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한차례의 공격이 끝나니 아이젠의 눈앞에는 하반신뿐인 시체들이 즐비한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물론 아이젠 스스로는 별로 경악하지 않았다.
뜨악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발터 쪽이었다. 그는 관자놀이에 삐질 흐르는 땀을 감추려 애써야 했다.
“이, 이런 미친… 최후의 숨결로 부활한 좀비들을…….”
“뭐야. 끝이냐? 벌써?”
아이젠이 사신강림을 해제했다. 벌써 끝나다니, 겨우 이게 다인가?
블렌하임과 싸울 때도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물론 그때의 아이젠과 지금의 아이젠 사이엔 크나큰 격차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발터는 영 싱겁기 짝없었다.
“시시한데.”
“……! 크윽.”
아이젠이 도발하자 발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좀 전의 해괴망측하던 웃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하하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 크크크큭. 그래,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하는데? 블렌하임이 당할 만도 해. 하지만!”
발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아모스의 약병이었다.
‘드디어 나오셨군.’
아이젠은 발터도 당연히 아모스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블렌하임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발터가 아모스를 꺼내 들기만을 기다리며 유도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발터가 판매책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나 발터 역시 약병에 담긴 아모스를 쥐고 있는 걸 보면, 그도 블렌하임처럼 그저 아모스를 받아 쓰는 하청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잡놈이었군.’
만약 이놈들에게 어떠한 계급도가 있다면, 발터는 블렌하임과 동급이거나 조금 높은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상급자는 아닌 것. 아이젠의 생각에 아마 요아힘이라는 자가 바로 상급자일 듯했다.
“내가 이 정도로 당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날 블렌하임 정도의 약자로 취급하면 곤란하다고!!”
발터는 곧장 아모스를 집어삼켰다. 그러자 그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블렌하임 때와는 변화하는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어찌 됐든 아모스는 복용자의 힘을 증폭시키는 알약. 아이젠은 발터의 변화를 가만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크오오오오!!”
마침내 발터가 비명을 지르며 더 이상 몸집 불리기를 멈췄을 때, 그는 종전과 비교하면 훨씬 키가 커져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미세하게 삼백안이 되어 있어 광기를 술술 풍기고 있었다.
“크크크크! 아모스를 써야 할 정도의 상대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네놈의 룬은 내 거니까! 요아힘에게 넘겨줄 순 없다고!”
‘또 룬이라고 했어.’
최초에, 발터는 아이젠에게서 룬을 빼앗겠다고 암시했다. 지금 또 그 말을 하고 있다.
이놈들은 룬을 수집하는 건가?
‘왜?’
그렇다면 그건 왜일까? 룬은 박혀 있는 것. 뽑아낸다고 해도 아이젠이 죽을 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그 외에도 질문할 게 산더미였지만, 아이젠은 고개를 털었다.
“귀찮아. 그냥 빨리 끝내고 심문하자.”
아이젠이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는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
아이젠의 양팔에 매여 있던 아이기스가 파란빛을 발하는 것을, 아이젠은 보지 못했다.
―쾅! 쾅! 쾅! 쾅!
발터가 아이젠을 향해 뛰어왔다. 그 둔중한 몸을 이끌고 덤벼드는 모습은 자못 섬뜩하기 그지없었으나, 아이젠은 겁 따위 먹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에 회혼의 기운을 듬뿍 담아 철권을 먹일 기세를 마칠 뿐이었다.
‘결사신권 회혼, 철권(鐵拳)!’
―뻐엉!!
아이젠의 주먹이 쏜살처럼 쏘아지고, 발터는 미처 반응도 못 한 채 그 주먹에 정통으로 명치를 허용하고 말았다. 덩치가 커진 탓에 급소도 같이 노출됐고, 그 때문에 오히려 아이젠이 발터에게 치명상을 주기가 쉬웠다. 발터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그 주먹을 허용하고 말았다.
“커헉!”
우드드득!!
발터의 외형에는 변화가 없다. 철권은 대상의 외부가 아닌 내부를 타격하는 기술이니까. 그렇기에 발터의 배 안쪽이 움푹 패는 것이 보였다. 갈비뼈와 등뼈 일부가 부서져 작살이 났을 것이다.
“큭……!”
발터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발을 디뎌 굳건히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아이젠을 향해 달려왔다. 아이젠은 양손을 교차해 X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 뒤 집게손가락만을 펼쳐, 그 끝에 회혼의 기운을 응축했다.
“후우.”
결사신권 5성에 올랐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철권이나 무음목랑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젠에겐 아직 보여줄 게 많이 남아 있었고, 소가주전 경기 전 이참에 한번 실전 테스트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이젠은 마침내 손가락 끝에 모은 회혼의 운용을 마쳤다. 검지 위에서 회오리치는 회혼은 표현하자면 하나의 작은 태풍과도 같았다.
“죽어, 이 새끼야!!!”
그때 발터가 육중한 몸과 함께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발터의 주먹은 아이젠의 주먹보다 서너 배는 크게 보였고, 전투에 미숙한 자가 맞는다면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게 자명했다. 블렌하임과 비교하자면 블렌하임보다 한 수 위였다.
다만, 아이젠이 느끼기에 발터는.
‘초보구만, 이 녀석.’
싸움의 초보였다.
블렌하임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귀족들을 살해하고 다녔다. 오죽하면 귀족 살해죄로 현상 수배까지 걸려 있었을까. 그는 비록 약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발터에겐 그것이 없다. 말하자면 간절함이 없다. 이자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그냥, 내 안의 룬을 빼앗는 게 목적의 전부인 녀석이야.’
사람이 가진바 목표가 미약하면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도 약해지는 법.
생사경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아이젠에 비하면, 발터의 목표는 한낱 미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젠이 발터를 얕볼 생각은 없었다. 꼭 거창한 목표의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이 없는 한 발터는 아이젠에게 이길 수 없다. 아이젠은 두 주먹만으로 중원 무림을 제패하고, 이제 이 세계에서마저 정점에 오르려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가는 길에, 넌 돌멩이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젠은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발터의 주먹을 향해, 미리 응축해 두었던 손가락의 회혼을 뻗었다.
―투둑!
“크악!?”
그리고 발터의 주먹을 향해 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찰나 만에 뽑힌 두 손가락은, 발터의 주먹을 조각조각 갈라놓기 시작했다.
‘결사신권 회혼, 쇄고(碎固)!’
철권이 박살의 강화 형태 기술이라면, 쇄고는 박살지의 강화 형태 기술. 그 손끝에 담긴 권기의 위력은 금강석조차 손쉽게 부서뜨릴 정도다.
그러므로, 금강석보다 약한 발터의 주먹 정도는.
“으아아아아아아아!!!”
쉽게 갈라버리는 것이다.
―쩌적! 쩌저적!
발터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 쇄고를 맞은 손이다. 그러나 움켜쥐어도 오른손이 갈라지는 모습은 계속됐다. 그의 오른손 뼈가 함몰되기 시작하더니, 몇 초가 지나면 손 전체가 흐물흐물해졌다. 마치 그 안에 있던 뼈가 모두 녹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커헉! 크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울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일 것이다. 쇄고는 실제로 뼈를 부식시킨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신체 내부를 훼손하니까.
아이젠은 발터를 돌아보았다.
“뭐냐, 너. 블렌하임보다 약한데?”
“크으으!! 크으으으으…!!!”
너무 아파서 아이젠의 말에 대답할 시늉조차 못 했다. 그러나 발터는 이를 악물고 꾸역꾸역 일어났다. 그의 잇몸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이 자식, 이 새끼!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크윽!”
“별거 안 했어. 그냥 분쇄.”
아이젠은 이제야말로 발터를 끝장내고자 했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하며 그는 또다시 가벼운 흥분 상태가 되었다. 아이젠은 주먹에 회혼의 기운을 불어넣어 철권을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목롱보를 이용해 아이젠이 발터에게 뛰려는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
“응?”
별안간 아이젠의 시야 아래쪽에서 파란 기운이 느껴졌다. 아이젠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려다보았고, 양팔에 매여 있는 아이기스가 시퍼런 빛을 내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야, 이거.”
뭔가 해보려고 할 때는 아예 반응도 없더니, 갑자기 기운을 내기 시작한다라? 아이젠은 의문을 가졌지만 어느새 가슴속 깊이 자리해 있던 흥분감이 조금씩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침착해라, 아이젠. 녀석의 손을 봐.]
어디선가 현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이젠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그의 목소리가 들리리라는 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젠은 현무의 말에 따라 발터의 손을 바라보았다. 분쇄된 것은 녀석의 오른손. 왼손은 아직 건재했다. 그리고 그 왼손은 어느덧 날카로운 창처럼 변화하고 있었다.
“크으으.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내 손을 이렇게 만들다니!!”
창날 위에 또다시 창날이 돋아나고, 그 창날 위에 다시 한번 작은 창날이 돋아난다. 발터의 왼손은 그렇게 가시덤불처럼 변화하고 있었다. 잘못 찔리면 바로 이 세상 하직하기 딱 좋을 만큼.
아이젠이라면 흥분 상태였어도 저런 것에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무턱대고 덤벼들었다면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아이기스 덕에 위협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네가 날 도와준 건가?’
아이젠이 현무에게 물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니. 난 도와주는 게 아니야. 잊었어? 내 힘은 모두 너의 힘이라는 걸.]
‘그럼 왜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졌지.’
아이젠의 심장은 이제 정상 범주보다 약간 낮은 수준을 밑돌며 뛰고 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심장 소리를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전선에서 이 정도의 심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이기스에 깃든 서리바람의 오러. 너의 마음을 차갑게 유지하지. 이건 기본기야. 아이기스에 깃든 힘의 본질이라고나 할까.]
‘흠. 좋은데.’
쉽사리 흥분하는 아이젠에게는 좋은 패시브가 생긴 셈이었다.
[지안니 녀석은, 이걸 ‘동심상(冬心想)’이라고 불렀지.]
‘동심상.’
동심상(冬心想), 글자 그대로 차가운 마음을 생각하는 것.
좋았다. 아이젠은 다시 제자리에 서서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곧 있으면 아이젠을 향해 덤벼들 발터를 저지하기 위한 자세를 잡은 것이다.
‘고맙다, 현무.’
[고마워하지 말라니까.]
현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힘은 곧 너의 힘. 네 안에 깃든 모든 걸을 쏟아내 봐.]
―팟!
그 순간 발터가 아이젠에게 뛰었다. 아이젠은 여전히 파란빛으로 빛나는 아이기스를 무의식중에 잠시 내려다보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발터는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젠은 당황하지 않았다. 동심상의 기운이 아이젠의 마음을 차갑게 얼어 붙이고 있었으니까.
발터의 흉흉한 눈빛에서 은은한 광기가 쏟아졌다.
“죽어버려!! 이 개새끼야!!!”
―파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