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서걱!!
요한은 등에 사선으로 비끄러매고 있던 전투도끼를 창졸간에 꺼내, 자신에게 달려드는 문지기의 몸을 싹둑 잘라버렸다.
전투도끼의 무게가 적지 않을진대 마치 칼로 벤 것처럼 가볍고 예리한 움직임이었다.
“커헉……!”
스르륵― 탁. 몸이 두 동강 나며 바닥에 떨어진 문지기. 그를 지켜보던 그린우드의 다른 식솔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린우드의 기사 몇몇이 요한에게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요한의 등 뒤에 서 있던 병졸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공화국 놈들 따위가 습격해 온단 말이냐!”
“그린우드 공작가문, 아닌가?”
“그걸 알면서도 이 행패라니! 전부 무기를 들어라!”
스르릉! 스릉! 기사들이 저마다의 참철검 또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일제히 요한을 향해 돌진해 왔다.
요한은 지루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겼다.
싹둑! 서걱! 쉬익!
“컥!”
“크악!”
파생검술깨나 익혔다 싶은 기사들조차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요한의 움직임은 그의 나이가 마흔일곱이라곤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매서웠다.
“너희한텐 볼일 없다. 무의미하게 목숨 버리지 말고 책임자를 불러와.”
“채, 책임자?”
“뭘 모르는 척이냐. 얼마 전에 소가주로 즉위했다는 아이젠 폰 그린우드를 데려오란 말이다.”
“이, 이놈……! 소가주님께 무슨 짓을 하려고! 절대 그럴 수 없다!”
남은 기사들은 눈빛을 바꾸고 더욱 임전태세를 취했다. 요한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그들을 베어버리려는 그때였다.
“이 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지랄들이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서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은 그린우드 가문의 셋째, 한스였다.
한스의 얼굴을 본 요한은 뒤에 서 있던 한 명을 불렀다.
“저놈이 아이젠이냐?”
“용모파기 상으로는 아닙니다.”
“그럼 필요 없다. 죽이지.”
“분부대로.”
요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이젠은 사울 장로, 바네사와 함께 그린우드 가문의 개문까지 걸어 나왔다. 지나오는 길마다 바닥에 부상 입은 사람들이나 죽은 시체가 보였다.
바네사가 눈을 돌리자 아이젠이 말했다.
“눈 돌리지 마세요.”
“아이젠… 아니, 소가주님.”
“기억에 담아놓으세요. 그리고 복수하는 겁니다.”
“……! 알겠습니다.”
저벅저벅! 그렇게 그들이 개문 앞까지 나왔다. 그런데 문지기나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처음 보는 갑옷을 입은 병졸 약 서른 명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저들은……!”
사울 장로가 반응하자 아이젠이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죠?”
“공화국… 리타스나트 공화국의 군대입니다. 저들이 왜 여기에.”
“그렇군요.”
삽시간에 아이젠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공화국에서 바위를 쏘아 이곳 영지를 초토화한 것이다. 전쟁이라도 벌일 셈이 아니라면 그들이 이런 일을 할 이유는 없다.
그래. 전쟁이라도 벌일 셈이 아니라면.
“커억. 윽.”
아이젠 일행이 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까지 다가서자 한스가 고전하는 것이 보였다.
한스는 코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검은색 활을 들고 있는 공화국군 간부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이름은 테오도라. 그녀가 든 검은 활에는 화살이 메겨져 있지 않았다. 아이젠이 생각했다.
‘화살도 없이 한스를 저 지경으로 만든 건가?’
한스도 약하지 않다. 그의 참철검술도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죽사발을 냈다는 건 테오도라의 실력이 꽤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테오도라는 아이젠이 등장하자 뒤에 서 있던 요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요한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고, 테오도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요한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한스가 반응했다.
“거, 거기 못 서! 큭.”
비틀거리던 한스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듯 보였다. 아이젠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아이젠. 아니, 소가주님.”
“한스. 뒤로 물러나 있어.”
“…윽. 제길.”
결국 한스도 사울 장로의 뒤편으로 옮겨 갔다.
구도가 묘했다. 아이젠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사울 장로와 바네사, 그리고 한스가 전부.
반면 요한의 뒤에는 테오도라를 포함한 세 간부와 스물다섯의 병졸들이 있었다. 본디 요한의 밑에 있던 간부는 넷이었지만 하나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사실을 아이젠 일행이 알아차릴 리는 없었다.
요한의 뒤에 서 있던 병졸 하나가 말했다.
“저자가 소가주 아이젠입니다.”
“어린아이로군.”
“올해로 열일곱일 것입니다.”
“그래. 어린아이야.”
아이젠은 조금 전부터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참고 있다. 초인적인 힘으로 참아낸 아이젠은 요한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래, 다들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유언이나 들어볼까?”
“하하. 유언이라.”
요한도 한 발짝 다가왔다. 그들의 거리가 좁았다. 서로에게 위협이 될 만한 거리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요한이 아이젠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그러더니 그 감상평을 말했다.
“제법 단련한 몸이군. 훌륭해. 열일곱으로 보긴 어렵겠는걸.”
“어쭙잖은 사탕발림은 관두지.”
“사탕발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열일곱치곤 대단하단 거지, 객관적으로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그 정도의 몸이라면 공화국군에는 쌔고 쌨어.”
요한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말했다.
“소가주의 용모가 다소 실망스럽다만… 어쨌든 할 말은 해야겠지. 나는 리타스나트 공화국의 대장군 요한!!! 공화국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소국 탄탈리스에 전쟁을 선포한다!!!”
쩌렁쩌렁!
요한의 목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모두가 긴장감에 소름이 바싹 돋았고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아이젠이 느끼는 감각은 조금은 다른 재질이었다.
‘전쟁이라.’
전쟁이라면 사실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탄탈리스 제국과 리타스나트 공화국은 이미 전쟁 중인 것이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냉전에 불과하지만 중소규모의 전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옥사비나가 다시 찬탈당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본격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공화국의 결의가 보이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아이젠은.
“좋다.”
전쟁을 받아들일 준비가 만발이었다.
“받아주마. 그 선전포고.”
슈욱!
그때 아이젠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어느새 테오도라가 자신의 검은 활에 화살을 메기고 날린 것이다.
테오도라의 화살은 마치 바람의 저항을 일절 받지 않는 것처럼 날아왔다. 그렇기에 보통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화살을, 아이젠은.
탁!
가볍게 그것을 붙잡았다. 화살도 검은색이었다.
검은색. 아이젠은 왠지 간츠펠트가 떠올랐지만 이건 단순히 색이 검을 뿐이었다.
‘빠른데. 제법.’
그 순간, 요한의 등 뒤에 서 있던 나머지 간부 중 두 명이 펄쩍 뛰어올라 아이젠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적검의 레온, 청검의 미하일. 그것이 그들의 이명과 이름이었다. 이명처럼 그들의 무기는 붉고 푸르렀다.
“죽어라, 애송이 소가주!”
마침내 그들의 칼날이 아이젠을 찢을 듯 덤벼오는 찰나까지, 아이젠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채앵!
레온과 미하일의 검을 막아낸 것은 사울 장로와 바네사였다. 그들은 분노가 일렁이는 얼굴로 각자의 참철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감히 그린우드의 소가주에게 검을 휘두르는 머저리들이 있다니. 이 장로 사울, 탄식을 금할 길이 없구나.”
“소가주님? 이 둘은 저희가 상대하게 허락해 주시죠.”
굳이 아이젠의 허락이 없어도 될 것 같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공화국군 병졸들이 덤벼왔다.
“와아아아!”
“제국 놈들을 죽여 버리자!”
“죽여! 갈기갈기 찢어버려!”
그때 영지 안쪽에서부터 그린우드의 기사들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선봉장이 외쳤다.
“제국을 위협하는 공화국의 개들이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그다음 펼쳐진 결과는 자명했다.
채앵! 카앙! 채앵!
마치 아사리판이 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칼날을 휘두르는 그들.
한편 테오도라가 다시 화살을 메길 때, 한스가 그녀에게 덤벼들어 막았다.
“넌 나랑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이 개 같은 년!”
아이젠과 요한은 서로를 겸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젠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우리끼리 해야겠는데?”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겠느냐? 나의 이 전투도끼 파라슈의 무게를.”
“응. 가벼워 보이는데?”
“흥. 그렇다면, 전쟁이다!”
팟! 그렇게 아이젠과 요한도 서로의 자웅을 겨루기 시작했다.
* * *
한편,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던 그린우드 영지의 최후미.
그곳은 고요했다. 별채 등 하인들과 기사들이 머무르는 집안은 텅텅 빈 상태. 정문에서의 일 때문에 다들 임전의 자세로 그리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그 틈을 타, 공화국 대장군 요한의 간부 중 한 명인 이사키오스가 등장했다. 이사키오스는 자신의 녹색 망치를 든 채로, 뒤를 따르는 병졸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기습 작전을 시작한다. 준비한 대로만 실행해.”
“예!”
요한과 나머지 세 간부가 정문에서 흩뜨려 놓고 있을 때 후미를 습격해 샌드위치 작전을 펼치는 것. 그것이 공화국군의 전술이었다. 이사키오스는 지체 없이 발을 굴렸다.
그 순간.
“어?”
정문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남자 하인 중 하나가, 부리나케 그곳으로 향하려다 이사키오스 일행과 맞닥뜨렸다.
하인은 잠시 이사키오스를 멀뚱멀뚱 보다가, 이내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 당신들 누구야!”
“죽어라.”
이사키오스가 주저 없이 자신의 녹색 망치를 휘두르려는 그 순간이었다.
채앵!
이사키오스의 앞에 무언가가 날아들었고, 그는 반사적으로 녹색 망치의 궤도를 꺾어 그것을 막아냈다.
공격을 가한 것은 다름 아닌 흑기사 제이슨이었다. 그는 드물게도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채로 이사키오스를 노려보았다.
“누구지? 네놈은.”
이사키오스가 물었다. 그의 정보에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제이슨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슨이 말했다.
“사람들에게 후미에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라.”
“예, 예?”
제이슨은 남자 하인에게 지시했다. 남자 하인은 제이슨도 초면이었기에 우왕좌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제이슨이 단호하게 명했다.
“어서 가라. 소가주님의 심복이 시켰다고 알려.”
“아, 예!”
그렇게 남자 하인이 떠나가고, 이사키오스가 그를 쫓으려 할 때 제이슨이 막아섰다. 제이슨의 백검이 그 칼날을 예리하게 드러냈다.
“어딜 가나. 우린 우리끼리의 싸움을 해야지.”
“네놈 같은 녀석 상대할 시간 없다. 기사인가?”
“그렇다. 정확히는 흑기사이다만.”
제이슨이 백검을 사선으로 들어 올렸다. 이사키오스는 눈썹을 치켜뜨며 의문을 표했다.
“‘흑’기사라기엔, 검은 지나치게 ‘백색’이로군.”
“그러는 네놈의 그 망치는 ‘녹색’이로구나. 그린우드 가문의 색이야. …기분이 나쁜걸.”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공화국군 놈들일 터. 이렇게 습격까지 감행했다는 건 선전포고라도 했단 소리겠지?”
“…그렇다.”
이사키오스가 저항 없이 수긍하자 제이슨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커버넌트 오러를 활성화했다.
“그렇다면 살려 보낼 수야 없지. 덤벼라.”
“…훗.”
제이슨이 도발하자 이사키오스가 훗 하고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군, 흑기사.”
이사키오스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기사 한 명쯤이야 손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녹색 망치.”
그런데 그것은 제이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런 곳에서 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젠 쪽이었다.
‘주인님. 이놈들 정도는 제가 붙잡고 있겠습니다.’
당신은 그곳에서 많은 적들을 파괴해 주십시오.
팟!
제이슨의 발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