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이젠 폰 그린우드! 세상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요아힘이 외치는 말에 아이젠이 반응했다.
“오랜만에 듣는 별명 타령인걸. 그래, 뭔데?”
“바로 ‘무신(武神)’이다! 네 녀석이 휘두르는 주먹 따위, 내게는 애송이 권법에 불과해!”
“무신?”
아이젠은 힘을 운용하다가 얼이 빠져 피식 웃었다. 무신이라니, 그건 자신의 스승님이었던 이화도의 별호였다.
“네까짓게?”
아이젠은 이강철이던 시절 투신(鬪神)이라 불렸다. 투신은 싸움의 신이라는 뜻. 그만큼 아이젠이 많이 싸우기도 했고, 전장에서 활약한 경험치가 많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스승 이화도는 무신이었다. 무신(武神)은 무의 신이라는 뜻. 이화도가 있는 한 이강철이 물구나무를 서도 얻을 수 없는 별호였고, 그렇기에 스승 이화도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무신이라는 별호는 이강철이 다가설 수 없는 영역이었고, 스승님이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섰음을 증명하는 가치 있는 이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별호를, 고작 남의 힘이나 빌려 쓸 줄 아는 저딴 놈이 쓰고 있다니.
“그 세계와 이 세계는 다른 세상이지만, 그래도 열이 받는걸.”
“뭐라고?”
“아냐. 혼잣말한 거다. 무신이라고 했지? 어떤 의도로 네 별명을 내게 말해주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이젠의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여 빛났다.
“동기 부여는 확실히 됐다.”
“…무슨 동기 부여?”
“네놈과. 온 힘 다 바쳐 싸울 동기.”
아이젠의 몸에서 회혼이 들끓어 올랐다. 불길처럼 솟아오른 회혼을 아이젠은 몸 안에 가두고자 애썼다.
‘이걸 쓰면 소가주전에서는 힘을 못 쓰게 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가진바 힘을 모두 바치는 것, 그것이 바로 결사신권이 아니었던가!
아이젠은 알브레히트와의 싸움에서 썼던 그 기술을, 지금 이곳에서 다시 발현하는 것이었다.
“결사신권, 사신강림: 강망태신(江望太神).”
* * *
한편.
제이슨과 발터는 거친 사막지대 위에 서 있었다. 그노시스는 애초에 사막마을. 대부분의 대지는 사막이고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모래언덕 위였다.
발터는 먼지 탓에 건조해진 눈을 비볐다.
“크으, 이 자식. 감히 날 이딴 곳에 끌고 와?”
“음. 주인님을 방해할 순 없었으니까. 네놈은 나와 여기서 승부를 보도록 하지.”
“하! 웃기지 마라!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어딜 감히!”
그 말대로 발터의 몸은 지나치게 부푼 탓에 제이슨보다 서너 배는 더 덩치가 크게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이슨이 뒤처진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다.
스릉― 제이슨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은 일전에 감옥에서 아이젠에게 부러진 탓에 새로 구한 검이었는데, 만년한철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세간에 널리 퍼진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도신 전체가 하얗고 매끄럽게 빛나는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빼앗기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뽑혀 나온 제이슨의 검을 보던 발터 역시도 그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왠지 멍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만 보게 됐다.
“뭐, 뭐지? 그 검은.”
“아, 이거? ‘백검(白劍)’이라는 아티팩트다. 아직 주인님께도 보여드린 적이 없는데, 네놈이 첫 개시로군.”
백검이라는 이름 그대로 새하얀 그 날붙이를, 제이슨은 오른손에 꽉 쥐어 잡았다. 발터는 침을 꿀꺽 삼켰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아모스의 힘이 있었으니까.
“네까짓 놈이 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그렇다. 네놈 정도는 가소로운 일이지.”
“아까부터 네놈, 네놈! 내겐 발터라는 이름이 있어!”
“그만 떠들고 덤비지. 얼른 끝내고 주인님께 가봐야 하니.”
“넌 못 갈 거다! 내가 네놈 모가지를 따버릴 테니까!!”
―쾅! 쾅! 쾅! 쾅!
발터가 제이슨을 향해 뛰었다. 분명 모래밭일진대 어째선지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큼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발터의 현재 몸무게가 둔중하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했다.
제이슨은 발터가 뻗는 그 발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파생검술, 풍참.’
―촤악!
“끄아악!”
―쿠당탕!
발터는 발목을 베이고 쓰러졌다. 언제 휘둘렀는지 보이지도 않는 빠른 검술이었다. 제이슨의 백검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그만큼 제이슨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크윽, 이놈!!”
“이놈은 내가 할 말이다. 하아… 강해진 내 모습을, 가장 먼저 주인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이젠이 소가주전을 준비하는 동안 제이슨을 부르지 않았고, 그사이 제이슨은 저 나름대로 자신만의 수련을 거듭했다.
애초에 그가 경력이 오래된 흑기사임에도 불구하고 2성 정도에 머물렀던 것은 그가 게을렀다거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암흑마법을 먼저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제이슨의 암흑마법 ‘졸음의 파도’는 그가 암살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해준 알짜배기 기술이었지만, 제이슨은 자신의 2성에 불과한 파생검술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부터 자기보다 경력이 짧은 잭스나 제럴드, 번치 같은 흑기사들이 자신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며 불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수련했다. 아이젠 주인님을 보좌하기 위해. 그는 이제 아이젠의 전속 흑기사나 다름없었으니까.
“파생검술, 커버넌트 오러.”
―부웅!
제이슨의 백검 위에 노란빛 오러가 둘렸다. 색감은 노랗지만 어째선지 그 붕붕거리는 기운에서는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연마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발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이슨이 겸허하게 입을 열었다.
“난 파생검술 4성의 흑기사, 제이슨 코너. 아이젠 폰 그린우드 주인님을 모시는 자. 발터, 네놈을 여기서 처단하겠다.”
* * *
“결사신권, 사신강림: 강망태신(江望太神).”
아이젠의 목소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멎는다. 이제 아이젠과 요아힘 사이에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는다.
요아힘은 자신의 방어 체계를 더욱더 공고히 하기 위해 방금 씹어 삼킨 아모스의 기운을 밖으로 뽑아냈다.
“오러 슈트.”
―푸화악!
불길한 검은 기운이 파열되는 그 끝을 둘둘 말며 요아힘의 몸에 빙빙 둘렸다. 요아힘은 아모스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나머지 정신이 살짝 혼미해졌으나, 지금 이곳에서 다리라도 절었다간 모든 것이 끝나리라 판단해 허벅지에 힘줄을 세웠다.
그의 온몸은 아모스 탓에 잔뜩 뭉그러져 있었고, 사실 오러 슈트가 아니라면 그는 오래 걷지도 못하는 허약한 몸에 불과한 상태다.
그러나 요아힘은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분을 모시는 것이 나의 사명. 그리고, 나는 오늘 이곳에서 아이젠을 죽여 그 안에 깃든 룬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분께 바치리라!
요아힘은 침을 꿀꺽 삼키고 싸울 자세를 마쳤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아이젠의 시선은 내리깔려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어째선지 그의 머리가 흩날리고 있었고, 그 탓에 요아힘은 아이젠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이젠은 중얼거렸다.
‘강망태신은 사신강림의 효과를 열 배로 끌어올리는 것. 단, 그 반동은 백 배가 되어 찾아온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최대한 순식간에 끝내주는 것이 인지상정. 요아힘을 괴롭히는 것도 좋지만 빠르게 승부를 내는 것 역시 아이젠은 자신의 도리라 여겼다.
‘결사신권 회혼, 천차횡도(千車橫道).’
―슈욱!
한순간 빛살이 몰아치는 듯했다. 요아힘은 가면 틈새로 스며드는 거대한 일격에 하마터면 눈을 질끈 감을 뻔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아이젠의 필살기. 그렇다면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주는 것이 무투가로서의 예의.
‘나는 무신(武神) 요아힘. 주먹의 싸움에선 예의를 지킨다.’
요아힘은 찰나간에 반 호흡을 내뱉었다. 상대가 가진바 최상의 기술을 사용해 대적해 온다면, 자신 역시 그에 걸맞은 공격 기술로 맞받아쳐 주는 것이 합당하다.
“올 바이 오러 슈트(오러 슈트의 모든 것)!”
―슈팟!
요아힘은 오른쪽 주먹에 오러 슈트의 모든 기운을 담아 날렸다.
―슈웁…….
허공에서 부딪친 아이젠의 천차횡도와 요아힘의 주먹이 집어삼키는 소리와 함께 잠시 사라지는 듯하다가.
―파앙!!
폭발하는 바람이 일며 대기를 일그러뜨렸다. 아이젠과 요아힘 사이에 있던 공간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모든 것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모래 먼지나, 무너지고 남은 벽, 좀비들의 사체 정도밖에 없었지만.
―꽈과광!!
음속을 돌파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제야 아이젠과 요아힘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뻐엉― 하고 날아갔다.
치이이익― 아이젠은 금세 발을 디뎌 멈춰 섰지만 말이다.
‘…….’
아이젠은 말없이 멀리 허공을 바라보았다. 모래 바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먼지가 모두 소멸해 버렸으니까. 단지 멀리까지 날아간 요아힘의 모습이 시야에 아직 덜 잡혔을 뿐.
이윽고 멀리서 무언가가 휘청휘청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천차횡도는 한 발 한 발이 권왕백무 관(貫)의 위력을 내는 일격을 천 번 응축해 날리는 것.’
내공을 응축해 연타 공격을 천 회 날리는 일격으로, 일시적으로 대기에 붉은빛 잔상을 남긴다. 지금 역시 붉은빛으로 잔상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사막의 뜨거운 모래와 겹쳐 아지랑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요아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아지랑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번 사용하면 1시간 동안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
아이젠이 무혈신공을 해제했다. 아니, 해제당했다. 천차횡도의 반동으로 더 이상 무혈신공을 운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앞으로 1시간 동안은 이럴 것이다.
그리고 무혈신공을 사용할 수 없으니, 당연히 사신강림도 해제되었고.
“윽!”
잇달아 강망태신의 반동이 찾아왔다. 아이젠은 왼쪽 다리에서 근섬유를 칼로 찢는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먹을 휘둘렀는데 왼쪽 다리가 아픈 이유는 왼쪽 다리를 회전축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다리부터 허리, 몸통, 오른팔을 거쳐 내공의 흐름이 전해져 천차횡도에 모든 힘을 담아 일격을 날렸다.
덕분에 아이젠은 연이어 순서대로 허리, 몸통, 오른팔마저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그의 온몸이 바닥에 허물없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와중에도 멀리서 요아힘의 신형은 서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젠이 패배했는가?
“후, 후아. 아, 아이젠, 폰 그린우드.”
쩌적― 투둑!
요아힘이 마침내 아이젠의 눈앞까지 다가섰을 때, 요아힘의 가면이 완전히 쪼개져 바닥에 떨어졌다. 100% 드러난 그의 얼굴은 일면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흉측하고 기괴스러웠다.
입술은 부르터 있고, 뺨은 녹아내려 있으며, 치아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상태. 턱은 띵띵 부어 그 안에 고름이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내, 내가, 이겼다.”
그 흉한 얼굴로 요아힘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