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에 깃들어 있는 힘은, 아이젠의 힘. 즉 원래는 아이젠의 내공이다.
그렇다면 지금 아이기스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이젠이 종전에 쓰고 남은 회혼의 기운이 조금.
‘비록 지금의 난 운공을 할 수 없는 상태지만.’
무혈신공을 운공할 수 없어도, 아이기스에 남아 있는 회혼의 기운을 꺼내 쓸 수는 있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동심상(冬心想).’
차아아―
아이젠의 가슴속에 자리한 열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마치 뜨거운 불길 위에 흰 눈을 끼얹은 것처럼.
“다치기 싫으면 기권하십시오, 아이젠 님!”
그때, 아우구스트가 매섭게 검을 휘둘러 왔다. 아우구스트 역시 프란츠와 마찬가지로 곡도를 쓰고 있었는데, 프란츠의 것보다 좀 더 면이 넓은 칼날을 가지고 있었다.
“안 다칠 것 같은데.”
아이젠은 주먹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아우구스트의 곡도 검면에 자신의 아이기스를.
태앵!
걸어 막아냈다. 아이기스에는 자그마한 흠집도 나지 않았다.
“아닛?!”
아우구스트의 곡도가 만년한철로 만든 참철검이라 해도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은 아티팩트. 게다가 아이기스 역시 그 원형은 참철검.
아우구스트의 참철곡도 따위로 깨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윽!”
그러나 아우구스트는 당황하지 않고 곡도를 거둬들인 뒤,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아이젠을 향해 날카롭게 칼날이 쏟아졌다.
“참철검술, 연공난무!”
츠파파파팟!
날아드는 참격을 아이젠은 정면에서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살갗에 닿았다간 전부 찢겨 나갈 거야.’
지금 이 순간 아이젠에게 필요한 것은 고도의 집중력이었다. 그는 양팔을 교차했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강해졌을 때의 자신을!
태태태태태탱!
아이젠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참격들을 쳐냈다. 아이기스를 이용해 모든 공격을 깔끔하게 무위로 돌려버린 것이다. 아우구스트의 연공난무는 아이젠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아우구스트는 아연실색해졌다.
“…이게 무슨!”
“끝난 건 아니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최강의 방패는 최강의 창이 되기도 한다. 아이젠의 암가드는 비록 방패는 아니었지만, 이토록 단단하다면 단순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이젠은 다시 참철검술의 자세를 잡는 아우구스트를 향해 아이기스를 빙 휘둘렀다.
퍽!
“컥!”
그리고 아우구스트의 코가 깨졌다.
“윽! 제길!”
후두둑! 아우구스트가 코피를 쏟아냈다. 이 정도로 코뼈가 부러지진 않았을 테니 안에 고여 있던 핏물이라도 터졌나 보다.
“참철검술, 오러 검기!”
부웅!
아우구스트의 곡도 위에 그린 오러가 날카롭게 둘러싸였다. 아이젠의 회혼과 비슷한 느낌으로 벼려지는 그 칼날을, 아우구스트는 들이밀었다.
“이제 안 봐드릴 겁니다!”
아우구스트도 나름대로 사활을 걸고 이 소가주전에 참전한 것이다. 같이 사활을 건 형 프란츠는 죽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트는 자신이 더 힘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인 3 방주님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아버지, 지켜봐 주십시오!’
3 방주 페르디난트는 아우구스트의 기원대로 관객석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양손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둘째야. 이제 너만이 답이다.’
페르디난트는 3 방계를 직계로 만들기 위해 두 아들을 괴롭혀왔다. 두 아들의 몸에 칼자국을 새길 때마다 자신의 심장에도 자상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직계가 되어 공작 지위에 오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는데!
비뚤어진 애정도 사랑이리라. 페르디난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우구스트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우구스트는 페르디난트의 눈빛을 받고 더욱 곡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참철검술, 속동검격!”
쉬익!
아우구스트가 바람을 찢고 아이젠에게 돌격했다. 아이젠도 이번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트가 워낙 빠른 탓도 있었지만, 아이젠이 아직 강망태신의 여파를 겪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야.”
비틀― 아이젠의 발목이 접질리는 그 짧은 순간을 아우구스트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슈팟!
카앙!
아우구스트는 재빠르게 아이젠을 두 차례 베었다. 뒤의 일격은 아이젠이 잽싼 손놀림으로 아이기스로 막아낸 탓에 먹히지 않았지만, 첫 번째 공격은 먹혔다. 아이젠은 옆구리가 깊게 베여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 즉시 아이젠은 발로 아우구스트를 차 밀어냈다. 아우구스트는 크게 밀려났지만 아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이젠이 통증을 호소했다.
“끄응. 역시 칼에 베이는 건 아파.”
“…훗! 오러 검기를 얕보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아우구스트는 사실 조금 놀랐다. 그 짧은 틈에도 공격을 한차례 막아내다니. 분명 일격에 성공한 것은 자신인데 어째선지 이긴 듯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군. 정말로.’
이게 정말 집쥐공자라는 별명을 품고 있던 그 아이젠? 대체 지난 몇 달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우구스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련의 기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트 본인 역시도 아버지에게 그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도 말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걸…….’
그러나 어쨌든 공격을 먹인 것은 사실.
주륵!
아이젠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근데 그 양이 제법 과도한 편이었다. 수도꼭지라도 단 양 철철 넘쳐 나오고 있었으니.
옆구리의 절단면이 단순하게 베인 것이 아니라 톱으로 찢어낸 것처럼 흉하게 잘려 있던 탓이었다. 말하자면 오러 검기는 실톱 같은 것이었다.
“흡!”
아이젠은 복압을 강하게 주었다. 그러자 옆구리에 뚫려 있던 수도꼭지가 틀어막혀, 더 이상 피가 새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아우구스트는 더 놀랄 수도 없어 어이가 없는 지경이었다.
아이젠이 말했다.
“그래. 얕본 적은 없지만.”
팟! 아이젠이 도약했다. 그는 아이기스를 휘두르며 아우구스트를 공격했고, 아우구스트는 아이젠의 빠른 손놀림을 막아내고자 곡도를 휘둘러야 했다.
챙! 채채챙! 챙!
허공에서 만년한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몇 차례 받아내던 아우구스트는 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해 뒤로 크게 뛰어 전투에서 달아났다.
“도망치기냐?”
“전술적 후진입니다.”
“그럼 난 전술적 전진할게!”
팟! 아이젠이 눈 깜짝할 새 아우구스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윽?!’
아우구스트는 당황하여 곡도의 폼멜 부분으로 아이젠을 내려치려 했지만, 아이젠의 주먹이 먼저였다.
빠악!
아이기스가 아우구스트의 손목을 강타했다.
“크악!”
아우구스트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곡도를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오호, 힘 센데?’
아이젠은 내심 놀라며 반대쪽 아이기스로 한 번 더 내려쳤다. 그와 동시에 아우구스트의 손목이 땅바닥과 입맞춤하며 결국 그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탱그랑―
“크윽!”
“무기를 손에서 놓으면 쓰나.”
퍽!
아이젠이 아이기스로 아우구스트의 머리를 올려쳤다. 핏방울이 바닥을 수놓으며 날아가고, 아우구스트는 잠시 눈에서 검은자위가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 정도에 당할 녀석은 아니야.’
희번득! 아우구스트는 다시 눈을 번쩍 떴고, 바닥에 떨어진 곡도를 창졸간에 주워 들었다.
“참철검술, 연풍참!”
쉬이익!
바람으로 만들어진 칼날이 아이젠에게 닿기 직전.
‘이건… 막을 수 없다!’
아이젠은 본능적으로 지금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칼날의 목표는 아이젠의 왼쪽 옆구리. 오른쪽 옆구리는 이미 베였으므로 둘 다 베인다면 제대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기 힘들 것이다.
‘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별도리는 없어 아이젠은 이를 악물고 칼날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
아이기스가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동심상이 발현되는 것처럼. 그러나 동심상은 아니었다. 아이젠은 이미 동심상을 실현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심장이 현 사태를 느리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것은 아이기스의 힘이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아이기스의 사용법 따위 알지 못한다.
‘동심상 말고 다른 기술은 모르는데.’
여기까지 생각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우구스트의 곡도는 여전히 아이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아이기스로 쳐내기에는 시간이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응? 뭐지 이건?’
아이젠의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단어들이 떠올랐다. 생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들.
아이젠은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그 단어들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마비규정(痲痹規定).”
쩌엉!
그러자 사막마을 그노시스에 잠시 서리 기운이 내려앉았다.
관객석에 앉은 장로들, 방주들, 그리고 하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그저 조금 전까지 아이젠을 압도할 것처럼 덤벼들던 아우구스트가, 별안간 멈춰 선 것에 의아함을 표출할 뿐이었다.
“…뭐야?”
“왜… 안 움직이지?”
“아우구스트 님께 무슨 일이…?”
“…….”
사울 장로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랐다. 이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니.
아이젠은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야트막한 찬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기술을 전에 어디서 보았는가를 떠올랐다.
‘최근 일이야.’
멀지 않은 기억이었다. 계율의 관에서 아이젠은 현무와 맞붙으며 자신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던 일을 상기해 낼 수 있었다.
‘그때와 똑같아.’
아우구스트는 그날의 아이젠처럼,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이젠은 그때 말이라도 했는데, 아우구스트는 입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그는 당황스러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왜 자신의 몸이 갑자기 멎어버린 건지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귀찮게 자꾸 불러낼래?]
그때 아이젠의 귓가에 현무의 목소리가 울렸다.
‘넌 뭐 너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하는 거냐?’
[그래. 평소엔 잠을 많이 자둬야 하거든.]
‘누가 거북이 아니랄까 봐.’
[거, 거북? 거북이 따위랑 날 비교하지 마라. 나는 현무다!]
‘마비규정이라는 건 뭐지? 너의 기술인가?’
[내 기술에는 이름이 없어. 애초에 이름이라는 건 전부 인간들의 관념적인 약속에 불과하잖아.]
‘하지만, 이 힘을 사용하기 전에 머릿속에 분명 그 단어가 떠올랐는데. 마비규정이라는.’
[그렇다면 네가 이름을 붙인 거겠지. 너 역시 인간. 관념에 지나지 않는 약속을 너 또한 하고 있을 뿐.]
‘…흐음. 그래?’
이해하기 조금 어려웠지만 요약하자면 즉석에서 떠오른 이름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아이젠은 처음 써보는 힘을 잘도 시전했다.
아우구스트는 지난날의 아이젠과 달리 아직도 몸을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내가 지은 이름이라면… 그래, 그러면 이 오러는 ‘현무기공(玄武氣功)’이라고 이름 붙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