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요아힘이 아직 맨살이 드러난 왼팔을 들어 보였다. 아이젠은 요아힘에게서 짙은 살기를 느끼고 반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겁을 먹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가올 환란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을 뿐.
요아힘이 잘 안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슈트.”
그러자 그의 오른팔에 이어 왼팔에도 풍화되는 듯한 검은 기운이 둘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시전이 미처 끝나기 전에 아이젠이 먼저 요아힘에게 달려들었지만 말이다.
‘기술 같은 걸 쓰게 그냥 놔둘 것 같으냐?’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욕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교전 중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질타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걸 왜 기다려 주고 있어? 타인이 강해지는 틈을 말이다. 진정한 강자라면 기술을 준비하는 그 시간조차 상대에게 당하지 않을 만큼 빠르게 마쳐야 하는 것이다.
‘결사신권 회혼, 권왕백무(拳王百舞)!’
―슈슈슈슈슈슈슉!
아이젠의 공격이 일제히 요아힘에게 날아드는 그때. 요아힘은 이미 검은 기운이 둘려 있던 오른팔을 쭉 뻗었다.
“슈트, 개화!”
파앙!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 있던 검은 기운이 거미줄처럼 쫙 펼쳐졌다. 다만 틈이 없는 거미줄이었다.
―퍼버버버벅!
아이젠의 권왕백무는 모조리 그 거미줄에 부딪혀 사라졌다. 외부에 흠집도 안 나는 걸 보면 내구력이 상당한 듯싶었다.
―슈팟!
검은 거미줄은 한순간에 다시 요아힘의 오른팔에 둘렸다. 그리고 왼팔에도 어느덧 검은 기운이 둘려 있었다.
“듣던 대로군, 아이젠. 제법 강해.”
“하나 묻자. 너흰 대체 누군데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지?”
“너한테 관심 있는 게 아니다. 애초에 너한텐 별로 신경 쓸 생각도 없었어. 블렌하임이 널 상대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저벅― 요아힘이 오른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오른발에도 검은 기운이 둘리고, 왼발을 딛자 왼발에도 검은 기운이 둘렸다. 즉 그의 사지는 검은 기운으로 몽땅 지배된 채였다.
“레그혼.”
그 말을 한 직후 요아힘의 가면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몸에 제법 무리가 가는 기술인 듯싶었다.
‘방어력이 상당해.’
최고의 방패는 최강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기술을 마음 가는 대로 쓸 수 있다면 이 녀석을 결코 이길 수 없을 터. 제약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요아힘이 말했다.
“블렌하임은 네 녀석의 몸 안에 룬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확인차 다시 물어보지. 있나? 룬.”
요즘 왜 이렇게 룬에 관심 있는 놈들이 많은지. 아이젠은 거짓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있다면?”
“후후. 기계적인 대답이군.”
“나보다 내 몸 안에 있는 룬에 더 관심이 많다는 건가?”
“그렇다. 얌전히 꺼내준다면 그냥 돌아갈 수도 있어.”
“그러지 않겠다는 건 내 태도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지 않아?”
“그래. 하지만 권하는 거다.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지. 룬을 내놔라. 지금 내놓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아이젠의 몸에 박혀 있는 것은 관철의 룬. 그것은 아직까지는 아이젠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어주지 못했다. 테오발트 가주의 안배로 룬이 박혀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아이젠은 두 주먹만으로도 생사경에 오를 수 있다고 자신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타인에게 룬을 넘겨줘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간곡히 부탁한다면 그야 고민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들의 태도는 마치 협박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간곡히 부탁해도 줄 생각은 없다.
이것은 어찌 되었든 테오발트 가주의 선물. 아이젠에게는 큰 의미가 없더라도, 자신이 가진 힘 중 하나였다.
“기회를 발로 차겠다.”
그래서 아이젠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요아힘이 귀찮아지겠다는 듯 가면 위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기회는 줬다……. 하지만 네가 거절한 거야.”
“후회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 한 것을, 후회하지 마라.”
―파앙!
‘?!’
아이젠의 옆구리가 움푹 팼다. 아이젠은 몸이 예각으로 꺾여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옆구리에 실려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요아힘의 주먹.
‘감지하지 못했어!’
아이젠의 기감에 걸려들지 않을 만큼 빨랐다. 요아힘은 오른손에 두른 검은 기운으로 아이젠의 옆구리를 강하게 타격했다.
그 직후, 자연히 아이젠은 멀리 날아가 아직 조금 서 있던 골목 벽에 부딪혔다.
―쿠과과광!
그러나 먼지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아이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빠른데.’
얕볼 놈은 아니다 이건가. 발터와는 달리 ‘진짜’ 상급자인 듯싶었다.
“내 룬을 노리는 이유가 뭐지?”
“그분께서 원하시기 때문이지.”
“아까부터 말하는 그분은 누군데?”
“그건 알려줄 수 없다.”
“알려줘.”
“그럴 수 없다고 했을 텐데.”
―팟!
아이젠은 또다시 무음목랑보를 사용했다. 그리고 요아힘의 등 뒤로 돌아갔다.
“알려주게 될 거야.”
결사신권, 철권!
―퍽!!!
아이젠의 주먹이 요아힘의 등뼈를 강타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요아힘은 어느새 몸을 돌려 왼손으로 아이젠의 주먹을 붙잡았다.
아이젠은 이미 철권을 발동했기에 요아힘은 원래라면 왼손의 뼈가 으스러져야 한다. 하지만, 요아힘의 왼손에 둘린 검은 기운이 철권의 힘을 상쇄하고 있었다.
―으드드득!
철권과 검은 기운이 힘을 겨루는 소리가 들리더니, 결국 반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젠과 요아힘 둘 다 뻥! 터져 나가고 말았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말이다.
―치이이이익!
―콰악!
그리고 아이젠과 요아힘 둘 다 넘어지지 않고 올곧게 땅에 발을 딛고 섰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이젠은 그저 발로 디뎌 마찰력으로 멈춘 것이지만, 요아힘은 다리에 둘린 검은 기운으로 땅을 붙잡아 선 것이었다.
“제법 하는데. 도깨비 가면.”
“누가 할 소리.”
―파앙!
또 한 번 땅을 딛고 서로에게 날아든 두 사람이, 허공에서 주먹을 부딪쳤다.
―콰앙!!
소리는 컸지만 이번엔 둘 중 누구도 튕겨 나가지 않았다. 허공에서 아이젠의 회혼을 두른 주먹과 요아힘의 검은 기운을 두른 주먹이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요아힘 쪽은 방어력을 앞세우고 있지만, 아이젠의 회혼은 완벽히 공격에만 치중된 일격이었다.
창과 방패의 싸움. 그 승자는.
―카앙!
힘을 좀 더 주어 상대를 밀친 아이젠이었다. 아이젠은 장딴지 근육에 팽팽하게 들어찬 근육으로 땅을 밀어 요아힘을 뒤로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 요아힘이 팔을 나부끼는 틈을 타, 다시 주먹에 회혼을 둘렀다.
‘결사신권 회혼, 철권!’
“윽?!”
―쐐애애액!
요아힘의 눈에,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아이젠의 주먹은 독수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퍼엉!!
독수리가 겁도 없이 물결 밑을 놀던 생선을 낚아채듯, 아이젠의 주먹은 요아힘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요아힘의 가면이 반 정도 깨져 나갔다.
“크윽!!”
그러나 아이젠은 이번엔 요아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가면 밑에 드러난 것은 요아힘의 얼굴이 아니라, 사지에 둘려 있는 검은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요아힘은 찰나의 판단으로 검은 기운을 얼굴 위에 덧씌워 아이젠의 철권을 막아낸 것.
순간적인 재치가 뛰어난 녀석이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는 언제나 나는 놈이 있는 법. 아이젠은 가장 높이 나는 새였다.
‘결사신권 회혼, 권왕백무: 관(貫)!’
―퍼엉!!
“윽!!”
검은 기운 위를 아이젠의 관(貫)이 강타했다. 요아힘은 단말마 같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허리를 뒤로 크게 꺾었다.
요아힘의 얼굴에 있던 검은 기운 외피가 조금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마침내 완전히 벗겨져 바닥에 먼지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큭.”
“잘난 얼굴 좀 봅시다, 요아힘.”
그러나 요아힘의 얼굴은 전혀 잘나지 않았다.
요아힘은 얼굴이 함몰되어 있었다. 아이젠이 철권을 먹이기 전부터 이미 으스러져 있었던 듯, 피부는 거뭇거뭇하고 치아 몇 개는 이미 빠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보였다.
“큭! 보지 마!”
요아힘은 분노에 찬 신음성을 내지르며 다시 얼굴에 검은 기운을 도포했다.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이젠은.
사실은 속에서 천불이 들끓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아힘의 지금 같은 모습을, 아이젠은 전에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보았는가. 그것은 전생의 기억인 중원 무림으로 떠나야 한다. 아이젠이 이강철이던 시절 천마 도강문과 겨룰 때, 도강문의 밑에서 그의 내공을 받아먹던 천마신교 신도들이 딱 저 꼴이었다. 뭉그러진 시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녹아내려 버린 얼굴과 신체. 천마 도강문의 내공 없이는 단 한 시진도 연명하지 못할 것 같은 처참한 몰골.
요아힘의 모습이 지금 그랬다. 즉 다시 말하자면.
“아모스 중독이로군.”
요아힘은 아모스 중독 상태였다. 이 수준이라면 되돌릴 수 없다. 아편 중독자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일 테니. 오히려 아모스를 섭취하는 게 생명 연장에 더 도움이 될 지경일 것이다.
아이젠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요아힘의 사지와 얼굴에 둘려 있는 저 검은 기운의 정체는, 설마.
“전부… 아모스의 힘인 거냐?”
저 검은 기운 자체가, 아모스인 거다.
“그래… 전부 아모스, 그분의 오러다. 조금 전 헤르만이 설명해 줬지? 아모스는 그분의 오러를 녹여 만든 것. 그리고 나는 그 오러를 직접 부릴 수 있는 자격을 하사받은 거다.”
“결국 남의 오러일 뿐인데 그 자격이 무슨 의미가 있지?”
“네놈은 모를 테지.”
“어, 그래. 몰라!”
아이젠이 마침내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몸에 둘린 회혼이 더욱 그 끝을 날카롭게 하며 톱날처럼 매서워졌다.
“난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아. 타인의 힘에 기대어 사는 따개비 같은 녀석들의 심정 따윈!”
―쉬이이이익!!
‘결사신권 회혼, 천수관음(千手觀音)!’
―두웅!
아이젠의 등 뒤에 천 갈래의 손바닥이 생겨났다. 직후 조금의 대기도 없이 아이젠은 천 갈래의 손바닥 모두에 박살의 힘을 담았다.
“그렇게 되어가면서까지 아모스를 처먹는 이유가 뭐지?”
“그분을 모실 수만 있다면 내 한 몸 망가지는 것쯤은 아무래도 좋아.”
뿌득! 아이젠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요아힘의 모습은 천마 도강문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던 그의 신도들과 다를 바가 없다.
요아힘이 검은 기운 안에서 입을 열어 외쳤다.
“네놈의 룬을 내놔라, 아이젠 폰 그린우드!”
“뺏고 싶어? 그럼 뺏어가 봐.”
―카가가각! 카가가각!
―키이이이! 키이이잉!
아이젠의 주먹에 둘린 회혼이 더 이상 응축될 수 없을 만큼 뭉쳐, 이제는 강철이 찢어지는 소리마저 들렸다.
이윽고 아이젠의 주먹이 쏘아졌다.
“할 수 있다면!”
결사신권 회혼, 박살(撲殺)!
―콰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