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철이. 좀 괜찮아?”
다가온 이는 바로 유진이었다. 그가 퉁명스레 말하자 모니카가 겉옷으로 아이젠을 가리는 것도 잊고 바락 소리쳤다.
“소가주님이세요! 말씀을 똑바로 하셔야죠.”
“소가주고 나발이고… 경기 내용이 좀 충격적이긴 했어.”
그 말대로였다. 모니카도 내색은 안 하고 있었지만 결승전 경기는 충격적인 결과로 모두에게 다가왔다.
지금 저기 멀리 한스와 바네사가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것만 봐도 알 만했다. 게오르크의 죽음이 그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날 때부터 강자인 줄로만 알았던 게오르크가 사실은 약물의 힘을 빌린 ‘만들어진 천재’였으니.
‘게오르크를 존경하던 한스는 많이 놀라기도 했겠구만.’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반쯤은 자업자득이라 생각했다. 누가 게오르크 같은 놈을 존경하래?
아이젠은 누운 채로 유진을 올려다봤다.
“넌 근데 왜 안 돌아가고 여기 같이 왔어?”
“전해줄 게 있는데 네가 바로 테오발트 공작님이랑 가길래. 테오발트 공작님이 옆에 계실 때 말을 거는 건 무섭잖아. 받아.”
유진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아이기스였다.
“아.”
아이젠은 깜빡한 건 아니었고, 나중에라도 유진에게 가서 받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친히 주러 왔다는 사실에 조금 감격했다.
“고맙다.”
“소가주님이신데. 이 정돈 해드려야죠?”
유진이 장난스레 대꾸하고, 그는 다시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강철의 소가주님. 이제 어쩔 거야?”
“어쩌다니?”
“소가주라. 어린 나이엔 이미 오를 만큼 오른 업적이잖아. 그 위로 더 올라갈 데도 없을 텐데, 이제 뭘 하면서 놀 거냐구?”
“아, 그거.”
아이젠은 왼손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나 앉았다. 왼팔을 용암에라도 담근 것처럼 쿡쿡 쑤셨다.
“글쎄. 하지만 놀진 않을 거야.”
“뭐 하게?”
“수련.”
“응? 소가주인데?”
“그러니까 수련.”
아이젠은 아직도 가문 내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고깝게 본다는 걸 알았다. 지금 저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오드니엘 장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오드니엘 장로뿐인가, 그 뒤의 다른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사울 장로만이 아이젠의 소가주 즉위를 납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식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이젠 스스로여야 할 터.
그 방법은 간단하다. 아이젠이 그 누구보다 강해지면 된다.
“아이기스 맡아줘서 고마웠다.”
“그래. 난 가볼게.”
그렇게 유진이 돌아가려는데, 문득 멈춰 서서 아이젠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 커다란 대망치 레테논을 높이 들어 올려 보였다.
“야, 강철!”
“응?”
“언제든, 무기 같은 게 필요하면 불러. 아니면 땜질할 때라든지.”
그 말에 아이젠도 피식 웃었다. 유진은 대장장이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젠의 친구로서 하는 말이었다.
아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고맙다.”
* * *
끼이이. 끼긱. 끼긱.
마력열차가 선착장으로 들어왔다. 마력으로 움직인다지만 차체는 철로 만들어졌기에, 나팔관과 차체 하부가 긁히며 나는 기분 나쁜 끽끽거리는 소리는 여과 없이 들려왔다.
그러자 흩어져 있던 그린우드의 식솔들이 모여들었다. 사울 장로가 외쳤다.
“탑승!”
이라고 말하자마자,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르!
마력열차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저마다 병사의 옷을 갖춰 입은 것을 보면 그들은 제국군이 틀림없었다.
제국군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헤아려도 서른 이상. 그들이 오와 열을 맞추며 빠르게 걸어 둘러싼 대상은.
“응?”
다름 아닌 아이젠이었다.
한순간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벙찐 상태가 되었다. 그 틈을 타 제국군들이 외쳤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당신을 1급 살인죄로 체포합니다! 우리 호송병들의 명령에 따라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으응??”
이게 뭔 일이래?
그제야 아이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룬잭.
‘그러고 보니 룬잭이 날 잡으러 오는 호송병들이 있다고 했지 참?’
마력열차를 타고 온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들이 이제야 아이젠을 잡으러 온 것이다. 상황 파악이 덜 됐을 시간일 터다.
아이젠이 뭐라 입을 열어 말하려던 때, 뒤편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그린우드의 소가주님께 이 무슨 행패인가!!”
고함의 주인은 다름 아닌 사울 장로였다. 사울 장로가 외치자마자 호송병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소, 소가주?”
“아이젠 폰 그린우드가 그린우드의 소가주란 말이야?”
“하, 하지만 우린 지엄한 군율에 따라…….”
그때 앞으로 성큼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5 방주 알브레히트였다. 룬잭의 주인이었던 그이기에 직접 나서온 것이다.
알브레히트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아이젠을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이거 참. 호송병들을 돌려보낸다는 걸 깜빡했군.”
“아.”
하긴, 룬잭에게 지시해 호송병들을 부른 건 알브레히트 5 방주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아이젠이 죽였다고 오해했으니까.
“다들 돌아가게. 내가 자네들을 불렀네.”
“예? 아, 그럼 알브레히트 반 그린우드 님이십니까?”
“그래. 착오가 있었으니 돌아들 가라고. 자, 자.”
“아, 예에…….”
그들을 열차 앞쪽 칸에 탑승시키고, 알브레히트는 아이젠을 돌아보았다.
“거참. 미안하다, 아이젠. 아니, 이젠 소가주님이라고 불러야겠지?”
“…별말씀을요. 방주님.”
“소가주가 된 거 축하한다. 축하의 말 한마디 못했구나.”
“감사는 제가 해야죠.”
아이젠은 알브레히트와 수련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와의 대련이 없었더라면 아이젠은 이만큼 강해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소가주전에서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쪽이 자신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
‘물론 나라면 악착같이 살아남기야 했겠지만 말이야.’
알브레히트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열차에 올라탔다. 잠깐의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이 마력열차는 총 12량으로 되어 있는 열차였는데, 전부 그린우드에서 전세를 낸 것은 아니다. 7량부터 12량까지만이 그린우드에서 쓰기로 되어 있고, 1량부터 6량까지는 일반 승객 등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알브레히트는 먼저 12량 쪽에 탑승했다.
다른 사람들도 슬금슬금 열차에 올라타고, 모니카가 다시 아이젠 쪽으로 걸어왔다.
“도련, 아니, 소가주님. 저희도 타요.”
“그래. 야, 근데 난 소가주까지 됐는데 아직도 날 모시는 건 너밖에 없어?”
“아직 인원 배정이 안 됐으니까요……. 그린우드 부지로 돌아가시면 아마 식솔들이 더 많아지시게 될 거예요.”
“알았다. 아오, 아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열차에서 또 우르르 하며 내리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또 뭔가 하고 보니, 제국군들은 아니었다. 내린 이들은 사병으로 보였다. 정확히는 사병도 아니고 기사였다. 기사의 플레이트아머를 갖춰 입은 남자 여럿이 열차에서 내린 것이다.
기사들은 성큼성큼 아이젠과 모니카를 향해 걸어왔다. 이번에도 자신이 목표인가 싶어 또 무슨 짓을 저질렀더라 과거를 되짚어보는 아이젠이었다.
그런데 기사들이 둘러싼 것은 이번엔 아이젠이 아니라 모니카 쪽이었다. 아이젠은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왜들 이러세요?”
모니카가 말하자, 기사들 사이를 헤집으며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의, 20대 중후반 정도 되는 남자였다.
보랏빛 머리에 어딘가 양아치스러운 인상을 가진 그 남자는 키도 훤칠하고 꽃미남상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피어싱을 뚫어놓은 두 귀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성큼성큼 모니카에게 다가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모니카. 이렇게 다시 보는군.”
“…아!”
그제야 모니카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듯싶었다. 하도 오래전에 잠깐 본 거라 잘 기억도 안 난 것이다.
“이, 이반 데 체호프 공자님.”
그는 바로 모니카에게 청혼을 했던, 창술명가 체호프 후작가문의 둘째 이반 데 체호프였다. 이반은 해사하게 웃으며 모니카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기억해 주고 있었네. 이거 영광인걸?”
“아,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모니카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젠을 보았다. 아이젠은 상황 돌아가는 걸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이반이 말했다.
“어쩐 일이긴, 당연히 모시러 왔지. 마력열차로 온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었나?”
“…하, 하지만, 편지를 전달해 드렸을 텐데요? 혹시 못 받으셨나요?”
“아. 편지라면 받았어. 결혼을 취소하고 싶다는 편지였지?”
“네. 그걸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전 결혼은…….”
“모니카. 오해가 있나 본데… 난 후작가문의 둘째 적자야. 다음 가주가 될 순 없더라도 직계라는 얘기지. 네겐 내 청혼을 거절할 권한이 없어. 내가 하자고 하면 하는 거야. 알아들었어, 모니카?”
이거는 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달식 청혼이었다. 아이젠은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제삼자 시선에서 보자니 모니카에게 저렇게까지 군다는 게 특이했던 것이다.
‘물론, 모니카에게 위협이 가해진다면 내가 저 이반이란 놈을 교육해야겠지만.’
우선은 모니카가 어떻게 행동하나 바라보기로 했다.
이반이 모니카의 팔을 덥석 잡자, 모니카는 강하게 뿌리쳤다.
“이러지 마세요! 전 결혼 생각 없어요. 아직 그린우드 가문에서 할 일이 많다구요.”
“그래봤자 하인. 모니카 네가 그린우드에서 여인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뭐 얼마나 있다고 그래? 자부심을 가질 위치인가? 그건 아니지 않아?”
“…다른 사람들한텐 아닐지도 모르지만! 전 스스로 자랑스럽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린우드 공작가문을 모실 수 있어서요.”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네 생각이 틀렸어, 모니카. 내 생각이 옳아.”
“틀리지 않았어요, 저는…….”
짜악!
그때 이반이 마침내 모니카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웅성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멈추고, 모니카와 이반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정도였다.
모니카가 금세 빨갛게 부풀어오른 뺨을 만지며 영문도 모른 채 눈물 흘리고 있을 때, 이반은 여전히 그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히 노예 따위가 날 거부하려 해? 그린우드의 위세라도 등에 업고 싶나 본데, 너 따위 노예가 여기서 맞아 죽는다 해도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을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넌 비천한 노예일 뿐이니까.”
“…흑……!”
“내가 기껏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고 있잖아. 왜 기회를 걷어차는 거지? 후작가문 둘째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별로야? 그렇게 생각해? 노예에 불과한 네가 평생을 노력해도 이만한 타이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반이 다시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오른손이 또 한 번 모니카의 뺨을 내려치려는 그 순간이었다.
짜악!
뺨을 맞고 날아간 것은 모니카가 아니었다. 바로 이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