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컥. 컥.”
헤르만은 아직 죽지 않았는지 컥컥대면서 아이젠과 제이슨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찔끔 눈물 한 방울이 새어 나왔다.
“키… 킬킬킬… 킬킬킬킬…….”
헤르만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분만이… 문제인 것 같나…? 너희 그린우드에는… 쿨럭!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나?”
“무슨 소리지?”
아이젠이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몸을 좀 더 숙이자, 헤르만 역시 허리를 앞으로 조금 굽히며 말했다.
“그, 그린우드… 너희 그린우드에도… 그분의 마수가 뻗쳐… 커헉! 쿨럭!”
헤르만이 피를 토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목은 거의 잘려 나갈 듯 찢어져 있었다. 아직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게오르크 폰 그린우드! 너희의 첫째 공자도 내게서 아모스를 사갔다. 그자 역시… 그분의 지배 아래에 있는 거라고!”
“…….”
“쿨럭! 콜록! 크헉…….”
헤르만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제야말로 숨이 멎으려는 듯했다.
아이젠은 제이슨을 뒤돌아보았고, 제이슨은 충격을 받았는지 손으로 입을 감싸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군요. 게오르크까지…….”
“그러게.”
게오르크는 역대 그린우드 중에서도 같은 나이대에선 가장 뛰어난 기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헤르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아모스의 힘이었던 걸까?
아이젠은 무릎을 세워 초연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 충의가 얼마나 대단한진 알겠어. 그런데, 스스로 목을 그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었어야 할 텐데.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을 것 같거든.”
“…….”
“얘기 고마웠다. 잘 가라.”
쿵!
결국 헤르만의 신형이 침대 위에 쓰러졌다. 아이젠은 헤르만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수습해.”
“시선이 안 닿는 곳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고생해라.”
아이젠은 제이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의 이마에는 선명한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짐작대로 아이젠은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현무기공, 동심상(冬心想).’
화아아…….
아이젠이 아이기스의 힘을 활성화시키기까지 했지만, 쿵쾅 뛰는 심장은 쉽게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간츠펠트라는 놈은 여러모로 천마 도강문을 떠올리게 했다. 기괴한 방식으로 자신의 내공을 만천하에 뿌리는 것이나, 그를 믿고 따르는 수하가 적지 않다는 것이나.
“용서하기는 어렵겠어.”
아이젠은 스승 이화도의 최후를 다시금 머릿속에 그렸다. 그날의 풍경화라도 그린 것처럼 아직도 기억 안에서 생생하게 그 모습이 남아 있었다.
‘철이야, 너의 주먹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너라.’
그날에 들었던 스승님의 음성을 아이젠, 아니, 이강철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평화라고 하셨죠, 스승님.’
무력으로 이뤄낸 평화도 평화라면, 기꺼이 그리하겠노라.
아이젠은 불끈 주먹을 쥐고 천막에서 떠나갔다.
* * *
“도련님!”
아이젠이 원형 경기장 대기실 앞 복도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모니카였다. 모니카는 아이젠의 손을 붙들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다친 덴 없으시구요?”
“없는 거 봤잖아.”
“그나저나 아까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아우구스트 님이 우뚝 멈추시더니…….”
아직은 아이기스에 대한 정체를 발설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아이젠은 함구하기로 했다.
“글쎄? 갑자기 기권하고 싶었나 보지.”
“그, 그런가요?”
“시간 얼마나 남았어?”
“이제 15분 정도요. 바로 이어서 경기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어.”
무혈신공을 다시 운공하려면 약 20분 정도가 더 필요하다. 즉 경기가 시작하고도 5분 정도는 아이젠은 결사신권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결승전의 상대는 다름 아닌 게오르크. 그와의 대결에서 무혈신공을 쓰지 않고 5분 이상 버틸 수 있을는지.
“해봐야겠지만.”
아이젠은 딱히 패배감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긴장해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아이젠.”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아이젠을 불렀다. 아이젠은 대기실로 들어가려다가 그 누군가를 마주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
“그래.”
그건 게오르크였다. 게오르크는 하인 둘 정도를 대동한 채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모니카는 짐짓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아이젠과 게오르크가 편히 대화할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아이젠은 눈앞까지 다가온 게오르크를 올려다보았다. 게오르크의 키가 아이젠보다 머리 반 개만큼 더 컸다.
“음? 키가 좀 컸구나?”
“성장기라서요.”
“하하. 잘 먹고 잘 커야지. 그래, 아픈 덴 없고? 아까 옆구리를 크게 베였을 텐데.”
“멀쩡합니다, 지금은.”
“그래. 아우구스트와의 경기, 잘 봤다. 제법이더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아이젠이 별 반응도 없이 선선히 대답만 하자, 게오르크도 김이 빠진 듯했다.
“그럼. 결승전 기대하마.”
“네, 첫째 공자님.”
그렇게 게오르크가 아이젠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아이젠이 그를 불러 세웠다.
“공자님?”
“음?”
게오르크가 돌아보자, 이번엔 아이젠이 게오르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올려다보는 아이젠의 눈빛에 살기는 없었다. 하지만 두려운 기색도 없었다.
“이렇게 된 마당인데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계실 건가요? 좀… 지겹네.”
그건 게오르크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게오르크는 아이젠의 질문을 받고 잠시 멈칫한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싸악 지웠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이젠.”
“독 맛은 좋았습니다, 공자님. 기억하시죠?”
“…….”
게오르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아이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그 무표정에서 싸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기권해라, 아이젠. 그게 네가 살 유일한 방법이다.”
“…싫다면. 어쩌실 건가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다. 한스는 살려두었지만 아이젠 너는 살려둘 생각이 없어.”
“아모스만 있다면 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게오르크는 아이젠의 갑작스러운 언동에 놀랐는지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표정이 다시 지워졌다.
아이젠은 헤르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의심 정도였으나, 게오르크의 조금 전 반응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게오르크는 정말로 아모스를 복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게오르크가 천연덕스레 말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구나.”
“모른다는 것치곤 격하게 반응하시네요.”
“후후.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게오르크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기권하거라. 그러리라 믿으마. 형을 실망시키지 마라.”
툭툭. 게오르크는 다정다감하게 아이젠의 어깨를 두드리고 복도를 걸어 떠나갔다.
살 떨리는 긴장감 속에서 풀려나자, 아이젠보다 모니카가 더 맘졸였다.
“후아! 뭐, 뭐예요? 게오르크 공자님, 원래 저렇게 무서운 분이셨나…?”
“모니카.”
“네?”
“결승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충격받지 마.”
“에이. 저 이제 사소한 일로 충격받고 그러지 않아요. 보세요, 결승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덤덤하잖아요.”
말은 그러면서도 모니카의 손과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이젠이 실눈을 뜨고 그녀를 보자 모니카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아하하.”
“충격받지 말라는 건 충고가 아니야.”
아이젠은 이미 게오르크가 떠나가고 없는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경고지.”
* * *
“후우…….”
아이젠은 마지막 남은 대기 시간 동안 자리에 홀로 앉아 정좌를 취했다.
무혈신공은 현재 손톱만큼도 발현되지 않기에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명상을 취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가만.’
아이젠은 번뜩 눈을 떴다. 그는 마주 보고 있는 자신의 두 아이기스를 보았다. 아이기스는 시퍼런 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아이기스와 아모스는 다르다. 아모스는 간츠펠트라는 자의 오러를 녹여 만든 알약. 그리고 그 알약을 먹은 사람들은 타인의 힘에 기대어 비약적인 힘을 내게 된다.
그러나 아이기스는 본래부터 아이젠이 가진 힘이다. 아이젠의 오러를 통해서만 그 힘이 발현되며, 동심상과 마비규정 모두 현무의 가르침 없이 아이젠 스스로 습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왠지 게오르크와의 대전에서만큼은 쓰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게오르크는 아모스를 사용한다. 아이젠이 스승님께 제대로 된 보답을 하기 위해선, 아이기스의 힘조차 배제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무력으로만 맞서 싸워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네 생각이냐?]
갑자기 현무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젠의 생각을 전부 읽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
[흐음. 지안니가 애써 네게 준 힘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난 네게 힘을 빌려주는 게 아니야. 네가 이미 가지고 있는 힘을 쓰는 거지.]
“알아.”
하지만 아이젠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잠시 조용한 가운데, 현무가 말했다.
[…알았다. 참 외골수구나, 너.]
“그런 말 많이 들었어.”
아이젠은 대화를 끝마치고 아이기스를 해제했다. 걸쇠에 손가락을 걸자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기스가 팔뚝에서 풀렸다.
“조금 있다 보자고.”
아이젠의 말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이젠은 갑자기 가벼워진 두 팔뚝을 매만졌다. 그때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아이젠은 모니카인가 싶어 외쳤다.
“들어와.”
그러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모니카가 아니라 유진이었다. 유진은 문간에 기대어 아이젠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웬일이냐?”
“그냥.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 자식이. 불길한 소리를 하네.”
“잘할 수 있는 건가? 나야 뭐 너한테 얻어맞은 기억만 있지, 네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니까.”
유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말은 똑바로 안 하지만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아이젠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젠은 유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야.”
“엉?”
“나 되게 잘 싸워.”
아이젠은 양손에 들고 있던 아이기스를, 유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유진은 뭔가 싶어 받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야, 야! 이 귀한 걸. 어, 얼른 치워.”
“네가 가지고 있어.”
“뭐?”
“그리고 내가 무사히 돌아오면 돌려줘.”
“야…… 좀 많이 부담스러운데, 이거.”
때맞춰 허공에 마테오 백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아이젠은 유진을 스치고 복도로 나섰다.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유진. 난 지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생사경의 경지를 달성할 때까지, 패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아이젠은 당당한 걸음으로 복도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