공이 모두 소진된다.
“내공을 몽땅 쏟아부어주마.”
그때 도철의 발이 아이젠을 짓누를 듯 다가왔다. 발은 웬만한 동산보다 높은 크기였다.
‘결사신권, 섬광권기!’
퓨뷰뷰뷰뷱!
섬광귄기는 도철의 발바닥에 닿아 찢어발겼다. 도철의 발이 그 반동으로 조금 뜨는 틈을 타 아이젠은 몸을 굴려 피했다.
콰아앙!!
도철의 발이 땅을 흔들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도철의 발바닥이 유리판처럼 빛나더니 빠직 소리와 함께 더 단단해졌다.
[너, 그 힘. 이제 보니 홍화가 아니로구나?]
“그래. 이곳 세계의 오러라는 것과 섞은 거야. 회혼이라고 이름을 붙였지.”
[날카로운 예기가 쓸 만하다. 하나, 보다시피 여전히 내게는 아무 피해도 주지 못하지.]
“거 다 아는 사실 굳이 계속 언급해야겠어? 계속하기나 하자구.”
남은 섬광권기는 두 발. 아이젠은 왼손에 섬광권기를 실은 뒤 오른손에는 천수관음의 정수를 담았다. 천수관음의 천 개 다발 손이 아이젠의 오른손에 품겼다.
‘결사신권, 천수관음: 천권익(千拳翼)!’
퍼덕!
아이젠의 오른팔에서 날개가 뻗어 나왔다. 날개는 아이젠의 우반신을 장악해 그를 허공에 붕 띄웠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날개가 아니었다. 홍화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손들의 잔상이었다.
쉬익!
하늘로 날아오른 아이젠은 도철의 몸통보다 더 높이 올랐다. 그리고 허공에 붕 뜬 채로 도철의 머리에 섬광권기를 날렸다.
퓨뷰뷰뷰뷱!
도철은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카가가가강! 도철의 단단한 머리에 직격한 섬광권기는 그를 조금 밀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생채기 하나 그 머리에 남지 않았다. 머리는 또다시 유리처럼 빛나며 전보다 더욱 단단해졌다.
[소용없……?]
도철이 감았던 눈을 뜨는데, 조금 전까지 눈앞에 떠 있던 아이젠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젠은 어느새 도철의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동물에게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약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뇌, 심장, 간 등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장기부터, 눈동자, 코, 인중, 급소 등 훤히 드러난 부분들까지.
그리고 또 하나의 약점, 그것은 바로.
“바로 허리다!”
뻐어어억!!!
퓨뷰뷰뷰뷱!
아이젠은 도철의 허리에 주먹을 박은 뒤, 그 상태 그대로 섬광권기를 날렸다. 도철의 허리 부근에 섬광이 일어났다.
[음!?]
우지지직! 도철의 허리가 크게 꺾이며 그가 앞으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