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촤악!
아이젠은 게오르크에게 오른쪽 어깨를 베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다시 주먹을 꽉 쥔 채 휘둘렀다.
이번에는 섬광권기의 힘을 담아서였다.
‘결사신권 회혼, 섬광권기!’
쉬익…….
뻐엉!
게오르크의 눈동자가 놀라 크게 뜨이고, 아이젠은 지체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마침내 주먹이 게오르크의 얼굴에 맞닿는 순간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대기에 울려 퍼졌다.
콰앙!
하지만, 아이젠의 주먹은 게오르크의 얼굴을 박살 내지 못했다. 게오르크의 얼굴 위에는 아주 얇게 오러가 펼쳐져 있었다. 오러 아머다.
그러나 좀 전과 차이가 있다면, 기존의 게오르크의 오러 아머는 연녹색이었지만 지금은 검은색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객석의 사람들이 외쳤다.
- 저, 저게 뭐지?
- 그린 오러가 아니야…….
- 검은색이지 않소! 어떻게 오러가 검은색일 수가……!
사울 장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사울 장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뒤쪽에 장로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오드니엘 장로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사울 장로. 게오르크 첫째 공자가 마테오 백작을 찌른 것은 내 생각엔 그냥 사고―”
“경기를 중단시켜야 하오.”
“응?”
“중단! 경기를 중단한다!”
사울 장로가 크게 외치자, 주변의 기사들이 얼결에 호응해 일어났다. 사울 장로를 주축으로 한 그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려 하자, 오드니엘 장로가 소리쳤다.
“잠깐! 사울 장로, 자네에겐 이 결승전 경기를 중단시킬 권한이 없소! 가주님도 안 계신 상황에서 이 무슨 행패요!”
“지금 중단시키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네, 오드니엘.”
“권력 남용이요! 가주님, 아니, 공작님께서 이러라고 자네에게 소가주전의 대행을 맡긴 것 같은가!”
“……!”
하기야, 이 경기를 중단시킬 권한이 사울 장로에겐 없다. 그것은 월권.
소가주전은 중단되어선 안 된다. 설령 인명사고가 일어나더라도. 그렇기에 그간 방계의 많은 아이들이 희생된 것 아니던가.
오드니엘 장로가 말했다.
“자리에 앉으시오, 사울 장로! 이 이상 경기 진행을 방해한다면 가주님께 당신의 행패를 정식으로 보고하겠소!”
“…….”
사울 장로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얼굴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마침 경기장 위에 서 있던 아이젠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젠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
아이젠은 경기 중단을 원치 않고 있었다. 사울 장로는 그의 눈빛에서 의도를 읽었다.
“크음…….”
결국 사울 장로는 제자리에 풀썩 다시 앉고 말았다. 오드니엘 장로는 자신의 겁박이 먹힌 줄 알고 득의양양했지만, 사실 사울 장로는 오드니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아이젠 공자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
사울 장로는 마음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아이젠은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결사신권, 쇄고!’
아이젠은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게오르크의 넓게 펼쳐진 오러 아머의 가장 얇은 부위를 파악해 쇄고로 찔렀다. 검은 오러 아머가 움푹 패고, 아이젠은 그 부위를 향해 주먹을 찔러 넣었다.
‘철권!’
뻐억!
그러나 게오르크의 검은 오러 아머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에는 제대로 밀려나지조차 않았다. 게오르크는 거목처럼 그 자리 위에 서 있었을 뿐이다.
“이게 끝이냐, 아이젠?”
“……!”
“볼 장 다 봤군.”
게오르크가 손을 휘젓자, 라니에의 효과인 영역 선포가 강화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린 라인’이 아니었다. 그린 라인의 색이 일변도해 검은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블랙 라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명칭이었다.
“꺼져라.”
푹!
게오르크의 검술은 쏜살같았다. 아이젠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도 못 하고 배때기에 칼이 꽂히는 고통을 경험했다.
시이익…….
찔린 부위에서부터 뜨끈한 피가 배어 나오는가 싶더니, 마침내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렇게 칼에 제대로 찔리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체험이었다.
“푸헙!”
아이젠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게오르크는 라니에의 칼날을 뽑아냈고, 아이젠은 마테오 백작 옆에 나란히 눕게 되었다.
‘아, 안 움직여.’
아이젠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해보았으나 미동도 안 했다. 온몸에서 실시간으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장기를 찔렸다.’
소장을 꿰뚫렸다. 아이젠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게오르크는 싸늘한 얼굴로 아이젠을 내려다보았다.
“프란츠라는 아이가 있었지. 너처럼 나대다가 죽은……. 아, 이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나?”
게오르크는 객석을 둘러보며 말했다.
“프란츠 반 그린우드를 죽인 것은 나다. 프렘린들의 소행이 아니야. 이젠 숨길 필요도 없게 됐군.”
- ……!
그러자 관객석의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프란츠의 아버지인 3 방주 페르디난트는 더더욱 흥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게오르크가 프란츠를 죽인 것은 사실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소가주전에서 목숨을 잃으리란 것쯤은 다들 각오하고 출전하는 것이다. 게오르크는 정당하게 소가주전에서 프란츠의 목숨을 거뒀을 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잘못됐다.
“네가… 네놈이 프란츠의 시신을 수습도 못 할 만큼 갈기갈기 찢어놓았단 말이냐?”
페르디난트가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프란츠의 시체는 마물이 했다는 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심각할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일부 부위는 제대로 수습도 못 해서, 프란츠의 장례는 장기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치러야 했다.
프란츠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저기 서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래. 내가 했다.”
팟!
페르디난트가 펄쩍 뛰어 경기장에 난입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터억!
다른 방계의 방주들이 일제히 페르디난트의 몸을 붙들고 막아섰다. 1 방주 프리드리히, 2 방주 하인리히, 4 방주 콘라트, 5 방주 알브레히트 모두 마찬가지였다.
페르디난트는 부들부들 최대한 참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날 막지 말게. 저놈, 저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참게, 페르디난트! 복수는 결승전 경기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린우드의 품위를 부디 지키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이네!”
결국 페르디난트는 참아냈다. 얼굴은 시뻘게져 있었지만 공작가의 젠트리로서 마지막 남은 품위를 지켜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흥분감만은 참을 수 없어 그는 자리를 박차고 경기장에서 나가버렸다.
게오르크의 감상은.
“후후, 겁쟁이 영감쟁이들.”
비웃음이었다.
게오르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이젠을 돌아보았다.
“아이젠, 내가 왜 줄곧 네 녀석을 암살하려 했는지 아느냐? 독살을 하려 했고, 흑기사들을 여럿 보내 묻어버리려고도 했지.”
“…하아. 하아. 왠데? 질투심 같은 거라도 있었나?”
“질투심? 후후. 그럴지도.”
게오르크는 라니에의 칼끝을 아이젠의 가슴 부근에 갖다 댔다. 심장이 있을 법한 부분의 살짝 아래였다.
“어릴 적, 네놈의 몸에 룬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가주님께서 심어놓았다지……. 그것이 내겐 불만이었다. 감히 서자에 불과한 네가, 나보다 더 좋은 걸 가지고 있다니. 참을 수 없지. 적자로서.”
“쿨럭! …그래서 날 죽이고 싶었나? 치졸한 수를 써서라도?”
“그래.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단 걸 깨달았다. 네놈에게 무엇이 있든, 내가 네 녀석보다 더 강하니까.”
“아직 제대로 끝맺지도 않고 너무 오만한 발언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그렇다면 소원대로 끝장을 내주마. 아이젠.”
아이젠은 최대한 객기를 부리고 있었으나 일어설 수 없었다. 게오르크의 칼끝이 찔러 넣인다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몸에서 피가 너무 많이 빠져나간 탓이리라. 아이젠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이제 게오르크의 모습마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실루엣만 남아 있었다.
그 실루엣이 아이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잘 가라, 아이젠. 내가 사랑하지 않는 동생아.”
실루엣이 손을 뻗어 아이젠의 얼굴을 감쌌다. 이제 곧 칼날이 아이젠의 배를 꿰뚫으면 그는 죽을 것이다. 아이젠은 설마 이것이 정말 자신의 최후인가 싶었다
‘아니.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아이젠은 아직 생사경의 경지에 올라서지 못했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전생에 못다 이룬 꿈을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아이젠의 눈빛에 강렬한 들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 정말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저렸다.
‘일어나, 아이젠! 넌 아직 더 할 수 있어!’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만 하는데!
실루엣이 아이젠을 덮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악!
아이젠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아이기스는 없는데?
푸른 기운은 아이젠의 심장을 기준으로 피어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놈아! 어서 일어나지 못해!”
아이젠을 뒤덮은 실루엣이 뒤로 물러서자, 그 실루엣은 게오르크가 아니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스승, 이화도였다.
아이젠은 눈을 번쩍 떴다. 이미 뜨고 있는 상태였는데 한 번 더 뜬 것이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실루엣은 다름 아닌 자신의 스승 이화도였다.
“……???”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아이젠은 그동안 이화도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환상이나 꿈속의 모습이었을 뿐,
지금은 현실이다. 현실 속에서 아이젠은 게오르크와 분명 맞수를 두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스승님이 바로 앞에?
“이놈아. 내 말 무시하냐? 나 늙었다고 뒷방늙은이 취급하는 게야?”
“…아뇨.”
“그럼 얼른 일어나! 쓰러져 있을 시간이 어딨느냐?”
그제야 아이젠은 넘어진 자신의 어깨에 걸쳐 있는 무언가를 살폈다. 나무로 된 물 양동이였다. 좌우로 하나씩, 2L 정도의 물통이 양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아이젠은 벌떡 일어났다. 다 해서 5kg도 되지 않는 무게인데 어째선지 그의 허벅지는 바들거렸다.
스승 이화도는 어느새 저만치까지 앞에 가 있었다.
“이놈아, 얼른 못 따라와!”
“네? 아, 네! 기, 기다리십시오, 스싱님.”
아이젠은 얼결에 그의 발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스승 이화도의 걸음걸이는 너무 빨라서, 아이젠이 아무리 빨라봤자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아이젠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내달렸지만, 이화도는 어느새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제야 둘러보니 이곳은 중원 무림.
아이젠, 아니, 이강철이 이화도의 밑에서 수련을 받던 바로 그 동네였다.
“이게… 갑자기 대체 뭔 일이야?”
그는 별안간 무림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그때였다.
“저기 팔푼이 지나간다!”
“야, 팔푼이! 얼른 이리 와!”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