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소가주전 폐막 】
아이젠은 자신의 몸에서 아직도 푸르게 피어오르고 있는 기운을 살폈다. 푸른 기운은 마치 불꽃 같기도, 잔잔한 파도 같기도 했다.
회혼 위에 기운이 둘리니 그 색은 얼핏 진청색을 띠기도 했다.
“룬의 힘을 발현한 건가.”
아이젠이 중얼거렸다. 아이젠은 그간 관철의 룬의 힘을 여러 차례 발현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딱히 뭔가 대단한 힘을 얻었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내공이 강해졌다는 등의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의지력이 강해진 듯했다. 착각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아이젠은 모든 가능성이 불가능으로 점철되는 그 순간, 자신이 한 발 더 디딜 용기를 가지게 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룬의 힘.
“좋네.”
아이젠의 감상평은 짧았다. 왜냐하면, 게오르크가 쓰러져 누워 있을 저쪽 편에서 그의 오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오르크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다. 섬광권기를 정통으로 맞았을 텐데.
아이젠은 곧바로 회혼을 온몸에 불어넣었다. 더 이상 남은 내공이 없어 바닥까지 긁어모은 것이었다. 아마 박살을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
비틀― 아이젠이 순간 눈이 풀려 휘청거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젠장. 몸에 내공이 한 줌밖에 남아 있지 않아.’
이 정도의 양으로 게오르크를 쓰러뜨릴 수가 있을까?
그때 게오르크가 발을 디디며 먼지 바람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마치 투석기에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섬광권기에 맞은 부위에서부터 온몸에 멍이 퍼져 있는 것이었다.
“크윽. 큭…….”
게오르크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아이젠을 올려다보았다. 게오르크는 상태가 안 좋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기절하고 쓰러질 만큼의 행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고맙구나, 아이젠. 이런 매콤한 주먹맛이라니. 죽여 버리고 싶다는 다짐에 확신이 생기는걸.”
“맷집도 좋으셔라.”
“라니에를…….”
“이거 찾아?”
아이젠은 손에 들고 있던 라니에의 잔해물을 들어 올렸다. 게오르크는 그것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으나, 이내 침착하게 대응했다.
“흥. 정말로 아티팩트인 라니에를 부술 줄이야. 그 주먹이 대단하다는 것은 잘 알겠다. 하지만, 참철검은 형상일 뿐. 진정한 검사라면 무형의 검으로도 싸울 수 있어야 하는 법.”
게오르크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자, 그의 손에서부터 오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러의 색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그린 오러!”
그린 오러라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말이다.
슈와아압!
잠깐의 바람이 불고, 게오르크의 손에는 검이 생겨났다. 오러로 빚은 실체가 없는 검이었다. 아이젠은 저런 걸 전에도 본 적이 있다.
‘피스풀 지하감옥에서 제이슨이 만든 노란 칼날과 똑같군.’
차이점이 있다면 제이슨은 그때 칼막이 위에 칼날을 만드는 것에 그쳤지만, 게오르크는 아예 검 전체를 형상화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짙은 흑색의 검이었다.
‘왜 저렇게 새까매?’
한편 게오르크의 표정은 득의양양해졌다. 그가 미소 짓자 입 사이로 피와 검은색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 검은색 무언가를 아이젠은 알아보았다.
‘아모스인가?’
게오르크가 섬광권기에 직방으로 맞고도 멀쩡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게오르크는 저 먼지바람 안에서, 아모스를 입에 털어넣어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렇군. 녀석의 오러가 저렇게 검어진 이유도, 아모스를 더 많이 삼켰기 때문인가.’
아마 남은 아모스를 다 털어 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게오르크는 지금쯤 어마어마하게 강해졌을 테고, 그것을 아이젠은 감당할 수 없다.
게오르크는 검은색 피를 닦아내며 웃었다.
“아이젠. 너의 최후를 알려주마. 네 목을 잘라 거리에 걸어둘 것이다. 가문의 모두가 네 머리통 아래에 적힌 글귀를 보게 될 거야. ‘참철검가에서 검을 쓰지 않는 머저리, 검에 베여 죽다’! 어때, 근사하지 않나?”
“그 정도면 근사하긴 한데?”
“그게 바로 너의 미래다. 사설은 그만두도록 하지! 죽어라, 아이젠!”
게오르크는 곧바로 뛰어들 기세였지만, 그러지는 않고 제자리에서 힘을 모았다. 검은 오러 바람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하아앗!!”
콰아아아!
흑색 검 주변으로 짙은 오러가 흩날리고, 게오르크의 눈동자 전체가 검은자로 물들었다.
“참철검술 6성의 경지, 발도지경(拔刀地境)!!”
게오르크가 외쳤다. 그러자 관객석의 몇몇 인원이 화들짝 놀랐다.
- 발도지경?!
- 저, 저 어린 청년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 살이라지 않았소?
- 허어, 천재는 천재인 모양이군. 스물일곱 살에 발도지경의 경지에 오르다니.
- 방계의 자제 중 그 누구도 6성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소. 저 정도면 현 방주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터…….
- 하지만, 저게 정말 순수하게 본인의 힘으로 달성한 경지가 맞단 말인가?
그들의 눈에 게오르크는 정상이 아니었다. 참철검술 6성의 경지 ‘발도지경(拔刀地境)’은 정순하고 고귀한 오러를 가진 채로만 달성할 수 있는 단계. 그런데, 게오르크의 저 모습 대체 어디가 정순하고 고귀하단 말인가?
게오르크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고, 눈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입에서도 마찬가지로 검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감싼 오러도 전부 검은색, 심지어 그가 쥔 검조차 짙은 흑색.
저것이 정말 발도지경인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는 사이, 게오르크가 소리쳤다.
“다음 대의 가주는 나다, 아이젠 ‘반’ 그린우드!”
팟!
게오르크가 뛰었다. 흑색 검을 손에 쥔 채로, 아이젠을 당장에라도 베어 죽일 듯이.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자 했다. 검을 횡으로 길게 벤 것이다. 절대 칼날 뒤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참철검술 6성, 참철발도(斬鐵拔刀)!”
슈아아앗!
칼날이 날아드는 그 상황에서 아이젠은.
‘결사신권, 박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게오르크의 흑색 검을 박살로 상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마 소용없을 것이다. 아이젠은 오른손 하나쯤은 이곳에서 바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검기를 상쇄하고 난 다음이 더 문제겠지만, 지금은 뒷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맞닿아라!’
그렇게 아이젠의 주먹과 게오르크의 흑색 검이 맞부딪치려는 바로 그 순간.
…휘익!
‘응?!’
아이젠의 주먹이 허공을 휘둘렀다. 아이젠은 관성으로 주춤하며 앞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흑색 검과 부딪쳐야 하는데?
그러나 게오르크의 흑색 검은 거기에 없었다. 게오르크는 황망하게 자신의 흑색 검을 바라보았다. 검은 끝부분부터 먼지처럼 바스러져, 하늘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타고 남은 재를 연상케 했다.
“이, 이게 왜.”
“…….”
아이젠은 숨을 헐떡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게오르크에게 일어난 변화는 흑색 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끝이 재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하더니, 발, 허벅지, 팔뚝, 몸통을 가리지 않고 몸이 점점 잘게 부서져 갔다.
털썩! 게오르크가 바닥에 쓰러졌다. 발을 디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발이 없으므로.
“무슨 일이야. 나한테 무슨 일이…….”
게오르크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아이젠은 그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모스의 부작용.”
몸이 부서지고 있다. 아모스를 지나치게 남용한 탓이다.
애초에 아모스는 타인의 오러를 녹인 알약. 천마신교 교주 도강문이 자신의 교도들을 현혹한 후 그들의 몸을 망가뜨렸듯, 흉약이라는 멸칭이 아깝지 않은 독인 것이다.
“대가를 치르는 거다, 게오르크.”
“뭐, 뭐라고…? 대가라니, 내가 무슨 대가를…….”
“잘못된 힘을 받아들인 대가.”
아이젠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조금 전 사용한 박살 탓에 이제 정말 몸에 내공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용되지 않은 힘을 사용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겠지.”
“내가… 내가 이렇게 죽는단 말이냐? 이 내가?”
“책임의 방식이 바로 죽음이었을 뿐이다.”
게오르크의 몸이 점점 더 잘게 부서졌다. 이제는 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형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잘 가라, 게오르크 ‘반’ 그린우드.”
바스락.
파스스스…….
마침내.
게오르크는 완전히 형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
아이젠은 경기장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게오르크가 사라지고 없는 그곳 위에 말이다.
‘휴우, 위험할 뻔했네.’
하마터면 게오르크에게 당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아이젠이었다.
그때였다.
“크음…….”
아이젠은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니 마테오 백작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아이젠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마테오 백작님.”
“이거 고맙군요, 아이젠 공자……. 게오르크는?”
아이젠은 이제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없는 게오르크가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마테오 백작은 짧은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모두 이해했다.
마테오 백작은 몸을 올곧게 세운 뒤, 아이젠의 손을 붙들었다.
“결승전에서 최종적으로 우승하셨군요. 제가 그 경기를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한 것이 죄스럽습니다.”
“네? 아뇨, 뭐 죄스러우실 것까지야.”
마테오 백작은 시선을 돌려 관객석의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 하나하나의 면면을 읽어내리던 마테오 백작은 마침내 두 팔을 번쩍 들어 선언했다.
“그린우드 공작가, 다른 이름으로는 참철검가의 소가주는 바로… 아이젠 공자님이십니다.”
그때까지도, 장내는 고요했다. 어떤 가문의 다음 소가주가 결정된 행사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본래라면 누군가는 환호성을 지르고 깨춤이라도 췄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드니엘 장로였다.
“마, 말도! 말도 안 되오!!”
오드니엘 장로가 선언하자 주변에서 그를 따르던 다른 장로들도 여럿 덩달아 일어났다. 오드니엘 장로는 위세를 등에 업고 아이젠을 향해 삿대질했다.
“참철검도 다룰 줄 모르는 아이요! 아니, 그전에 참철검을 만들지도 않은 아이요! 뒷골목 건달도 아니고 주먹이라니. 주먹이라니?! 주먹을 쓰는 자가 어찌 소가주가 되고 어찌 다음 대 가주가 된단 말인가! 난, 난 용납 못 하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용납 못 하오!”
“옳소!”
“오드니엘 장로의 말이 맞소!”
몇몇 장로가 호응하자, 방계의 하인들 측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아무리 우승자라 해도 가문 이름이 참철검가인데.
- 주먹을 쓰는 사람이 참철검가의 소가주가 되는 건 좀…….
- 그래. 물론 잘 싸우시는 거야 알긴 하겠지만… 소가주란 자리가 단순히 싸움만 잘한다고 올라야 하는 자리는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