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아이젠은 주저앉은 채로 헐떡거리며 사울 장로를 올려다보았다.
“장로.”
“아니. 괘, 괜찮으십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좀 업어주시겠어요?”
“…허허. 허허, 참. 이거 여러 방면으로 놀라게 하십니다그려.”
그리 말하면서도 사울 장로는 등을 내주었다. 아이젠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업혔다. 그제야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이젠은 6량 앞쪽 열차 칸을 돌아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간츠펠트의 잔당이 있을지도 몰라요. 앞쪽 칸에.”
“하긴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가 어서 가서…….”
사울 장로가 뭔가 말하려는 때,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젠의 곁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벼락처럼 나타난 그는 다름 아닌 마테오 백작이었다.
마테오 백작은 등장하자마자 아이젠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가주님, 무탈하신지요…….”
“마테오 백작님? 어느 틈에.”
“잔당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조금 전에 처리하고 오는 길이니까요.”
간츠펠트의 잔당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한 명뿐, 바로 열차 차장실을 점거했던 벌랜디검이었다. 열차가 멈추자마자 마테오 백작은 바로 차장실로 순간이동 하여 그곳에 앉아 있던 벌랜디검을 바싹 구워 버렸다.
지금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검게 변한 시체뿐일 것이다.
“끼어들지 마시라니까.”
“싸움을 끝내셨으니, 뒤처리는 저 같은 사람이 해야지요. 허허.”
마테오 백작의 너스레에 아이젠도 피식 웃었다. 그때 끊긴 7량 뒤에 길게 나 있는 나팔관 위로, 무언가가 탈탈거리며 느린 속도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그레고리가 끊어놓은 8량부터 12량까지의 열차였다.
“좀 더 힘내서 달린다! 알았나!”
“예!”
끊긴 열차에 줄을 달고 끄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놓친 앞칸을 따라잡으려 인력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때 아이젠 등이 시야에 들어올 위치까지 보이자, 그들이 멈췄다. 그러자 열차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린우드 가문의 식솔 및 하인들.
그린우드 방계의 방주들, 살아남은 자제들.
그리고 다른 장로들, 모니카, 제이슨(아이젠에게만 보였지만)까지.
그들은 잠시 멈춰 서서 상황 파악을 하기에 나섰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진 모르겠지만 열차 6량은 뚜껑이 날아가 버렸고, 적으로 보이는 도깨비 뿔 가면을 쓴 사람의 사체들이 즐비해 있다.
“…….”
가장 앞에서 기사들에게 열차 끌기를 지시하던 기사장은, 등을 돌려 식솔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리서도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젠 소가주님께 대하여, 전원 경례!!”
답은 간단했다. 아이젠과 사울 장로,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정리한 것이다.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아이젠을 소가주로서 인정하지 않던 사람들도, 장로들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척!!
그들은 일제히 아이젠을 향해 경례를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젠은.
‘이거 참. 장관이군.’
짧은 평을 마음속으로 남길 따름이었다.
“소가주님!”
멀리서 모니카가 달려왔다. 모니카는 사울 장로의 등에 업혀 있던 아이젠을 한 품에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아,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털썩!
아이젠은 기절했다.
사울 장로의 등은 참 따뜻했다.
그리고, 아이젠이 소가주에 즉위하고 한 달이 지났다.
* * *
아이젠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뜬 지가 벌써 한 달째인데 아직 어색하게 느껴졌다. 소가주만을 위해 따로 마련된 소가주실의 침대는 촉감이 부드럽고 잠이 잘 오는 편이었다.
“후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볍게 무혈신공을 운공한 아이젠은, 5성 상위에 올라 있는 현재 자신의 무공 수준에 만족했다. 하지만 기꺼워할 만큼의 높은 수치는 아니었다. 아직도 생사경까지 올라서려면 갈 길이 태산이었으므로.
“생사경이라.”
아이젠이 이전 생에 올랐던 경지는 8성. 현경의 경지였다. 7성이면 화경, 6성이면 초절정, 5성이면 절정이니, 이제 아이젠은 벌써 절정, 그것도 초절정 상위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열일곱의 나이에.
어느덧 해가 바뀌고도 일주일이 더 지났다. 아이젠은 이제 열일곱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이른 나이에 벌써 절정이 된 것이다.
절정 상위 수준의 무공을 갖추면 어떻게 되는가. 금강을 부수고 지축을 뒤흔드는 수준이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생사경으로 올라서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아이젠은 이 정도로 안위할 인물이 아니었다.
‘열일곱에 절정?’
물론 대단하긴 하지만, 충분치 않다.
“가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이젠은 소가주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소가주실 앞에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푹 숙였다.
“아이젠 소가주님, 기침하셨습니까!”
“…….”
쩌렁쩌렁 복도가 울릴 정도의 목소리에 아이젠은 아직도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하기야 소가주가 되기 전에도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아이젠은 자신이 처음 전생을 각성했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땐 모니카가 여기 있었는데.’
모니카는 이제 더 이상 아이젠을 모시는 하인이 아니다.
아이젠은 지난 한 달 중 앞선 2주 동안은 소가주실 밖으로 나와보지도 못했다. 이유는 강망태신의 여파 때문이었다.
요아힘, 게오르크, 간츠펠트까지, 아이젠의 최고 신체 강화 기술인 사신강림 강망태신을 물 쓰듯 써버린 아이젠은, 닥쳐온 반동 탓에 2주간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때마다 칼로 온몸을 찢는 기분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 기억은 참 끔찍했지.’
아이젠은 하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주곤 복도를 걸었다. 복도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하인들이 빈틈없이 줄 서 있었는데, 이 이른 아침부터 왜 다들 일어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이젠이었다.
“소가주라고 대우가 달라지는구만.”
앞선 2주간 강망태신의 여파를 겪은 아이젠은 업보라고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수련도 할 수 없었기에 그것만큼은 좀이 쑤셔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채앵!
“어머, 소가주님. 반사신경이 좋으시네요?”
이따금 이렇게 바네사가 표홀히 나타나 아이젠에게 참철검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장난도 아니고 진검으로 하는 짓이었다.
아이젠이 아이기스에 바네사의 참철검을 걸쳐 막긴 했지만, 주변에 서 있던 하인 중 몇몇은 화들짝 놀랐다. 소가주에게 저런 짓을 하다니, 역모죄로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 바네사 공자님!”
“소가주님께 무슨 짓이십니까!”
“다들 그냥 가만 계세요.”
하인들이 소리치자 아이젠이 제지했다. 아이젠은 바네사에게 쓸데없는 짓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역모죄로 처형해 버리면 누구 좋으라고?
아이젠에게는 실전 수련치를 쌓아줄 상대만 하나 잃는 셈이었다.
“누님, 안 피곤하세요? 이렇게 아침 일찍.”
“뭘요. 기사학교에 가는 길인데, 같이 안 가시겠어요?”
기사학교라. 거기서 수련을 했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기사학교의 수습기사들이나 웬만한 기사들을 상대로는 이제 더 이상 실전 수련치가 쌓이지 않는 아이젠이었기에, 구태여 그곳에 갈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카인 등의 현 상황은 어떤지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모니카는요? 잘 지내고 있죠?”
모니카는 소가주인 아이젠의 특권으로 기사학교에 입학했다. 더 이상 아이젠을 모시는 하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모니카를 가르치는 것은 사울 장로가 아니라 바네사였지만, 다른 기사 생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둔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충분한 수련 경험이 될 것이었다.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하던걸요? 소가주님.”
“한마디 하실 때마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그만하시면 안 됩니까? 그리고 왜 존댓말이에요.”
“어머, 소가주님께 예를 갖췄을 뿐인걸요? 익숙해지셔야죠, 소가주님.”
“아이고, 참나.”
아이젠이 소가주에 즉위한 이후, 가문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기사들이, 자신들이 배우는 파생검술에 마치 방계처럼 응용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네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참철검가라는 이명 자체가 바뀌는 일은 없었으나, 그래도 뭔가 융통성 같은 것을 갖춰가고 있었다.
아이젠은 주변을 잠깐 두리번거리더니, 바네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혹시, 가주님 소식은요?”
“아.”
그러자 바네사도 하인들 눈치를 보며 아이젠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직요. 근데 파발이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옥사비나가 다시 찬탈당했대요.”
“옥사비나가요?”
옥사비나는 슌타리아와 함께 공화국과의 전쟁이 잦은 지역이다. 아이젠은 옥사비나가 찬탈당했다는 소식에 당장에라도 그곳에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젠 스스로가 좀이 쑤셨기 때문이다.
‘한 달이나 가문 안에서 놀고먹었으면 됐어. 이제 다시 실전 수련치를 쌓을 때야.’
안주해선 안 된다. 아이젠은 어서 빨리 생사경에 도달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전을 경험해야만 한다. 여기서 허송세월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그러나.
“잊은 건 아니겠죠, 소가주님? 장로 연합의 반대.”
“끄응.”
아이젠은 강해지기 위해서 1초라도 빨리 최전선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장로 연합의 극렬한 반대로 아이젠은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주가 부재한 지금, 소가주마저 없다면 가문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연유다. 하지만 애초에 소가주전 이전에도 테오발트는 가문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즉 어불성설.
하지만 기사들은 아이젠을 적극적으로 영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고, 그들 모두를 때려눕힐 생각까지는 없던 아이젠도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진짜 다 두들겨 패고서라도 나가야 하나 싶긴 하지만 말이야.’
이거야 원, 오히려 소가주가 된 것이 손해가 된 셈 아닌가. 아이젠은 허망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일단, 사울 장로님께 가봐야겠네요.”
사울 장로는 지금쯤 기사학교의 상급반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라도 부탁해서 최전선으로의 진격을 허락받고자 하는 아이젠이었다.
왜냐하면, 사울 장로를 제외한 다른 장로들은 지금 영지 내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현재 옆 마을과의 교류를 위해 떠나 있는 상태. 가문의 재정 등은 모두 장로들에게 일임한 아이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가시죠? 소가주님.”
“아, 거 소가주 소리 참.”
바네사의 어설픈 에스코트에 괜히 화만 나는 아이젠이었다. 그러나 별도리가 없어 아이젠은 얌전히 바네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