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선전포고 】
그린우드 영지 바깥, 수림의 풍경이 펼쳐져 있는 무명산(無名山)의 어딘가.
나무를 온통 베어 밑동만 남은 넓은 공터에, 사람들은 서 있었다. 대략 서른 명의 사람들. 그들은 간츠펠트 때처럼 가면 같은 것을 쓰고 있진 않았다. 얼굴은 모두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시민들과는 어딘가 조형이 달랐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 관리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듯한 푸석푸석한 얼굴, 전체적으로 옆통이 큰 근육질 몸.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제국의 양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화국의 갑옷. 회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로 포인트를 준 것이 특징인 갑옷이었다. 붉은 십자가는 공화국의 상징이다. 움직이기 편하게 관절마다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갑옷의 특기할 만한 점이었다.
“여기가 그린우드 공작 가문인가.”
그들의 가장 앞, 투구를 쓰지 않은 민머리 남자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일명 대장군 요한이라 불리는 몸이 바로 그였다.
요한을 중심으로 둘러싼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은 요한이 부리는 네 명의 간부들이었다.
“예, 요한 대장군님.”
“그 유명한 제국의 전쟁영웅, 테오발트 폰 그린우드의 가문이라. 생각보다는 영토가 작군.”
“현재 역적 테오발트는 최전선 옥사비나를 되찾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식통에 의하면 이번에 즉위한 소가주는 검을 다루지도 못하는 반푼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거야 원, 실력이 아니라 그냥 즉위할 때가 돼서 즉위한 모양이지? 이래서 귀족들이란…….”
표면적으로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리타스나트 공화국 입장에서 귀족들이란 사치나 부릴 줄 아는 멍청이들에 불과했다.
물론, 공화국에도 구분만 되어 있지 않을 뿐 노예나 귀족이라 부를 만한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말이다.
대장군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이내 번뜩 눈을 뜨더니 그린우드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시작하지. 투석기 준비.”
“예. 투석기 준비!”
“투석기 준비!”
“투석기 준비!”
대장군 요한의 지시에, 간부가 아닌 다른 병졸들이 숲속에 감춰두었던 무기를 꺼내왔다.
그 무기란 바로 투석기. 지름이 2m나 되는 바위조차 거뜬히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하고 튼튼한 강철 투석기였다. 그런 커다란 강철 투석기가 무려 열두 대나 되었다.
끼릭― 끼릭―
무명산의 비탈길 탓에 흔들거리는 투석기들이 마침내 자리에 배치되자, 요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발사.”
“발사!”
퍼엉!
그렇게 열두 대의 투석기가, 열두 개의 바위를 포탄처럼 쏘았다.
그린우드 영지를 목표물 삼아.
* * *
“핫! 하! 핫!”
아이젠이 기사학교에 도착했을 때, 기사 생도들이 수련 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팔짱 낀 채 지켜보던 아이젠은 감회가 새로웠다.
‘얼마 전까진 나도 여기 있었는데.’
아이젠은 생도들을 상대로는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해 사울 장로 및 바네사와 겨룬 것이었지만, 어쨌든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아이젠이었다.
아이젠이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생도 중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눈치채고 이쪽을 향해 인사해 왔다.
“아이젠 소가주님! 안녕하십니까!”
“앗! 아이젠 소가주님이시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젠은 그들에게 대충 손짓해 주었다. 목검을 쥔 그들의 손에는 아직 굳은살도 제대로 박여 있지 않을 것이다.
‘더 성장해라. 내 미래의 실전 수련치들아.’
아이젠이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다급하고 불규칙적인 그 발소리의 주인은 아이젠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소가주니…….”
덥석!
부웅!
아이젠은 자신의 이름이 미처 다 불리기도 전에 상대의 옷깃을 잡아 업어치기 한판을 날렸다. 공중에 붕 뜬 상대는 짧은 시간 만에 자세를 잡더니.
타닥!
바닥 위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상대의 정체는 바로 모니카였다. 그녀는 놀랐는지 토끼눈을 뜨고 있었다.
“깜짝이야!”
“이야, 제법 반사신경이 좋아졌는데? 모니카.”
“소가주님, 놀랐잖아요. 보자마자 업어치기부터 하시기 있기예요?”
“내 맘이지. 내가 소가준데.”
이렇게 나오면 모니카는 할 말이 없다. 그녀와 대충 대화를 나눈 아이젠은, 모니카의 뒤편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익숙한 얼굴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로 사울 장로였다.
사울 장로는 아이젠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소가주님.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유야 뭐, 아시잖아요.”
“허허.”
사울 장로는 대답을 회피하는 듯 눈을 피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아이젠이 몸을 옮겼다.
“이쯤 되면 이제 좀 허락해 주시죠? 옥사비나, 저도 가겠습니다.”
“안 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장로들의 반대가 심합니다.”
“그럼 그 장로분들 좀 만나게 해주세요. 뭐 만나러 갈 때마다 자리에 없대. 지금도 옆 마을에 가셨다면서요. 솔직히 말하세요, 일부러 피하는 거죠?”
“크흠흠.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럼 하다못해 사울 장로가 가주님한테 쪽지라도 좀 써줘요. 소가주가 참전을 원한다고.”
“커험, 제가 감히 무슨 권한으로 그리한단 말입니까. 테오발트 가주님께선 현재 이스보셋 장로와 함께 옥사비나를 탈환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계십니다. 더 신경 쓰실 일 만들지 않도록 아이젠 소가주님께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시지요.”
“쳇.”
결국 이번에도 별수 없나, 아이젠이 드물게도 무기력하게 물러나려는 그 순간이었다.
“……?”
싸늘하다.
한기가 몰아닥쳤다. 한겨울이라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는 한기이지만, 아이젠에게 닥쳐온 이것은 추위보다는 소름이었다.
아이젠이 갑자기 허공을 올려다보자, 사울 장로와 모니카가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소가주님.”
“…다들.”
“예?”
“다들 대피하라고 지시하세요, 사울 장로.”
아이젠이 급히 온몸에 무혈신공을 불어넣었다. 뒤이어 주저 없이 결사신권의 묘리를 끌어내, 두 주먹에 회혼을 듬뿍 담았다.
“얼른!”
아이젠의 몸 위로 회혼이 넘실거리자, 사울 장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화급히 뒤를 돌아 생도들에게 외쳤다.
“다들 피하거라!”
그때였다.
펄쩍! 아이젠이 높이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하늘 저 멀리서 거대한 바위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저게 무슨!”
모니카가 외쳤다. 아이젠은 그사이 완벽하게 운공이 완료된 결사신권을 두 주먹에 담고.
회혼을 발산했다.
‘결사신권, 박살(撲殺)!’
아이젠의 주먹이 향하는 것은 거대한 바위 위였다.
콰아아앙!!!
우지지직!
아이젠의 박살 한 방에 거대한 바위에 실금이 가더니 부서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금은 점점 바위의 중심부까지 나아가더니, 이내 쩌적― 하는 소릴 내며 바위가 분쇄됐다.
그러나 그것 하나뿐이었다. 바위는 하나가 아니었다. 연달아 날아온 수 개의 바위가 그린우드 영지에 떨어지며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크악!”
“으헉!”
“살려줘!”
사울 장로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젊은 생도들이 바위에 깔려 죽거나 잔해에 맞아 죽었다.
사울 장로는 모니카와 근처 가까이 있던 다른 생도들을 뒤로 보호하고, 자신의 오러를 펼쳤다.
“파생검술, 커버넌트 오러 도미네이션.”
그러자 사울 장로의 몸에서 오러가 펼쳐져 나왔다. 오러 실드나 오러 아머처럼 몸 위에 두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오러로 된 공간을 만들어버리는 기술이었다. 지름은 대략 1m 정도로 짧았지만 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공격은 통하지 않게 된다.
본디 이 기술은 참철검술 및 파생검술 6성에 오른 자나 쓸 수 있는 비기인데, 겨우 바위 따위를 막기 위해 쓰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던 사울이었다.
팅팅팅! 바위 잔해들이 사울 장로가 펼친 오러 도미네이션에 맞고 튕겨 나갔다.
“소가주님!”
사울 장로의 외침에, 허공에 붕 떠 있던 아이젠이 그를 돌아보았다. 사울 장로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나머지 인원들은 자신이 지키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아이젠은 그가 펼친 오러 도미네이션을 보고 수긍했다.
‘나랑 비슷한 기술을 쓰시네.’
아이젠의 결사신권이 7성에 오르게 되면 비슷한 권법을 구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저런 형태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이젠은 안심하고 다른 날아오는 바위들에게로 눈을 놀렸다. 마음 같아선 나교아(拏鮫牙)로 모조리 낚아채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바위가 너무 컸다. 하릴없이 아이젠은 하나하나 주먹으로 맞혀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펑! 퍼엉! 콰앙!
바위들이 터져 나가고, 마침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던 잔해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화아아…….
먼지 바람이 크게 불었다. 상황은 처참했다. 아무리 아이젠이라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속수무책에서 모두를 살려낼 순 없는 법이다. 이미 죽은 생도들은 어쩔 수 없다손 치고, 다른 식솔들을 살리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모니카, 좀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소가주님.”
“다친 사람들을 데리고 의원으로 데려가.”
“네!”
모니카는 저항 없이 이동했다. 아이젠이 사울 장로에게로 눈을 돌리는데, 그 뒤편에서 바네사가 반쯤 무너진 기사학교 건물로부터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소가주님, 사울 장로님.”
“바네사 누님. 무사하셨네요.”
아이젠은 사울 장로와 바네사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지시했다.
“두 분은 절 따라오세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찾아야죠. 범인.”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공작가를 상대로 이런 짓을 저질러 왔는지, 아이젠은 봐야 했다. 아이젠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일전에도 길버트가 쏜 쇠뇌의 궤도를 정확히 계산해 냈던 그가 아닌가.
‘이 위치라면.’
각도 상으로 보았을 때, 영지 바깥에 있는 숲으로부터 날아온 바위임이 틀림없었다. 아이젠은 지체 없이 그리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하필 장로들이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사울 장로는 심란했지만 별도리가 없어 아이젠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아이젠이 말했다.
“어서 가죠.”
* * *
한편, 그린우드 공작가의 정면 개문.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도, 식솔들도, 기사들도, 갑작스레 닥쳐온 재난에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척! 일단의 무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대장군 요한은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문지기들에게 다가갔다.
“……?”
문지기들은 무슨 영문인가 싶어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들의 갑옷 가슴팍에 달려 있는 붉은 십자가를 보았다. 문지기들의 표정이 변모했다.
“고, 공화국?!”
“공화국 놈들이다! 공화국이 여긴 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들에게, 요한은 주저 없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나 원. 공작가의 기사들이라길래 뭐가 좀 다른가 했더니만. 겨우 바위 몇 개 떨어졌다고 이 소란들인가.”
“뭐라고? 그, 그렇다면 설마 너희가 장본인이냐?!”
“그렇다. 난 리타스나트 공화국의 대령이자 돌격부대의 지휘관인 요한이라고 한다. 너희의 책임자는 어디 있지?”
“이, 이노옴!”
요한의 질문을 무시하고 문지기가 달려들었다. 그 대가는 처참했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