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아이젠은 흥미로운 눈으로 게오르크가 말한 그 ‘그린 라인’을 살펴보았다.
‘실제로는 ‘선’이라기보다는 빛무리에 가까운가.’
그린 라인은 게오르크에게서 생겨났지만 그렇다고 게오르크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생성된 형태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린 라인 안에 있으면 게오르크는 배 이상 강해진다고 말했고, 아이젠이 느끼기에도 실제로 그런 것 같았다.
지금 게오르크의 오러에서는 좀 전보다 진한 농도가 느껴졌으니까.
“후우. 제법 강해진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나도, 전력을 더해볼까.”
푸확!
아이젠은 회혼의 끝을 연마해 강망태신의 유지를 좀 더 공고히 했다. 찌를 듯한 예기가 아이젠의 온몸에서 성기듯이 흩어져 나왔다.
아이젠은 조금 전 날린 섬광권기로 인해 자신의 내공 약 2할 정도를 잃은 상태였다. 달리 말하자면 섬광권기는 앞으로 총 네 번밖에 더 쓸 수 없다. 그 이후로는 쓰고 싶어도 내공이 모자라 사용할 수 없다.
“네 번. 앞으로 네 번의 섬광권기 안에 끝내주마. 게오르크 폰 그린우드.”
당신의 그 가면을 낱낱이 벗겨주리라. 그리고, 결승전에서 우승해 소가주가 되리라. 아이젠은 짧은 순간 목표를 다짐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게오르크는 헹 하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라니에를 움켜쥔 채로 아이젠과 거리를 벌려 섰다. 그의 표정에서는 슬슬 광기가 엿보였다. 곧 있으면 게오르크가 착한 척하는 연기도 막을 내릴 듯 보였다.
“네 번? 네 번이라… 섬광권기라는 것이 조금 전 네가 보여줬던 그 권법의 이름인 모양이지?”
“그렇다.”
“웃기는 소리. 보면 모르겠느냐, 아이젠? 이제 내 오러 아머는 뚫리지 않는다. 영역 선포 안에서 사용하는 나의 오러 아머는 말이다.”
우웅!
게오르크가 다시 오러 아머를 사용했다. 뚫려 있던 부분이 메워졌고 전체적으로 좀 더 진한 연두색의 오러 아머가 형성됐다. 아이젠의 섬광권기로도 뚫을 수 있을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강력한 ‘갑옷’이었다.
“네 번이 아니라 천 번이라도 불가능할 거다.”
‘흠. 근데 이름이 ‘참철검술’인데. 저건 방어막 아냐? 방어막도 참철검술로 치나?’
아이젠은 그런 의문도 살짝 들었으나, 새삼 생각해 보면 자신의 결사신권도 보법 등을 포함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었다. 아이젠은 자세를 잡고 기운을 펼쳤다.
“결사신권, 천수관음(千手觀音).”
화아아!
아이젠의 몸 뒤에 그림자처럼 천 개의 손이 뻗어 나왔다. 게오르크는 이번에도 놀랄 뻔했지만 이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투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표정이었다.
그렇다, 전투. 이것은 단순한 결전이 아니다. 서로의 생존을 걸고 싸우는 사투, 전투(戰鬪)였다.
실력을 엿보는 공방전은 끝났다. 이제, 정말로 온 힘을 다할 시간이었다.
* * *
탄탈로스 제국, 최전방 옥사비나와 슌타리아의 경계 지역.
테오발트 폰 그린우드 공작은 왼쪽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눈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제국군의 피와 살점이 튀었다. 공화국군도 마찬가지였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전선은 눈에 띄게 열세였다.
“크흠.”
테오발트 가주는 괜스레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탄탈로스 제국과 리타스나트 공화국은 현재 냉전 중. 그러나, 이것은 말만 냉전이지 실제로는 교전 중이라 봐도 무방한 상황 아닌가.
이 최전방 옥사비나는 언제나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오늘날의 지구에서야 나라마다 국경선이 그어져 있지만 이곳에는 국경선이라는 게 없다. 대충 어림짐작하여 헤아릴 수만 있을 뿐.
공화국에서는 이 옥사비나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 우기다 못해 직접 창칼을 쥐고 쳐들어오기까지 한 것이다. 자신들의 땅인 슌타리아에서부터 밀고 들어온 것.
테오발트는 자신의 참철검, 아티팩트 에레디아를 꽉 쥐었다. 에레디아는 태양의 검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선사하는 아티팩트이지만, 테오발트의 나이도 이제 내일모레면 예순이다.
아무리 그가 전쟁영웅이라 해도 그것은 벌써 25년 전의 이야기. 테오발트 가주는 지금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누군가가 앞으로 다가와 섰다.
“이야! 이거 제국의 전쟁영웅 테오발트 아니십니까? 살아생전에 보게 될 줄이야. 영광입니다?”
말투는 영광스럽다는 언급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툭 치면 부러질 듯한 젓가락 같은 다리를 소유한 그는, 오늘 공화국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적군의 총대장 헤파이스티온이었다. 나이는 이제 겨우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헤파이스티온은 낄낄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긴 머리가 아름답게 흩날리는 것이 괜스레 심기에 거슬리는 테오발트였다.
“이거, 이거. 진작 은퇴하셨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께 제가 너무 실례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후후. 나를 얕보는군, 공화국군의 개 주제에.”
“개? 하하! 그 개에게 물려 피를 흘리고 계신 쪽은 어디 사는 누구시더라?”
테오발트의 이마에 상처를 낸 장본인이 바로 헤파이스티온이었다. 헤파이스티온은 자신의 왼쪽 팔뚝에 둥글게 걸쳐져 있는 얇은 팔찌를 가리켰다.
“이 아티팩트 ‘전능의 팔찌’만 있으면 당신 같은 전쟁영웅이라도 속수무책입니다. 이제 힘의 차이를 좀 아시겠어요? 당신 같은 구시대의 인물은 이제 퇴장하셔도 된단 말입니다.”
“…….”
“왜요, 왜 말이 없죠? 더 할 말이라도―”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뭐라고요?”
“말을 받아줄 상대가 없으니.”
“그게 무슨 소리―”
그 순간이었다. 스륵 하면서 헤파이스티온의 얼굴이 흘러내린 것은.
마치 단숨에 칼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헤파이스티온의 코 위부터 정수리까지가 반 토막으로 잘려 절단면 위에서 흘러내렸다.
헤파이스티온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자각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엇.”
코 밑에 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털썩!
헤파이스티온의 사체가 바닥에 엎어짐과 동시에, 테오발트 역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뒤쪽에 서 있던 제국군 병사가 테오발트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린우드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으음. 나는 괜찮다. …저기 적군 총대장의 시체가 있다.”
“예? 아, 이럴 수가! 그린우드 공작님이 적장 헤파이스티온을 쓰러뜨렸다!”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주변에 제국군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 그린우드 공작님이 적장 헤파이스티온을 쓰러뜨렸다!
- 그린우드 공작님이 적장 헤파이스티온의 머리를 잘랐다!
- 그린우드 공작님이 적장 헤파이스티온을…….
그 말을 듣자 우왕좌왕하던 공화국군은 주춤주춤 퇴각하기 시작했다. 테오발트는 체력이 다해 넘어진 상태로도 크게 외쳤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공화국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아군 병력이 전진해 가고, 테오발트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때 그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섰다. 그림자가 크게 지는 것을 보고 테오발트 가주는 누가 온 건지 이해했다.
“이스보셋 장로.”
“가주님. 커흠. 괜찮으십니까?”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네. 이스보셋 자네도 나와 동갑이니 이해할 텐데?”
“크흠. 그야 그렇지요.”
한마디 할 때마다 목을 가다듬는 버릇이 있는 이스보셋 장로. 테오발트의 오른팔이 사울 장로라면 그는 왼팔이었다.
이스보셋은 주로 전선에서 활약하는 사람이었고 오늘 역시도 테오발트 가주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었다.
“혹시 아십니까? 크흠. 소가주전 말입니다.”
“지금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딨나.”
“큼. 이제 막 결승전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
테오발트는 그제야 이스보셋을 올려다보았다. 테오발트가 오른팔을 내밀자 이스보셋이 잡아 일으켜 세웠다.
테오발트는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퇴각하는 공화국군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누가 결승전에 올라갔는가?”
“커흠.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 없으시다 하셨습니다. 방금.”
“이 사람 참.”
“들으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큼.”
“괜히 재지 말고 말해주게. 누구인가?”
이스보셋 장로는 피식 웃었다.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과, 크흠, 아이젠 넷째 도련님입니다.”
“……! 그 두 아이가.”
게오르크야 짐작한 대로였다. 그런데 아이젠도 결승전까지 올라섰다니? 그야말로 그가 말한 것처럼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지 않은가.
‘아이젠.’
아이젠은 클라우디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었다. 그래서 안 그러려 해도 왜인지 알게 모르게 애정이 더 가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열여섯 살이 되기까지 망나니짓만 거듭해온 통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던 테오발트였다. 대체 클라우디아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은 것인지.
‘클라우디아…….’
테오발트는 어느 날 아이젠이 한스를 두들겨 패고 가주실로 불려왔던 때를 상기했다. 그때 아이젠은 스스로 폐관에 들길 원했다. 그리고 주먹을 쓴다 하였다.
참철검가에서 주먹이라니, 초대 가주가 들으면 놀라 나자빠질 소리다.
하지만, 테오발트는 그린우드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린우드의 규율과 양식은 낡았다. 이제는 바뀔 필요가 있고, 그것은 검(劍)이 아닌 권(拳)을 쥐는 것부터 최초로 시작될 것이었다.
참철검 에레디아를 손에 쥐고 있는 테오발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스보셋 장로가 테오발트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가주님. 직계에서 소가주가 나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축하받을 일이 아니네, 이스보셋 장로. 두 아이 중 하나는 결국 폰의 이름을 잃게 될 것 아닌가.”
“그도 그렇군요. 하지만 두 분 다 잃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테오발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피가 흘러넘치는 전선에서도 하늘만은 속도 없이 푸르고 맑았다.
아마 곧 공화국에서 선전포고가 떨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테오발트는 바쁠 것이다. 공화국과 수없이 많은 전쟁을 벌여야 할 테니까.
나이가 벌써 환갑에 가까운 테오발트이기에 은퇴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레오 베네딕토 황제만은 테오발트의 전력을 믿고 그에게 총사령관 직을 맡기겠지만, 테오발트가 극구 사양한다면 황제로서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발트는 은퇴할 생각이 없다. 사실 그 누구보다 공화국과의 전면전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꽈악― 에레디아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더 늙기 전에, 공화국을 모두 박살 내야만 한다.’
테오발트에겐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제국 내에서도 극소수밖에 알지 못하고, 남들에겐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테오발트는 이스보셋 장로를 돌아보았다.
“교전도 끝났으니, 잠깐 그노시스로 방문해 볼까.”
“그러시지요.”
“그동안 잠시 이곳 옥사비나를 맡아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테오발트는 이스보셋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금방 돌아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