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캉!
한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테오도라의 무기 다루는 실력은 제법 뛰어났다.
한스의 참철검을 까마귀장궁의 현에 걸어버린 테오도라는, 한스를 뒤로 팍 밀친 뒤 장궁 끝으로 베어버렸다. 까마귀장궁의 활 끝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촤악!
“윽!”
한스는 뺨에 상처를 안고 물러섰다. 참철검술 3성 상위인 자신이 저런 듣도 보도 못한 무기술에 지다니, 장로들이 듣는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으으. 이 여자가. 활잡이 주제에!”
“…….”
테오도라는 조금 전부터 한스가 어떤 말을 해와도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아예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을 못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러나 싸울 때 감탄사 정도는 내는 것을 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둘 중 하나이리라. 소심하거나, 아예 한스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거거나.
한스는 참철검을 꽉 쥐었다.
“공화국 놈들은 너 같은 년도 전투원으로 쓰나 보지? 하, 감히 제국에 선전포고를 해오다니. 패배자로 낙인 찍혀 돌아가게 해주마.”
“…….”
한스가 도발하자 테오도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테오도라는 갑옷 위로 튀어나와 있는 옷깃을 여미며 코와 입을 가렸다. 눈살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찡그린 표정이었다.
“더러운 제국 놈. 자꾸 입 열지 마. 냄새 나니까.”
“뭐야?”
“난 제국 사람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아. 죽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야.”
“하. 뭐야, 말 잘하잖아? 아예 나랑 대화를 하기가 싫었던 모양이지?”
“응. 그러니까 입 좀 닫아.”
기익! 그때 테오도라가 장궁에 화살을 메겼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녀의 눈빛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제국 남자, 입 냄새 나.”
투웅! 화살이 쏘아지고, 그 촉 끝은 정확히 한스의 입술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대로라면 한스는 영영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윽?!”
티잉! 간신히 참철검을 들어 화살을 튕겨낸 한스. 그러나 테오도라의 화살은 연이어졌다. 퉁! 퉁! 퉁! 발사되는 모든 화살을 막아낼 재간 따위 한스에겐 없었다.
한스는 치명상이라도 피하고자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댔고, 화살은 여지없이 한스의 관절 곳곳에 박혔다.
콱! 콱! 콰득!
“으윽!”
“움직이기 힘들지? 이제 곧 다리도 풀릴걸? 봐.”
풀썩! 한스가 양 무릎을 꿇었다. 다릿심은 이제 무의미. 한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참철검을 악 쥐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져. 가만, 내가 진다고? 그럴 순 없어!’
바네사 누님도, 저기 계신 사울 장로님도 제 몫을 해내는데. 자신이라고 못 할쏘냐?
한스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덤벼보기로 마음먹었다.
“참철검술, 속동검격!”
슈팟! 재빠르게 나아간 한스는 참철검을 앞세워 테오도라를 베고자 했다. 그러나 한스의 속동검격은 제 가치를 하지 못한다.
몇 걸음만큼도 나아가지 못하고 한스는 덜걱 멈춰 서버렸고, 다음 순간 테오도라의 화살이 한스의 허벅지에 박혔다.
콱!
“크윽!”
부들부들 다리가 떨렸다. 한스는 조금 전의 실패를 가슴에 새겼다.
‘발을 좀 더 강하게 굴러야 해!’
꽈악! 한스는 제대로 힘이 쥐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최대한 발끝에 힘을 끌어모았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참철검술, 속동검격!”
슈팟!
이번에는 거리가 좀 더 나아갔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거리를 재는 것에 신적인 재능을 보인다. 한스는 테오도라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테오도라는 이미 활시위를 당겨둔 상태였다.
콱!
“으윽!”
이번 화살은 한스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팔심이 풀릴 법도 한데 한스는 오러를 온몸에 흘려 넣어 상쇄했다.
‘이번엔 거리가 짧았어.’
짧은 거리를 조율할 수 있는 건 그의 참철검뿐. 참철검을 더 길게 내뻗으면 테오도라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한스는 또다시 실패에서 깨달음을 얻고 한 번 더 참철검술의 자세를 취했다.
“참철검술, 속동검격!!”
슈팟!!
캉!
이번엔 거리도 완벽히 쟀다. 참철검은 테오도라에게 닿을 듯도 했다. 하지만 테오도라는 까마귀장궁으로 또다시 참철검을 막아냈다.
“몇 번을 더 해도 소용없는 짓이야.”
“그래? 하지만 넌 이번엔 화살을 시위에 올리지도 못했잖아.”
“……!”
“점점 위협적이지 않냐? 엉?”
촤악! 테오도라는 대답하지 않고 장궁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장궁 끝에 반대쪽 뺨을 베인 한스는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의 안면은 어딘가의 원주민 같은 몰골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는 힘이 부족했어.’
한스는 팔꿈치에 박혀 있던 화살을 뽑았다. 한두 개가 아니라서 뽑자마자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한스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다시 참철검을 꽉 쥐었다.
테오도라가 걱정해 주는 체하며 말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뽑으면 과다출혈로 죽어.”
“어쩌라고? 내가 그 정도로 나약해 보이냐? 피 좀 흘린다고 안 죽어. 딱지나 좀 앉겠지.”
“…….”
“간다. 잘 막아봐.”
한스가 다시 참철검술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테오도라도 화살집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발의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그 화살은 다른 것들보다 유독 굵고 촉이 날카로웠다.
“이 화살 한 발로 끝장을 내줄게.”
“하, 그러셔? 그거 기대되는데!”
탓! 한스가 발을 굴렀다. 앞으로 넘어질 듯 낮은 높이로 테오도라에게 달려든 한스. 그의 참철검은 적 방향이었다.
테오도라는 이미 메겨둔 화살을 강하게 당겼다. 그리고 시선의 경로상에 한스가 잡히자마자 시위를 놓았다.
투웅―!
이전보다 묵직하고 둔탁한 발사음과 함께 화살이 쏘아졌다. 화살촉은 한스를 향해 재빠르게 덤벼왔다.
한스는 다음 발을 구르면서 자신에게 날아드는 화살과 눈이 마주쳤다. 실제로는 눈이 아니라 화살촉이겠지만, 어쨌든 한스는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마주친 적(的)을 놓치는 법이 없는 한스였다.
츠팟!
한스의 참철검이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테오도라의 화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참철검술, 연풍참.”
“앗!”
“내가 언제 속동검격만 쓴다고 했냐? 이 망할 활잡이야.”
타닷! 한스는 다음 순간 발을 디뎌 땅에 부채꼴을 그렸다. 반쯤 돌아간 한스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에 테오도라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파밧!
음속이 바람을 돌파하는 소리와 함께.
쩍! 테오도라의 까마귀장궁에 큰 실금이 갔다. 실금은 삽시간에 점점 진해지더니 이내 까마귀장궁을 둘로 쪼개버렸다.
“이런……!”
“참철검술, 속동검격.”
“윽.”
털썩! 테오도라도 바닥에 쓰러졌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깔끔하게 베여 쓰러진 테오도라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스는 속동검격을 완벽하게 구사해 냈다. 아니, 사실 바네사나 사울 장로 등과 비교하면 완벽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체감하기에는 완벽 그 자체였다.
“후… 후하하! 봤냐?! 나도, 나도 한다면 한다고! 빌어먹을!”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바네사와 사울 장로는 이미 다음 적들과 맞붙고 있었다.
“…….”
괜히 뻘쭘해진 한스는 비틀거리며 자신도 전투에 참여하려 했다. 바로 그때, 한스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결국 피를 너무 많이 쏟아낸 탓이었다.
“으윽. 죽겠네. 누, 누가 나 좀…….”
한스는 정신을 잃고 엎어졌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화살을 몸에 몇 대나 박히고도 죽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한스의 승리였다.
* * *
이사키오스의 녹색 망치, 배틀라이트가 제이슨의 머리를 강타했다.
쾅!
그러나 제이슨은 뒤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머리가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손에는 백검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백검은 신비로운 힘이 담긴 아티팩트. 이사키오스의 배틀라이트가 정체불명의 녹색 물질을 뱉어내는 아티팩트라면, 백검은 모든 충격을 일정 부분 완화시키는 아티팩트다.
이사키오스는 배틀라이트를 거둬들였다. 그는 첫 공격 만에 제이슨의 백검이 가진 힘을 얼추 깨달았다.
“흠, 충격을 무효화하는 건가?”
“그 비슷하지.”
“까다로운 무기로군.”
“네놈의 그 망치만 할까.”
팟! 이사키오스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제이슨은 저놈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지만 이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윽?!”
배틀라이트의 녹색 물질과 연결된 자신의 몸이, 위로 딸려 올라간 것이다. 제이슨은 백검으로 끈적거리는 액체를 잘라내려 해봤지만 여전히 별 효과는 없었다.
부웅!
결국 제이슨은 높이 떠올랐다. 바람을 맞으며 제이슨은 오히려 이사키오스보다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다. 관성 때문이다.
이사키오스는 공중에서 망치를 들어 올렸다.
“배틀라이트, 출력 개방.”
치이이! 배틀라이트에서 녹색 연기가 증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앞으로 진격해 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제이슨의 머리를 내려쳤다.
쾅!!
제이슨은 빠른 상황 판단 능력으로 순간적으로 백검을 머리 옆에 갖다 댔다. 다행히 백검이 배틀라이트와 부딪히며 충격을 완화했다. 하지만.
치이이이! 배틀라이트에서 한 번 더 녹색 증기가 뿜어져 나오자 제이슨이 덜그럭거리며 밀렸다. 이사키오스가 외쳤다.
“아하, 보아하니 모든 충격을 전부 다 무효화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군.”
“윽!”
“땅속 깊이 박혀서 사흘만 자다 깨어나라. 출력 개방!”
퍽!
콰아앙!!
제이슨의 신형이 땅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먼지 바람을 일으켰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제이슨의 몸은 땅을 파고들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먼지 바람이 걷히고 드러난 제이슨의 모습은, 땅 위에 멀쩡히 쓰러져 있는 채였다.
제이슨은 끙끙거리면서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그의 몸 밑에 백검이 깔려 있었다.
“흥. 그 짧은 순간 만에 아티팩트로 충격을 막은 건가? 이 정도의 전투 센스라니. 평범한 기사가 아니로군, 너.”
“그래. 흑기사다.”
제이슨은 힘겹게 일어났다. 그와 연결되어 있던 녹색 물질은 어느새 떨어져 나간 뒤였다. 어느 정도 충격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탈락하는 모양이었다.
제이슨은 한 호흡을 뱉고 마저 말했다.
“아이젠 소가주님을 모시는.”
“…아하! 그 어린 소가주? 흥, 그런 놈을 모시는 거라면 네놈도 형편없을 게 뻔하군.”
“그러는 너희 대장은 뭐 대단한 실력자인가 보지?”
“요한 대장군님이야말로 훗날에 전쟁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지. 난 그분을 모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오늘 이 자리에 동행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동행? 그런 것치고 네놈은 후방에서 뒤치기나 맡고 있는 것 같은데.”
“…….”
제이슨의 가벼운 도발에 이사키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배틀라이트를 어깨에 걸쳐 들었다.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후미에서 내 뒤치기를 막고 있지 않나.”
“내가 흑기사이기 때문이다. 흑기사의 본질은 은밀 기동과 암살. 네놈처럼 커다란 무기를 들고 설치는 놈은 될 수 없지.”
“하! 그 세 치 혓바닥을 망치로 다져주마.”
이사키오스의 눈동자는 분노로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