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사울 장로, 설마 정말로 아이젠이 소가주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닐 테지?’
오드니엘 장로로서는 고개를 갸웃해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사울 장로에겐 손해일 텐데? 아이젠이 소가주가 된다면 현 기젤라 공작부인의 오라비인 그는 위세가 한풀 꺾이게 된다. 기젤라 공작부인은 아이젠의 친어미가 아니니까.’
아이젠은 서자다. 그의 친어머니 클라우디아는 현재 제국령에도 없다. 그렇다면 사울 장로는 어떤 이유로 아이젠을 밀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이 이상 깊이 파헤칠 용기는 없었다.
한편, 다시 돌아와서.
아이젠이 베르너의 공격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새로이 얻은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얻은’ 것이 아니라 ‘알고 있던’ 기술이라 표현해야 맞겠지만.
‘결사신권 5성, 무음목랑보(無音目浪步).’
아이젠은 얼마 전 무혈신공 5성을 달성했고, 5성에 달성함으로써 기억에 있던 또 다른 기술들을 몇 가지 더 활용할 수 있었는데 무음목랑보는 그중 하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든 목롱보와 유랑보를 합친 기술로, 소리를 지운 채 곡선 운동으로 적의 배후에 다가서는 기술이다. 내공을 직접 타동해 움직이기 때문에 발목에 가해지는 부담이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짧게 마무리하는 전투에 있어서 아이젠에게는 무리가 없었다.
“베르너. 너의 패배다.”
“……흥!”
베르너가 어설프게 짜증을 냈다.
아이젠은 사실 이번 경기에서 아이기스도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초석을 다지기 위한 발판으로 이번에 한 번 써보려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겠군.’
불쑥!
그때 베르너의 쇄도하는 참철검이 다시 아이젠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사전 경고도 없이 급작스러운 일격이었다.
‘어디 죽어봐라, 아이젠!’
그러나 아이젠은 가볍게 무음목랑보를 사용해 그것을 피했고.
휘익―
베르너의 참철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사이.
아이젠의 주먹에 깊이 힘이 들어갔다. 박살과 같은 방식, 박살과 비슷한 계통의 기술이지만 실상은 훨씬 더 단단하고 강화된 형태의 권법.
‘결사신권 회혼(灰混) 5성, 철권(鐵拳).’
‘철권’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뻐억!
아이젠의 주먹이 빠르게 베르너의 얼굴을 치고 빠졌다.
그런데 베르너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베르너 본인조차 혹시 아이젠의 공격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은, 불과 1초도 안 되는 사이 만에 없던 것이 되어버렸다.
“어?”
주륵― 베르너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 직후였다.
“아! 아아악!! 아아아아악!!”
갑자기 베르너가 얼굴을 움켜쥐고 바닥에 엎어진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워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아악! 사, 살려줘! 으하악! 커헉! 커헙! 커흑!!”
관객석의 사람들이 놀라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려는 것이었다.
베르너는 어느덧 코에서 마치 물줄기가 흐르는 것처럼 코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입으로는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 전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젠은 태연한 얼굴로 베르너의 발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사신권 5성의 권법, 철권(鐵拳). 상대의 외관이 아니라 뼈를 직접 타격해 분쇄하는 기술.’
지금쯤 베르너의 얼굴뼈 일부는 완전히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솜씨 좋은 의사나 사제가 아니면 베르너는 평생 주저앉은 얼굴로 살아야 할 것.
‘안 그래도 강했던 기술인데, 회혼의 기운을 담음으로써 더욱 강해졌어.’
아이젠은 회혼의 기운이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철권을 시작으로 아이젠의 모든 기술은 한 단계 더 성장했을 것이다.
아이젠이 저벅저벅 베르너에게 걸어갔다.
“아프냐? 한 대 더 맞을래?”
“커헉, 크흑, 하,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으아하아악!!”
“기권해라. 그럼 안 아프게 해줄게.”
“기권! 기권할게! 기권한다고오!! 크흑흑, 으흑흐흑…….”
베르너는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 아파서 우는 것은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베르너가 기권을 선언하자마자 파직― 소리와 함께 마테오 백작이 나타났다.
“제4 경기의 승자는 아이젠 공자님이십니다…….”
그의 선언과 함께 경기가 마무리되었으나, 베르너의 고통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아이젠이 허리를 굽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 안 아프게 해주는 기술은 없어.”
“이, 이 자식…… 날 속이다니. 으흑흑…….”
그러나 속았어도 베르너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관객석의 사람들은 검을 쓰지도 않는 아이젠이 승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연실색하는 자도 있었고, 화가 났는지 경기장에서 나가버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제4 경기는 아이젠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창시합의 규칙에 따라 대진표대로 진출하여, 다음 대진표의 진출자는 아래와 같았다.
게오르크 폰 그린우드.
타케오 반 그린우드.
아우구스트 반 그린우드.
그리고, 아이젠 폰 그린우드.
* * *
다음 대진이 시작되기 전.
대기실로 돌아온 아이젠은 모니카의 도움을 빌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조금 전 베르너에게 철권을 사용했을 때 그의 손 역시 피해에서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권은 아이젠의 뼈까지 타격해 금이 가도록 만들었다.
‘흠. 회혼의 기운은 강하긴 하지만 사용자한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게 좀 아쉽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젠이 더 이상 회혼의 사용을 멈추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잘 다루길 희망했다. 회혼을 좀 더 부드럽게 운용해서, 잘 타일러서 말이다. 그리하면 오롯이 적에게만 강력한 일격을 먹일 수 있는 내공이 될 테니.
“도련님, 끝났어요. 좀 괜찮으세요?”
“어어. 고마워.”
아이젠은 대충 모니카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모니카의 손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이 보였다.
“뭐냐?”
“네? 아.”
모니카가 반사적으로 뒷짐을 지니 아이젠은 괜히 더 궁금해졌다.
“뭐냐니까. 줘봐, 손.”
“그게…….”
결국 모니카가 저항할 길이 없어 손을 내미니, 아이젠은 그녀의 손을 붙들고 살펴보았다. 이런 굳은살은 검을 쥐고 휘두를 때나 생기는 것이다. 보통 운동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나 생긴다.
“뭐야. 모니카 너 운동해?”
“…….”
똑똑―
모니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바네사였다.
“누님?”
“모니카 좀 빌릴게.”
“네?”
아이젠이 어리둥절해서 못 알아듣고 있자, 바네사야말로 어깨를 으쓱이게 되었다. 그녀는 모니카를 보고 말했다.
“뭐야. 아직 얘기 안 했어?”
“방금 들켰어요.”
“무슨 얘기야, 둘 다.”
아이젠이 묻자.
“모니카가 요 며칠간 내 대련 상대 해주고 있거든. 좀 데려갈게.”
바네사가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말해줬다. 물론 아이젠이 요약본을 듣고 만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련 상대? 바네사 누님, 누님이 때리면 얘 죽어요.”
“안 죽던데.”
“그 말은 이미 때려보셨구만.”
“어머, 내가 하자고 한 거 아니거든? 저 아이가 원해서 한 거야.”
그래서 아이젠은 모니카를 돌아보았다. 모니카는 입을 우물쭈물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기억하시죠, 도련님? 영설산에서 저 내려보내실 때, 저 강해지겠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바네사 공자님께 수련을 받고 있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제야 아이젠은 모니카의 손을 놓게 되었다. 수련이라, 거 좋은 일이지. 다만 그것은 모니카가 아이젠의 하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였다.
“결혼은? 어쩌려고?”
“취소…했어요.”
“…왜 그랬지?”
“도련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에선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렇기에 아이젠도 이 이상 별말을 할 순 없었다. 그는 간이 의자 위에 앉아 손짓했다.
“알았어. 가봐.”
“……? 끄, 끝이에요, 도련님? 안 혼내시구요?”
“내가 혼내서 뭘 어째. 네가 하겠다는데. 너무 심하게 훈련하지만 마. 다친다.”
퉁명스럽기 짝없는 말투. 그러나 모니카는 아이젠의 그 말에서 깊은 다정함을 느꼈다. 그래서 괜히 미소를 짓게 되었다.
“네! 가, 가볼게요.”
“오냐.”
그렇게 모니카와 바네사가 떠나가고.
아이젠은 혼자 남았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다음 창시합이 시작되기 전, 아이젠은 회혼을 좀 더 운용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전에 한 가지 더.
“아이기스.”
아이젠은 아이기스를 내려다보았다. 이제야말로 이 아티팩트의 사용 방법을 헤아려볼 생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다룰 수 있는 걸까.
“어이, 현무.”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현무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
그래서 아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기스를 착용한 팔을 휘휘 움직여 봤다. 시퍼런 빛만이 자리할 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젠은 그 후로도 아이기스를 이용해 별짓을 다 해봤다. 허공에 대고 휘두르기도 해보고, 혹시 뭔가 기파 같은 게 나가지는 않을까 내공을 내뿜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쳇.”
결국 아이기스의 사용 방법을 알지 못한 채로 다음 창시합이 시작되고 말았다.
[게오르크 공자님과 타케오 님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허공에서 마테오 백작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아이젠은 별수 없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합을 감상하기 위해 원형 경기장으로 나섰다.
아이젠이 관객석 난간에 기대어 시합이 벌어지는 경기장을 살폈다. 관객석 근처에 모니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옆에 그림자가 자리한 것을 보아 제이슨도 있는 듯했다.
아이젠이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문득.
“응?”
반대편 쪽 객석에서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아이젠과는 거의 180도 각도 맞은편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 역시 난간 쪽에 서 있었지만 기대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젠으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키는 별로 크지 않고 보통 체형으로 보였다. 특기할 점이 있다면 단발 머리인 점이랄까. 그게 왜 특기할 점인고 하니,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으므로. 도깨비 뿔이 두 개 달린 가면을. 가면을 쓴 채로 아이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뭐야, 저거.”
황당했다. 아이젠은 이미 카인 등에게 말을 전해 들어 아모스의 전달책이 누구인지 들은 바가 있었다.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다니? 그렇다면 저놈이 요아힘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객석에서 그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이젠은 반사적으로 그를 쫓게 되었다. 그때 멀리 관객석에서 모니카가 아이젠을 따라 나왔다.
“도련님! 어디 가세요, 곧 경기 시작하는데.”
“기다려.”
“네?”
아이젠이 모니카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잠깐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