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현무기공 】
에버쏜즈의 원형 경기장. 사람들의 기다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경기장에 나와 있던 아우구스트는 어느덧 긴장감까지 사라진 뒤였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희미해졌달까. 대략 30분 정도나 대기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관객석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드니엘 장로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 이제 그만 기다려야겠소! 이럴 수는 없소. 아이젠은 기권 처리합시다!”
벌떡 일어나 그를 만류한 것은 사울 장로였다.
“오드니엘 장로,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소! 얼마나 더 기다리란 말인가? 소가주전이 장난이오? 다름 아닌 다음 대 가주를 결정 짓는 중요한 행사요!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린우드 가문의 명운을 결정 짓는 이 소가주전보다 중요한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으음…….”
오드니엘 장로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고, 그렇기에 현시점에서 가문 내에서 가장 입김이 센 사울 장로도 받아칠 말이 없었다.
기다림이 벌써 30분을 넘었다. 테오발트 가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이젠은 이미 기권 처리되었을 것이다.
오드니엘 장로는 의기양양해져서는 사자처럼 다른 장로들을 등 뒤에 거느리고 말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맞는 말이오!”
“오드니엘 장로 말이 맞소!”
“검도 안 쓰는 아이젠 님에게 얼마나 더 배려를 해줘야 한단 말입니까?”
“그럼, 그럼! 더 이상의 편의는 특별 대우요!”
결국 사울 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는 문득 멀리 앉아 있던 모니카와 눈이 마주쳤다. 모니카는 자못 간절한 눈빛으로 사울 장로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사울 장로도 예외를 둘 수 없었다.
사울 장로는 멀리 아래편, 원형 경기장 중앙에 서 있던 마테오 백작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마테오 백작은 사울 장로의 눈빛에서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가 시작되고도 아이젠 폰 그린우드 공자님께서는 30분째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마테오 백작이 말했다. 그러자 사위가 한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전쟁영웅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기 위함이리라.
마테오 백작이 목을 큼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이에 따라 아이젠 공자님께서는 더 이상 경기를 지속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 기권 처리하도록 하겠습…….”
“잠깐!!”
마테오 백작의 말이 끝나려는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잠깐’을 외치며 마테오 백작을 불러 세웠다.
마테오 백작은 어디서 목소리가 들린 건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헥, 헥.”
마침내 원형 경기장 안쪽으로 털레털레 걸어 들어오는 아이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젠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라 옷가지조차 절어 있었다.
“저 왔습니다. 휴우, 안 늦었죠?”
아이젠은 이마에 묻은 땀을 닦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 *
‘도련님!’
모니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불안을 훨훨 날려 버리고, 두 주먹을 꽉 쥐고 앉아 있었다.
비록 저기 있는 오드니엘 장로나 다른 방주들, 각 방계의 하인들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모니카는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아이젠이 돌아오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왜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시지?’
그때였다.
“웃음을 숨겨라, 모니카. 사람들이 널 적으로 볼 거다.”
“으익!”
옆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모니카는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빈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림자처럼 희미한 흑기사 제이슨. 제이슨이 먼저 모니카를 부르지 않았다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 중 지금 제이슨의 모습이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 제이슨 흑기사님? 언제 오셨어요? 아니, 그전에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시고.”
“질문이 많군.”
“대답해 주세요! 조금 전에 아이젠 도련님이 돌아오신 거랑 관련이 있는 거죠?”
“그래.”
제이슨의 대답은 거기까지였다. 조금 전 아이젠이 모니카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딱히 걱정해서라기보다는, 또 모니카가 호들갑 떨 것을 받아주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제이슨은 기절한 헤르만을 기사단에 넘기고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아이젠은 헤르만의 숨이 붙어 있길 원했다. 그에게서, 배후에 대한 정보를 캐내야 했으므로.
“일이 조금 있었다.”
그 한마디로 제이슨은 그간의 일을 축약했다. 물론 모니카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배제한 채였다.
“일이라니요? 설마 아이젠 도련님께 무슨 큰일이라도…!”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모니카.”
제이슨이 모니카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왠지 전에 없이 따뜻해 보였다.
“주인님을 믿어. 그분께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절대 하시지 않는다.”
“그, 그렇지만… 땀 범벅이 돼서 오신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그분께서 땀을 흘린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의심하지 마라. 유념하지도 마라.”
제이슨은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보는 것은 아우구스트의 앞에 서 있는 아이젠이었다.
“네 걱정이 그분의 행보에 걸리적거리니까.”
* * *
아이젠은 온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려 애썼지만, 닦으면 또 바로 그 자리에 땀이 배어나와 별 의미가 없었다.
마테오 백작은 그런 아이젠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건이라도 가져다드립니까?”
“네? 아. 괜찮아요, 마테오 백작님.”
“경기를 진행할 수 있으신지요? 사실 이미 많이 늦긴 하셨습니다만.”
“기권 처리된 건 아니죠?”
“1초라도 늦었으면 그리되실 뻔했습니다.”
“그럼 할게요.”
기왕지사 소가주전 우승을 목표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허무하게 기권 처리되는 것은 아이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웃통을 벗어 까더니 허리춤에 묶었다. 땀에 절은 옷이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이젠의 온몸에 자리해 있던 근육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몸을 바라보던 아우구스트는 무의식중에 침을 꿀꺽 삼켰다.
‘와, 완벽해.’
아이젠의 몸은 조각가들이 만든 석고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신을, 때로는 한 인간을 조각하기도 하는 그들의 석고상은 저마다 현실성이 없는 완전한 근육질의 몸으로 묘사가 되어 있었는데, 아이젠의 몸이 지금 딱 그 짝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아이젠이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 앞에 동전을 던져줄지도 모를 일이리라. 조각상으로 착각해서.
아우구스트는 금세 상념을 털어내고 참철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아직 검은 뽑지 않았다.
“모, 몸이 좋으시군요.”
“어, 고맙다.”
“많이 늦으셨는데요.”
“미안. 급한 일이 좀 있었어.”
“저와 겨루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셨습니까?”
아우구스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아이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화내지 마. 내게 있어선 나름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알았습니다. 믿도록 하죠. 하지만, 이왕 참여해 주신 이상 대충하시는 것은 절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 성심성의껏 임하도록 하지.”
말을 끝내고 아이젠이 마테오 백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테오 백작은 아우구스트와 아이젠 사이에 섰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파직! 마테오 백작이 사라졌다.
고오오오―
한순간 좌중이 고요해졌다. 관객석에서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사울 장로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오드니엘 장로라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아이젠에게 된소리라도 한 방 먹일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정작 그 오드니엘 장로는 뭘 하고 있는가.
‘저, 저런 몸을 가지고 있다니.’
그는 아이젠의 조각 같은 몸을 보며 감탄하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열여섯 살의 나이에 저런 섬세한 근육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오드니엘 장로는 저 나이 때 그러지 못했다. 아니, 나이를 한참 더 먹었을 전성기 때도 저만큼의 근육량은 만들지 못했다.
바위라도 끌어 내릴 것 같은 광배근, 거인조차 들어 올릴 것 같은 대흉근과 이두박근. 그리고 선산 몇 개쯤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 대퇴사두근과 종아리까지.
‘저게 정말 열여섯 살?’
믿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됐다. 무슨 약물이라도 먹인 건가, 뭔가. 그럴 리야 없겠지마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검을 못 쓴다며 아이젠을 하잘것없는 놈 취급하던 다른 장로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각 방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울 장로는 그제야 그들의 분위기를 읽고 피식 웃었다.
‘다들 아이젠 공자님께 놀라고 있군.’
왜 아니겠나. 자신도 검은뿔 기사학교에서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문득 감회가 새로워지는 사울 장로였다.
어쨌든 경기는 이제 시작됐다. 적어도 말소리로 방해할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사울 장로는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젠 공자님, 보여주십시오. 당신의 힘을.’
그리고 그 아이젠과 아우구스트는 어쩌고 있는가 하면.
“…….”
“…….”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아니, 사실 노려보는 것은 아우구스트 혼자였다. 아이젠은 얼른 덤벼보라는 듯한 눈짓으로 아우구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아우구스트가 덤비지 않자, 아이젠이 입을 열었다.
“계속 쳐다보기만 할 거냐? 오래 기다렸다며.”
“먼저 덤비십시오.”
“싫은데.”
“저도 싫습니다. 전 미지의 적을 상대로 함부로 검을 휘두를 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
아이젠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실, 지금 어떤 상황이냐면.
‘아오, 씨. 아파 죽겠네.’
아이젠은 실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강망태신의 반동으로 근육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두 발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누가 발바닥을 망치로 계속 내려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땀을 계속 흘려대는 이유가 바로 그 탓이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트가 이대로 계속 덤벼들지 않는다면, 그건 오히려 아이젠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는 천차횡도의 여파로 1시간 동안은 무혈신공을 운공할 수 없는데, 시간이 조금 지났다곤 하나 아직도 40분 정도는 더 운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만 있는 건 또 내가 좀이 쑤셔서.”
“네?”
“아니야.”
아이젠은 좀이 쑤시는 걸 못 견뎌 하는 사람이었다.
“프란츠 얘긴 들었어.”
꿈틀― 아우구스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뭔 무슨 말을 해. 얘기 들었다고. 유감이다. 안된 일이야.”
“지금 절 동정하시는 겁니까?”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그리고 동정이 나쁜 건 아니잖아.”
“나쁜 건 아니죠. 하지만 하지 마십시오.”
“그건 왜지? 네 형의 넋을 위로하는 게 잘못된 일인가?”
“잘못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 말란 말입니다!”
팟!
결국 아우구스트가 뛰어들었다. 아이젠은 딱히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의도를 품고 프란츠를 입에 담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우구스트를 도발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 녀석도 제법 다혈질이네.’
아이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젠에게는 이제 그 다혈질적 성격을 중화할 만한 요소가 생겼다.
‘동심상(冬心想).’
―화아아아…….
아이젠의 양팔에 매여 있던 아이기스가 시퍼런 빛으로 빛났다. 그와 동시에 아이젠의 심장이 차가워졌고, 흥분감으로 고조되던 그의 기운도 얕게 가라앉았다.
이제, 시험해 볼 시간이었다. 무혈신공을 운공할 수 없기에.
“그럼 아이기스를 잠깐 써볼까.”
아이기스에 담긴 다른 힘을, 테스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