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타닥―
아이젠은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조금 전 자신이 목격한 가면의 사내를 쫓기 위해서였다.
원형 경기장에서 나와 에버쏜즈에 발을 디뎌도, 그 광활한 대지 위에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 멀리 벽 뒤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보여 아이젠은 재빠르게 발을 옮겼다.
치이익―
아이젠이 발을 끌며 멈추니 그곳은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일자형 골목이었다. 골목 안쪽은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아이젠은 저 멀리 골목 끝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 누구지?”
아이젠이 묻자, 멀리 있던 형체가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더니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얼굴을 드러낸 것은 단발머리의 남자. 대략 아이젠보다 두 배는 더 살았을 것 같은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얼굴에 군데군데 칼에 베인 듯한 흉이 져 있어 지나가다 보면 깜짝 놀랄 만큼의 얼굴이었지만, 그걸 감안하고 봐도 될 정도로 꽤나 미형이기도 했다. 남자가 빙긋 웃었다.
아이젠은 마저 웃어주지는 않았다. 그저 주먹에 회혼의 기운을 불어넣을 뿐.
“너 뭐냐.”
아이젠이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어느새 회혼이 그의 온몸에 가득 들어차, 아이젠은 회색빛 오러를 몸 밖으로 내뿜고 있었다.
아이젠은 발터의 옆에 떨어져 있는 가면을 바라보았다. 도깨비 뿔이 두 개 달려 있는 가면. 카인의 목격담과 일치한다. 하지만 산발의 머리는 아니다. 머리 스타일을 바꿨나?
아이젠의 물음에 여전히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아이젠은 재차 질문했다.
“네가 요아힘인가?”
“큭.”
그러자 남자가 큭큭 웃었다. 그는 어깨까지 들썩거릴 정도로 기분 나쁘게 웃더니, 마침내 한숨과 함께 웃음을 멈추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하아. 아니. 내 이름은 발터.”
“발터?”
그건 처음 듣는 이름인데. 블렌하임의 증언에 의하면 판매책의 이름은 요아힘이라 했다. 발터라는 이름은 여기서 처음 듣는다.
발터가 말했다.
“그래. 그리고, 여기서 널 죽일 사람이기도 하지.”
“…….”
아이젠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피의 사투가 벌어지리라는 것 정도는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설마하니 소가주전 중간에 벌어질 줄은 몰랐지만.
아이젠은 회혼을 머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랜만에 주먹에 제대로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다. 핏줄이 산처럼 돋아나고, 피가 빨리 흐르는 탓에 온몸이 약간 붉게 물드는 듯도 했다. 아이젠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하나 물어볼까. 네놈도 아모스를 쓰나?”
“그래.”
“요아힘이라는 이름, 너도 알고 있겠지?”
“그렇지.”
그러나 발터는 거기까지만 대답했다. 더 뒷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요아힘에 대한 건 함구하겠다는 뜻으로 아이젠은 받아들였다.
“입 닥치고 있겠다? 좋아.”
마침내 아이젠이 결사신권의 운용을 끝마쳤다.
“불게 해줄게.”
팟!
아이젠이 뛰었다. 그는 가벼운 흥분 상태였지만 사리 분별을 못 할 정도로 머저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가면을 발견할 때부터 그랬다. 그는 목롱보를 통해 발터에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보법을 사용해 접근한 것부터가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젠은 아직 발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멍청한 놈. 내가 날 잡아 드시오 하고 널 골목으로 인도한 줄 알아?”
발터가 말했다. 그의 손끝에서 검보랏빛 오러가 피어올랐다.
“암흑마법, 최후의 숨결!”
콰드드드!
그러자 갑자기 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젠은 아직 허공 위에 있었다. 그 상태로 땅이 솟아오르자 그는 올라오는 지반에 정통으로 맞았고.
퍽!
잠시 하늘에 붕 뜨게 됐다. 아이젠은 하늘에 뜬 채로 생각했다.
‘또 흥분했군.’
마음을 가라앉혀라, 아이젠, 아니, 이강철. 눈앞의 적을 놓칠 생각 따윈 하지 마!
아이젠은 공중에서 몇 번 회전하더니 땅바닥 위에 두 발을 딛고 온전히 섰다. 낙법 따윈 없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양발에도 회혼을 품음으로써 피해를 상쇄한 것이다.
“음?”
직후 아이젠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땅이 솟아올랐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젠은 눈앞에 수많은 인간 시체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으으…….”
“거어어…….”
“끄으…….”
그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성대로 말하는 게 맞는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이게 뭐지?”
아이젠은 발터에게 물었다. 발터는 그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난 블렌하임처럼 멍청이가 아니야. 경기장에서 널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은 좀 무서워서 말이지…….”
경기장에는 아이젠뿐만 아니라, 사울 장로를 위시한 장로들과 각 방계의 방주들도 있었다. 즉 그들까지 상대로 이길 생각은 없었단 소리. 아이젠만을 빼내기 위해 그를 유인한 것이다.
아이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결국 겁쟁이란 소리 아냐?”
“맞아. 하지만… 너 하나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지. 이 좀비 군단으로!”
발터가 말하자 그 말이 방아쇠가 된 것처럼 인간 시체, 그러니까 좀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아이젠을 향해서.
아이젠은 본능적으로 두 주먹에 다시금 회혼을 담았다. 눈앞에 있는 좀비들의 숫자는 대충 눈으로만 헤아려도 스무 구 이상.
발터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죽어라, 아이젠. 네 몸 안의 룬은 내가 취하도록 하지!”
두두두두두!
“크와아아아!!”
좀비들이 뛰기 시작했다. 아이젠을 향해서, 기괴한 비명과 함께. 그들은 이지를 잃은 생명체처럼 오로지 아이젠을 죽이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 채 달려들고 있었다.
아이젠은 당황하지 않고, 회혼을 담은 주먹으로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가장 앞에 있는 좀비를 향해.
‘결사신권 회혼, 철권(鐵拳)!’
퍼벅!
철권을 날렸다. 철권은 서술했듯 박살의 강화 형태로, 대상의 외형이 아닌 내부의 뼈를 직접 타격해 분쇄한다. 말하자면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기술.
“크악!”
아이젠의 주먹에 얼굴을 맞은 좀비가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나가떨어지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이젠을 향해 덤벼들어 왔다. 그 와중에 얼굴 뼈는 반쯤 함몰되어 있어 턱이 달랑거리는 것이 몹시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아이젠은 주저하지 않고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철권, 연타!’
―퍼벅! 퍼버벅! 퍼버버벅!
아이젠의 주먹은 방금 그 좀비뿐만 아니라 다른 좀비들에게도 먹혀들어 갔다. 타격은 쉬웠다. 좀비들은 아이젠의 주먹을 막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니. 그러나 그들 모두, 아프지도 않은지 넘어지자마자 바로 아이젠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쯤 되면 아이젠도 속수무책인 법.
‘뭐야, 이 자식들. 어떻게 이렇게 바로 일어나지?’
아이젠은 더 이상 단일기로는 좀비 모두를 상대하기에 버겁다고 판단, 양 주먹을 날카로운 갈퀴의 형태로 만들어 허공을 그었다.
‘결사신권 회혼, 교아(鮫牙)!’
―콰드드득!
교아는 대상을 반드시 적중하는 기술. 수십 마리의 좀비 떼는 갑자기 날아든 날카로운 공격에 맞고 몸이 찢어 발겨졌다. 어떤 좀비는 몸을 허물어뜨리기까지 했다. 즉, 이들의 내구성은 웬만한 사람보다 약한 편이었다.
아이젠도 슬슬 예감할 수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부리는 흑마법이다. 그렇기에 내 주먹에 맞아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아. 이미 죽었으니까 아플 리가 없지.’
하지만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기에 내구성만은 취약한 것이다. 이들은 달리 말하면 썩은 고기인 셈이니까.
바닥에 쓰러지고도 좀비들은 버둥거리고 있었다. 하반신을 잃은 채로도 아이젠을 죽이기 위해 기어오는 좀비도 있었다. 그사이 몇몇 개체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이젠에게 덤볐다.
아이젠은 주먹의 형태를 바꿨다. 철권으로는 딱히 소용이 없는 듯하다. 뼈를 부서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저 몸을 파괴하는 수밖에.
‘분쇄해 주마.’
권왕백무 : 신(伸)!
―파바바바바바바박!!
아이젠이 권왕백무의 공격을 실낱처럼 분해해 좀비들에게 날렸다. 그러자 좀비들은 공격받은 부위를 잃기 시작했다. 공격이 효과가 있다.
‘한 번 더!’
권왕백무 : 신(伸)!
―파바바바바바바박!
다시 한번 공격이 작렬하자, 남아 있던 좀비들마저 모조리 모습을 잃었다. 그 순간이었다.
“멍청한 놈, 이 정도로 끝낼 것 같았으면 내가 널 여기로 부르지도 않았어!”
발터가 소리쳤다. 그 순간 골목을 에워싸고 있던 벽에서 불쑥― 하고 무수히 많은 손이 튀어나와 아이젠을 붙잡았다.
꽈드드득!
“윽?!”
벽 일부가 무너지자, 아이젠은 그 안을 볼 수 있었다. 한쪽 벽 전체가 좀비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수십 마리 정도로 헤아릴 수 없다. 그냥 벽 전체가 다 좀비였으니.
‘미친, 시체가 얼마나 더 있는 거야!’
“하! 전부 이곳 그노시스의 주민들이다. 시체라면 얼마든지 있어!”
발터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젠은 혈관 곳곳에 회혼을 흘려 넣었다.
‘환교신권 : 외공!’
―파앙!
직후 사용한 환교신권 외공으로 아이젠은 온몸에서 회혼을 발산했고, 회혼의 날카로운 오러가 아이젠을 붙잡고 있는 팔들을 칼날처럼 베어냈다.
아이젠은 겨우겨우 벗어나 손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까지 걸음을 옮겼다.
“후!”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산 넘어 산이라고 이제 일백이 넘는 좀비 떼가 아이젠의 눈앞에 있었다.
“어마어마하구만.”
아이젠의 간단한 소회가 끝나고.
그는 소가주전을 위해 아껴두었던 기운을 쓰기 시작했다.
‘결사신권, 사신강림(死神降臨).’
―푸화아악!
아이젠의 몸 바깥으로 회혼의 오러가 발산되자, 발터의 표정도 굳었다.
“블렌하임처럼 멍청하지 않다고?”
아이젠은 멀리 있는 발터에게 말을 걸었다. 좀비들이 그르렁거리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지도 몰랐으나 아이젠은 그냥 말했다.
“그렇게 주장할 거면 최소한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측정해 놨어야지.”
결사신권, 천수관음(千手觀音)!
―키이이이잉!
아이젠의 등 뒤에 천 갈래의 손이 생겨났다. 아이젠은 이제 다시 철권을 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좀비들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들 모두를 회생 불능으로 만들 수는 있을 테니까.
‘철권!’
―퍼어엉!
허공에서 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바람이 찢어지더니 한 발의 거대한 주먹이 좀비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정확히는 좀비들의 상반신을 노리고.
―타다다다다다다다!
“케흑!”
“크악!”
“카아!”
좀비들은 정확히 상반신을 잃고, 골반 위쪽이 뻐엉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뒤쪽에 있는 좀비일수록 뒤늦은 타격으로 피해가 약소했지만, 어쨌든 아이젠을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했다.
한차례의 공격이 끝나니 아이젠의 눈앞에는 하반신뿐인 시체들이 즐비한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