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마력열차 탈취사건 】
아이젠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좌석이 많은데 아이젠과 사울 장로를 제외하면 7량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계의 많은 방주들과 다른 하인들, 한스나 바네사도 없었다. 모니카도 없었다.
아이젠이 물음을 던지는 얼굴로 사울 장로를 바라보자, 사울 장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7량은 온전히 아이젠 소가주님께서 독점하십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8량부터 12량까지에 앉아 있습니다.”
“자리가 이렇게 많은데 굳이요? 사울 장로는 그럼 왜 여기 계신 건데요?”
“원래는 소가주가 되신 걸 기념해 가주님과 독대를 하셔야 하지만… 지금 테오발트 가주님께서 안 계시므로, 임시방편으로 제가 나와 있는 겁니다.”
그린우드 가문에서 소가주가 되는 자는, 가주와의 독대를 통해 소가주의 직위가 얼마나 근엄한 자리인지를 몸소 교육받아야만 한다. 아이젠에게도 필요한 절차였다.
그러나, 테오발트 가주가 나랏일을 하러 떠나버렸기에 없어 아이젠 혼자서만 7량에 남아 있는 셈이었다.
사울 장로는 그 테오발트 가주의 대체재로서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소가주가 된 기분이 어떠하십니까?”
“음, 글쎄요. 딱히 별 느낌 없는데.”
아이젠은 사울 장로에게 대답하면서도, 몸속에서 무혈신공을 운공해 보았다. 강망태신을 연속으로 사용한 반동이 끝나 이제 무혈신공도 어느 정도 제 위치를 되찾았다.
‘결사신권 5성, 홍련치(紅蓮致).’
그는 결사신권 5성의 또 다른 기술, ‘홍련치(紅蓮致)’를 사용해 손가락 끝에서 연분홍빛 내공을 꺼냈다. 그것은 마치 얇은 실과도 같았다. 아이젠은 상의를 벗어 던지고, 그 얇은 분홍색 실을 이용해 배에 난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이 꿰뚫린 상처는 게오발트에게 선사받은 것. 고약을 바르기는 했으나 상처가 깊었다. 그래서 아이젠은 홍련치를 이용해 직접 자신의 자상을 꿰매었다.
홍련치는 아이젠이 가진 결사신권의 기술 중 유일한 ‘치료’ 기술로, 홍련치로 꿰맨 상처는 금세 아물고 흔적도 별로 남지 않는다.
몹시 예민하고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기에 홍화의 기운으로만 사용해야 하며, 회혼의 날카로운 성질로는 상처를 제대로 봉합할 수 없어 홍화만을 쓴 것이었다.
“끄응.”
홍련치로 꿰매는 상처는 잽싸게 아물지만, 마취가 없기 때문에 아픈 건 그대로다. 그래서 아이젠은 결국 입 밖으로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게오르크의 검격은 정말이지 매섭기 그지없었다.
‘후우. 그 정도의 검술 재능을 지녔으면서 왜 타인의 힘을 빌려 쓰는 건지.’
간츠펠트라는 녀석이 아모스의 주인이다. 아이젠은 왜인지 몰라도 그 간츠펠트를 조만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도와드립니까?”
아이젠의 봉합을 가만 지켜보던 사울 장로가 은근히 물어왔다. 아이젠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좋은 몸에 흠집이 났으니 구슬프시겠습니다.”
“영광의 상처죠, 뭐.”
전투의 상흔은 무투가에게 있어선 훈장이나 다름없다. 아이젠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아이젠이 봉합을 끝내자, 마력열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출발하던 마력열차는 한순간에 쏜살처럼 빨라져 바깥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매서운 속도로 그린우드 부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네요.”
“예, 소가주님.”
“아, 거참. 호칭 부담스럽네.”
“익숙해지십시오. 소가주의 이름을 짊어진 이상 앞으로 닥칠 위협이 많을 겁니다.”
“그래요? 예를 들면요?”
“공화국의 위협이 가장 당면한 문제겠지요.”
“그 나라는 정말 전쟁이라도 할 셈인 건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이젠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근심에 잠길 법도 하지만 전쟁이야말로 아이젠에게는 실전의 보고였기에 상관없었다.
다만 전쟁이 벌어짐으로써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게 될 걸 생각하면 마음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뭐가 됐든, 새 일상이 펼쳐지겠어요.”
아이젠의 짧은 감상과 함께, 마력열차는 조용히 나팔관 위를 내달렸다.
* * *
마력열차. 종착역을 그린우드 영지로 두고 있는 이 마력열차는 현재 7량부터 12량까지는 그린우드에서 사용하지만, 1량부터 6량까지는 일반 승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누군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지적 능력을 쌓아가는 동안.
1량에서는 수상쩍은 대화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열차가 출발했군.”
“응.”
“좋아, 시작이야.”
“…….”
총 4명의 남녀. 그들은 모두 도깨비 뿔이 네 개 달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그들 넷 주변으로 앉아 있던 다른 승객들 역시 도깨비 뿔이 한 개씩 달린 가면을 저마다 쓰고 있었다.
즉 1량 전체가 가면을 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시작해, 벌랜디검.”
“알았어, 레유리에.”
레유리에라는 여자의 지시에 따라, 벌랜디검이라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랜디검은 1량과 연결되어 있는 차장실로 향했다. 차장실의 문은 본디 잠겨 있어 함부로 열 수 없지만, 벌랜디검의 두꺼운 팔뚝이라면 충분히 힘으로 뜯어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둑! 뚜두둑!
카앙!!
차장실 문의 자물쇠를 손으로 뜯어낸 벌랜디검. 그는 곧바로 기사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당신 뭐야!”
“당장 뒤로 가지 못해!”
그러나, 그들의 고함은 이내 비명으로 변했다. 벌랜디검이 안에서 무슨 수를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열차 차장의 비명은 오래가지 못하고 잦아들게 되었다.
레유리에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남자, 그레고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물론 가면을 쓰고 있어 ‘시선’이라는 게 따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레고리.”
“걱정 마. 다 계획대로니까.”
그레고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음 상황을 기다리는 듯한 얼굴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레유리에는 이번엔 오른쪽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독특하게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단순히 장식용으로 앉아 있는 휠체어가 아니라, 팔다리가 뭉그러지고 녹아내려 그 휠체어에 앉아 있지 않고서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레유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간츠펠트. 괜찮겠어? 이제라도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 이상 다른 일은 벌이지 않을게.”
“…후우…….”
남자의 이름은 간츠펠트. 그의 도깨비뿔 달린 가면에는 산소호흡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호흡기는 다시 휠체어에 설치된 생명유지장치와 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간츠펠트는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단 5분도 숨을 쉴 수도 없는 몸이었고, 그 탓에 대화는 고사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작은 호흡뿐.
그 호흡 소리를 들은 레유리에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간츠펠트. 시작할게.”
레유리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레고리의 옆에 가서 얌전히 섰다. 그리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차원가방’.”
그러자 허공에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뚫렸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허공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이다. 그 구멍 너머에는, 마치 미래세계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무기들이 즐비해 있었다.
레유리에는 구멍 안에서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오늘날에 ‘기관총’이라 부르는 무기였다.
레유리에와 그레고리가 2량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그들이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지는 자명했다.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대량학살’이었다.
레유리에가 외쳤다.
“벌랜디검! 운전 똑바로 해!”
그러자 차장실의 벌랜디검이 대답했다.
“유후, 내 맘대로 운전해 볼까!”
간츠펠트, 레유리에, 그레고리, 벌랜디검.
네 사람에 의해 오늘 마력열차는 탈취되었다.
* * *
덜컹! 덜컹!
마력열차가 별안간 양옆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팔짱을 낀 채 졸고 있던 아이젠이 일어났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사울 장로는 읽고 있던 책에 집중하지 못해 페이지를 덮어버렸다.
“되게 흔들리네요, 이 열차.”
“그러게나 말입니다.”
“되게 편하다고 들었는데.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제공한다고.”
“예, 전에는 분명 그랬지요.”
“흠.”
아이젠이 다시 잠에 들려 할 때, 순간 아이젠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자신의 기감에 무언가가 잡힌 것이다.
그것은 분명 저 앞칸 6량 너머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이 열차의 앞쪽에서 무언가가 감지됐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아이젠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뭐지?”
하지만 그 정체가 불안한 기운인 것만은 확실했다.
아이젠의 잠은 마침내 완전히 달아났다.
“사울 장로님.”
“예, 소가주님?”
아이젠은 사울 장로를 돌아보았다. 사울 장로는 아이젠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곤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준비하세요.”
“뭘 말입니까?”
아이젠이 다시 6량 너머를 보았다.
“싸움.”
* * *
마력열차의 2량. 1량과 2량을 잇는 통로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도깨비 뿔이 달린 가면을 쓴 사람들이었다. 그들 틈에는 레유리에, 그레고리, 간츠펠트도 있었다.
“응?”
“뭐지?”
“가장 행렬인가……?”
2량에 앉아 있던 승객들이 그런 의문을 표하는 동안, 그레고리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2량 끝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2량과 3량을 잇는 통로문에 손을 댔다.
그레고리의 검지에는 하얀 보석이 박힌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는데, 그 반지의 보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티팩트, 차단의 반지.”
촤앙!
그레고리가 작게 소리 내자마자 통로문에 거대한 투명 차단막 같은 것이 설치됐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승객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레고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기사의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는 30대 초반 정도의 남자였다.
“이봐! 뭐 하는 거지?”
“…….”
“이 사람이? 난 기사다. 어서 예를 차리지 못하겠어?”
“…….”
그레고리가 대답이 없자, 기사는 혀를 쯧 차더니 투명 차단막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뭐야.”
그리고 기사가 차단막에 손을 갖다 대자마자.
파앙!
하고 기사의 손이 튕겨 나왔다. 기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저릿저릿한 감각 탓에 잠시 팔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을 겪어야 했다.
“윽! 뭐, 뭐야, 이거!”
“기사라고?”
그제야 그레고리가 말했다. 그레고리는 기사의 머리 위에 손을 툭 얹었다. 그러더니 싸늘하게 내려앉은 어조로 말했다.
“기사 같은 건 형편없이 국가의 녹을 좀먹는 집단에 불과해.”
우둑!
그레고리의 팔이 기사의 머리를 뒤틀었다. 기사는 몸이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기절한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은 것이었다.
“…….”
그때까지도 분위기 파악이 덜 됐던 사람들은.
“꺄아아악!”
“사, 사람이 죽었어!”
“기사가 죽었다!”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공포에 젖어서만은 아니었다. 도깨비 뿔이 달린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승객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리가 외쳤다.
“가라, ‘운타시드’들아.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