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덜덜덜. 판보가 쥔 단검을 바라보던 모니카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러자 판보가 비웃었다.
“푸하하! 뭐야, 너. 겁먹은 거냐? 그런 정신머리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엉?”
판보는 한순간 표정을 지우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모니카를 노려봤다. 모니카의 목검 쥐는 손짓은 제법 쓸 만했지만, 그런 것과 달리 벌벌 떨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실전은 처음인 게 분명했다.
“난 말이지. 전쟁터에서 너 같은 년이 제일 싫어. 하는 일도 없이 그저 다른 사람들 뒤꽁무니에 숨어다니기만 바쁜 것들. 여인의 몸으로도 전투에 임하는 테오도라 중위님 같은 분도 계시는데 말이야.”
“나, 나도. 나도 열심히 싸우려고 하고 있어요! 아니, 싸우려고 하고 있어!”
“네가? 푸하하!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다고! 기껏해야 목검이나 들고 있는 주제에!”
판보는 단검을 손 위에서 몇 차례 빙빙 돌리더니 역수로 쥐어 잡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위협적이라서, 모니카는 어깨를 더욱더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뒤에는 에밀 공자님이 계셔.’
에밀 공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모니카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모니카는 바네사에게 배운 대로 파생검술의 자세를 잡았다. 초보답게 갖춰지지 않은 자세였지만 그래도 봐줄 만은 했다. 판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흥. 해보겠다는 거지? 네까짓 년이 나랑 해보겠다는 거냐고!”
“그래요. 아니, 그래! 해볼 거야!”
“사람 죽여본 적이나 있냐? 네가?! 난 공화국에서 구를 대로 구른 ‘전사’라고!”
파박! 판보가 흥분한 채 달려들었다. 아이젠이나 바네사, 한스였다면 판보의 몸놀림은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니카에게는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죽일 듯이 달려드는 이를 본 적이 있는가?
모니카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있었다. 모니카는 일전의 기억들을 되새겼다.
‘아이젠 소가주님은 날 몇 번이나 생사고락의 위기에서 구해주셨어. 이젠 나 스스로 해야 할 때야!’
모니카는 영설산에서 만났던 그런트를 상기했다.
그렇게 모니카는 목검을 단단히 쥐었다.
“파생검술, 상단 베기!”
촤악!
모니카의 목검이 판보의 얼굴 뼈를 갈랐다. 잘리지는 않았다. 목검은 그 정도의 예리함은 갖추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둔탁했다. 그래서 판보는 단검을 떨어뜨리고 울부짖었다.
“으, 으아아아!!”
“……!”
두근두근! 모니카는 판보가 제 얼굴을 부여잡고 소리 지르는 것을 보며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어서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일격을 날려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후우! 후우!”
“윽, 이 개 같은 년이!”
모니카가 심호흡하는 사이 어느새 정신을 차린 판보가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은 어느새 손에 다시 쥔 채였다.
판보가 일병에다 겁먹고 여기로 도망 온 인물이라 해도 그 역시 공화국군이다. 이 정도로는 쉽게 당하지 않는다.
“죽어!”
팟! 판보는 단검을 앞세우고 모니카에게 진격해 왔다. 모니카는 다시 목검을 꽉 쥐고 다음 초식을 기억해 냈다.
‘파생검술, 하단 베기!’
뻐억!!
모니카가 목검 끝을 아래로 두어 때린 것은 판보의 정강이. 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판보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아악!!”
“서, 성공했다!”
“으윽, 이 씨발! 죽여 버릴 거야!”
촤악! 판보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단검에 모니카의 뺨이 베였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았으나 쓰라리고 따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모니카였다.
피가 배어 나와 입술 위에 닿았다. 피 맛은 비린 맛이었다.
“으!”
“어딜 공화국군의 위대한 전사인 내게 감히. 갈기갈기 토막을 내주마.”
“해, 해보시든가! 할 수 있으면!”
“이게!”
모니카는 다시 파생검술 초식을 잡았다. 다음은 중단 베기.
뻐억! 그러나 모니카의 목검은 가로막혔다. 판보는 모니카의 목검 끝을 손으로 걸쳐 들고 있었다.
“흥. 똑같은 공격을 세 번이나 맞아줄 것 같냐?”
“똑같지 않아! 다른 초식이라구!”
“똑같아! 형편없는 건 똑같다고!”
푸욱! 마침내 판보의 단검이 모니카의 뱃가죽을 꿰뚫었다. 모니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비명도 못 지르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꿇어앉았다.
이 정도로 아픈 건 살면서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마치 누군가가 배에 뜨거운 불을 갖다 댄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으윽……!”
모니카는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한일자로 얇은 상처였지만 통증은 배 전체를 두 동강 낸 것만 같았다.
판보가 단검을 손 위에서 휘휘 돌렸다.
“흥. 누구인진 몰라도 병신 같은 스승을 뒀군. 겨우 그 정도의 검술밖에 가르치지 못하다니 말이야. 너, 이제 겨우 상·중·하단 베기 배운 거지? 푸하하! 6개월은 배웠을 텐데 아직도 그거밖에 안 가르치디? 푸하하하!”
판보가 혼자 떠들며 마구 웃었다. 모니카는 치욕스러운 기분이었으나 어쩐지 마음 한편으론 차분해지기도 했다.
“스승…님이라…….”
모니카의 스승은 바네사였다. 바네사는 지난 한 달간 모니카에게 기본 초식만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건 바네사가 형편없는 스승이라서가 아니다.
- 모니카, 잘 들어. 모든 검술은 기본이 가장 중요해. 난 너에게 몇 달 동안은 기본만 가르칠 거야. 배우다 보면 알겠지만 기본이 제일 어려운 법이지. 하지만 봐줄 생각은 없으니까 각오 단단히 해두렴?
바네사는 모니카가 엇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본기부터 탄탄히 가르친 것이었다. 바네사의 뜻대로, 모니카는 기본을 어느 정도는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완벽이랑은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바네사 공자님은… 바보가 아니야.”
“엉? 뭐야, 너. 쳇, 상처가 얕았나…….”
모니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뺨에 난 상처와 배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단단하게 목검이 쥐여 있었다.
“난 검술을 배운 지 한 달밖에 안 됐어. 한 달 내내 기본기만 수련했어. 그 시간이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냐면, 난 더 강해졌으니까!”
처억! 모니카가 파생검술의 자세를 잡았다. 올곧고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기본 자세’다.
꿀꺽―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판보 일병은 침을 삼켰다.
‘한 달이라고?’
고작 한 달 배운 것 만에 저 정도로 완벽한 기본 자세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년.”
“그린우드를, 깔보지 마!”
팟! 모니카와 판보가 서로를 향해 뛰었다. 모니카는 목검을 뒤로 크게 당겨, 판보의 머리를 내려칠 준비를 마쳤다.
“파생검술, 상단 베기!”
판보도 그사이 단검을 정수로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모니카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슈팟!
바람이 찢어졌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것은 모니카였다. 모니카는 엎드린 채로 방금 찔린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으… 으윽!”
모니카의 목검은 판보의 머리를 스치지도 못했다. 한 발짝만 더 앞섰다면 내려칠 수 있었을 텐데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 모니카는 자신의 부족함에 한탄했다.
한편 판보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크크크. 아무리 그래봤자 넌 초보일 뿐이야. 공화국의 위대한 전사인 내게느은……?!”
판보의 눈동자가 갑자기 확 커졌다. 모니카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는데, 판보의 입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피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커헉!”
“……??”
어리둥절한 모니카. 판보가 이윽고 앞으로 넘어지며 털썩 쓰러졌다.
판보의 등 뒤에 서 있던 건 그린우드의 다섯째, 에밀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에, 에밀 공자님!”
“애쓰는 것 같길래. 괜한 참견이었어?”
모니카는 황당했다. 열 살이나 어린 에밀 공자가 자기보다 훨씬 빼어난 검술을 자랑하다니.
피식― 모니카는 왠지 모르게 헛웃음을 짓게 되었다. 그런 그녀도 뒤로 풀썩 넘어가 쓰러졌다. 에밀이 모니카에게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죽을 것 같은 거만 빼면요.”
그 말대로 모니카는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치료가 필요했다. 배와 옆구리에 뚫린 구멍이 언제 모니카를 사선으로 끌고 갈지 모른다.
그런데도.
“헤헤.”
어째선지 모니카는 실실 웃게 되었다. 첫 실전에서는 결국 패배했고 배운 것들은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지만.
‘이제 나도, 하나의 전력이 될 수 있어.’
모니카는 자신이 아이젠의 뒷배에서 조금이나마 설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분이 좋았다.
“아, 그렇지 참.”
모니카는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 같았지만 자신의 임무를 잊지는 않았다. 품에서 편지를 꺼낸 모니카는 피 묻은 손으로 띠지를 봉해 들고 부들부들 움직였다.
“에밀 공자님, 잠시만 여기 계세요.”
그녀는 편지를 송달하러 가야 했다.
* * *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내려앉은 침묵과 칠흑뿐인 검정 가운데 아이젠은 홀로 고고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암흑이면 자신의 모습조차 볼 수 없다. 계율의 관 때처럼 단순히 어두운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아이젠의 심상 속.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빛조차도 집어삼켜져 눈에 반사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그 와중에.
[그르르르.]
아이젠은 괴마수의 음성을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고, 당장에라도 제 목을 매달아 자결해 버리고 싶을 만큼 겁이 나게 하는 목소리다.
그러나 아이젠은 이미 이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다. 기나긴 과거의 인연이다. 아이젠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도철.”
괴마수의 이름은 도철(饕餮). 온통 까만 공간에서, 도철만이 유일하게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도철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아이젠의 눈에도 보였다. 그 흉신악살과도 같은 모습이.
양의 몸, 호랑이의 이빨과 송곳니, 사람의 손발톱, 굽이진 뿔을 가진 도철의 신체적 특징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의 거대하기 짝없는 몸만큼은 아이젠을 작은 점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현무도 이 정도로 거대하지는 않았다.
지금 아이젠의 모습은 비교하자면 태산 앞의 선바위.
도철에게 아이젠은 발길질 한 번이면 사라져 없어질 만한 티끌이었다.
[그르르르.]
도철이 다시 소리를 냈다. 몸통이 큰 만큼 목소리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아이젠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 도철의 눈동자에 아이젠이 들어왔다. 너무 작아서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는데, 그가 내뿜는 내공이 참으로 기운차서 눈길이 갔다.
아이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더라도 도철의 눈동자 하나보다도 10분의 1은 더 작았다.
[네놈…….]
“날 기억하나?”
[호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때와는 생김새가 많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만…….]
도철의 고개가 갸우뚱 넘어갔다. 작은 움직임일진대 대기가 울릴 만큼의 진동이 있었다.
[이름이 분명, 이강철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