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촤악!
바네사의 옆구리가 잘려 나갔다. 그녀를 벤 청검 미하일은 방심하지 않았다. 곧바로 뒤편에도 자신의 검 슈바인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미하일의 목덜미를 노리던 또 다른 바네사가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끙.”
미하일의 앞편에 있던 바네사는 일렁거리며 사라졌다. 그건 바네사의 잔상이었다.
미하일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자신의 길고 푸른 머리칼을 넘겨 보였다.
“이거, 처음 맞닥뜨렸을 땐 당황했는데 막상 싸워보니 별것 아닌 것 같소. 잔상이라 하였소? 나만 한 실력자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오. 더군다나.”
미하일은 바네사의 왼팔을 가리켰다. 거기에 왼팔은 없었다. 바네사는 오른팔의 외팔이, 블렌하임에게 당한 이후로는 낫지 않고 줄곧 그랬다.
사울 장로의 치료술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상처 부위를 빨리 아물게 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팔로는 내게 무리요. 외팔이가 둘이 된들 어차피 팔은 두 개 아니오? 난 이미 팔이 두 개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하하하.”
“야. 웃지 마.”
“음? 뭐라고 하셨소?”
“웃지 말라고. 기분 더러우니까.”
“하하. 이거야 원.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 정도 도발에…….”
흠칫! 순간 미하일은 노기를 느끼고 자세를 잡았다. 바네사의 하나 남은 팔에 힘이 꽉 쥐어지는 게 보였다.
추운 겨울날 껴입은 그녀의 팔 위로도 힘줄이 솟아오르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딜 감히 일개 공화국 평민 따위가. 공작가의 장녀인 내게 말을 함부로 하는 거지?”
“흥. 그것은 제국의 작위일 뿐. 공화국은 만민이 평등한 사회요. 계급사회에 물든 그대들의 어리석은…….”
“닥쳐.”
“뭐요?”
“입 닥치라고. 냄새나니까.”
슈왁! 바네사가 빠르게 발을 굴려 진격했다. 그녀가 연풍참으로 미하일의 그 잘난 머리칼을 싹둑 잘라버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미하일은 청검 슈바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슈바인은 세검(細劍). 얇디얇은 칼날 위로 서려 있는 미하일의 오러는 바네사의 참철검쯤은 가볍게 막을 수 있다는 듯 투기를 보였다.
그때, 미하일은 위화감을 눈치채고 등을 돌렸다.
‘분명 이 뒤에 본체가!’
바네사라면 앞을 노리는 척하고 뒤쪽에서 달려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하일의 뒤편에는 앞에서 달려드는 것과 똑같은 자세의 본체가 자리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미하일은 우선 앞쪽의 잔상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그는 슈바인의 칼끝을 예리하게 세워 바네사를 향해 찔러 넣었다.
푸욱! 옆구리를 찔린 바네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다음은 본체를……?!’
덜그럭. 그런데 칼이 빠져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잔상이라면 슈바인이 아무 문제 없이 뽑혀 나와야 정상인데?
미하일이 놀라서 앞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네사의 표정을 본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앞쪽이 본체였나!”
“정답.”
슈팟!!
바네사의 연풍참이 매섭게 미하일의 가슴팍을 갈랐다. 피가 방울방울 튀어오르고, 후두둑 떨어지는 불쾌한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으윽!”
그런데 오히려 바네사 쪽이 팔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오른손에 깊게 베인 상처가 나 있었다.
반면 미하일은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바네사가 자신의 갑옷을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마 거리가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후후.”
미하일이 피 묻은 손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미하일의 손톱이 날카롭게 바짝 서 있었다. 그 밑으로 살점과 피가 조금 묻어 있다. 창졸간에 미하일은 그 손톱으로 바네사의 오른손을 찢어놓은 것이다.
그 덕에 미하일은 몸통이 두 동강 나는 일 없이 멀쩡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땀방울을 닦으며 말했다.
“장정이 손톱을 길렀다고 너무 뭐라 하진 마시오. 이것도 다 전장에서의 생존 전략이니.”
“그런 생각 안 해. 하지만 좀 치사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야.”
“그건 인정하오. 하나, 전선에 치사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소?”
“아, 그것도 맞는 말이네.”
바네사는 참철검을 들었다. 그리고 미하일을 겨누었다.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미하일은 못 본 체하지 않았다.
“호오, 괜찮으시오? 대단하시구려. 힘줄을 아예 찢어놓았는데.”
“아무렇지 않은걸?”
“덜덜 떨고 있소만? 하하. 지금 항복을 선언한다면 고통스럽게 죽이진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정말이야?”
“그렇소. 공화국군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
“후우… 저, 정말 그렇다면.”
바네사가 조심스레 참철검을 내렸다. 미하일이 그녀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짓는 그때였다.
“???!!!”
별안간 가슴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기운. 그리고 한겨울에 차갑게 얼어붙은 칼날이 몸을 파고들어 오는 감각.
쑤우욱!
“커헉……!??”
파앗! 미하일의 가슴을 세로로 찢으며, 그리고 철제 갑옷을 가볍게 찢으며 튀어나온 것은 바네사의 참철검이었다. 등 뒤에서부터 찔러 들어온 것이다.
미하일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틈에? 본체는 바로 저기 있는데!
그러나. 미하일이 바라본 ‘본체’는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선에 치사하고 말고 없다고 했지?”
“컥… 어떻게…….”
“간단해. 난 잔상을 하나만 만들 수 있다고 말한 적 없거든?”
“두, 두 개였단 말인가…….”
“응.”
털썩! 바네사가 참철검을 뽑자 미하일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 세로로 긴 구멍이 나 있었다.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고통의 구멍이었다.
“와, 완벽하게 당했군…….”
“남길 말은?”
“없소. 공화국군은 패배를 인정하는 법. 바라건대 목을 베어주시오.”
“그래. 정말 그걸 바란다면.”
바네사는 최소한의 예의를 담아 참철검에 그린 오러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슉!
바람을 가르고 한순간에 미하일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참철검술 4성, 속동검격.”
“컥.”
미하일의 머리가 깔끔하게 베인 채로 땅에 떨어져 뒹굴었다.
바네사는 지난 한 달 사이 어느새 참철검술 4성에 올라 있었다. 모니카를 가르치다 보니 그녀 스스로도 성장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속동검격의 속도는 아직 조금 미숙했지만, 미하일의 목을 완벽하게 떨어뜨릴 정도였으니 정확도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
바네사는 목이 달아난 미하일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만든 이 참혹한 광경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이들이라고 사정 다르지 않다.
“크악!”
“윽, 이 공화국 놈들!”
“죽어라, 제국의 머저리들아!”
베고, 베이고,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지금 바네사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외면할 길은 없다. 선전포고란 그런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바네사는 미하일의 청검 슈바인에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푸르고 신비로워 보이는 검이다.
하지만 그의 검은 싸우지 않는 기간이 길수록 강해지는 무기라 했다. 그렇다면 바네사에게는 필요치 않다. 그녀가 앞으로 싸우지 않는 기간은 없을 테니까.
“자, 다른 사람들 도와주러 가볼까.”
* * *
“사신강림, 강망태신(江望太神).”
강망태신은 사신강림을 열 배 이상의 힘으로 끌어내는 결사신권의 비술 중 하나. 단, 지속 시간이 끝나면 반동은 그 100배에 달하는 고통으로 찾아온다.
아이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강망태신을 사용했다. 전투도끼 파라슈를 쥐고 있던 요한은 아이젠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알지 못했으나.
화아아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투기를 보고 만만치 않겠다는 것쯤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그것이 네놈의 비기인가 보군.”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나도 내 힘을 다해줘야겠지?”
“그러시든가.”
요한이 파라슈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번뜩이는 눈동자로 외쳤다.
“전능하신 힘을 쓰소서!”
그러자 파라슈에 그려져 있던 음각의 용에 마치 쇳물이 부어지듯 도끼날이 검붉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젠도 그와 얼굴을 마주한 채 자세를 잡고 온몸에 내기를 담았다.
아이젠의 내공이 큰 낙차 폭으로 가라앉았다. 요한이 아이젠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음 순간, 아이젠은 지체하지 않고 주먹에 회혼을 불어넣어 요한의 명치를 향해 휘둘렀다.
‘결사신권, 철권(鐵拳)!’
회혼은 홍화와 그린 오러를 섞은 날카로운 내공. 요한은 명치에 공격을 허용했고, 이변이 없는 한 요한의 갈비뼈는 박살이 나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덥석! 아이젠의 주먹이 요한의 갑옷 위에 부딪히는 그 짧은 순간, 요한이 아이젠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젠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은 팔 하나부터인가.”
“……!”
촤악!!
파라슈가 크게 휘둘리며 아이젠의 어깨를 베었다. 파라슈는 쥔 힘을 제곱으로 받아들이는 아티팩트. 그 탓에 아이젠은 마치 어깨에 선산이라도 얹은 듯한 무게감을 느꼈다.
‘윽!’
고통스러워할 겨를이 없다. 이대로 관성을 허용한다면 아이젠의 팔은 잘려 나갈 것이다.
찰나 상황 판단을 끝낸 아이젠은 다리를 박차 몸을 한 바퀴 휘돌았다. 마치 일전에 아이젠이 게오르크를 공격했을 때 게오르크가 그리했던 것처럼.
부웅!
풍차처럼 몸을 돌린 아이젠은 여전히 붙들려 있는 오른팔을 비틀어 반대로 요한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교차해서 쥐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음?!”
“결사신권―”
“이거 놓으―”
“박살(撲殺)!”
콰직! 아이젠의 주먹이 요한의 안면을 강타했다. 코피를 쏟아내던 요한은 한순간 의식을 잃어 초점이 사라졌지만, 불과 1초도 지나지 않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아이젠을 밀쳐냈다.
반보 정도 밀려난 아이젠을 향해 요한은 파라슈를 뻗었다. 목봉 부위로 아이젠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아이젠은 윽 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 애송이 놈!”
팟! 요한의 공격은 쉼 없었다. 번쩍 날아든 요한이 휘두르기 직전인 파라슈는 태산만큼 거대해 보였다.
“건방진 애송이 놈을 분쇄해라, 파라슈!”
부웅!!! 태풍이 부는 듯한 착각. 아이젠은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요한의 목덜미를 와락 붙잡았다. 그리고 하늘 높이 쳐들어 바닥에 처박았다.
콰앙!!
“으윽!!”
그린우드 영지의 흙바닥이 쩌적 하고 갈라졌다. 등부터 내리박힌 요한은 고통에 겨워했다.
아이젠은 그 위로 주먹을 높이 쳐 들었고.
“이놈……!”
요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에 박살을 먹였다.
“엇!”
쾅!!!
쩌저저적!!
요한을 중심으로 영지의 땅이 열십자 모양으로 갈라졌다. 투둑― 요한의 앞니가 하나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피를 토한 요한은 숭숭 새는 치아 사이로 숨을 크게 내뱉었고,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파라슈가 들려 있었다.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았다. 무도인이 무기를 놓으면 안 된다는 아이젠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크으, 이대로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
쾅!! 아이젠의 등이 활처럼 꺾였다. 요한이 파라슈로 아이젠의 등을 내려쳤기 때문이다.
“큭!”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이젠은 의기양양한 요한의 표정을 보며 심사가 뒤틀렸다.
“뭘 웃고 있어.”
이제 곧 울분으로 물들 텐데.
‘결사신권, 쇄고(碎固)!’
아이젠은 엎드린 채로 요한의 오른발에 쇄고를 먹였다.
파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