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발터가 대답이 없자 기사가 다시 말했다.
“왜 대답이 없지? 뒤에 있는 사람들은…….”
흠칫― 기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발터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남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자세히 보니 모두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팔 한쪽이 뜯겨 나갔거나, 목에 구멍이 뻥 뚫려 있거나, 아예 머리통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저걸 과연 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꿀꺽― 두 기사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기호지세의 자세를 잡았다.
“누구냐, 네놈들!”
발터는 싱긋 웃었다. 물론 그의 웃음은 가면 안에 있기에 두 기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발터는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지시했다.
“죽여라.”
―슈팟! 촤악! 뿌직! 콰드득!
에버쏜즈의 입구에서는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다시 돌아와서, 아이젠과 베르너의 경기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세상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아이젠은 베르너의 응용이 어떤 힘을 담고 있는지 예측해 냈다.
‘4방계의 응용 참철검술, 그것은 바로 ‘휘어짐’.’
3방계가 곡도를 쓰고, 5방계는 힘의 응용을 쓰는 것처럼, 4방계에서는 참철검술에 휘어지는 기법을 담아 공격하는 것이었다.
아이젠 같은 외골수 타입에게는 먹혀들기 쉬운 공격이다.
뚝― 뚝―
옆구리 베인 상처에서 피가 조금씩 떨어졌다. 그러자 베르너는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하! 이 거만한 새끼! 꼴 좋다!”
“흐음. 쓰라려라.”
“쓰라려? 흥, 아파서 못 견디게 해주지!”
베르너가 참철검을 꼬나쥐었다. 그의 참철검은 도신이 길고 칼막이가 좁은 형태였다.
“항복해라, 아이젠! 안 그럼 내 검이 널 죽여버리고 말 테니까!”
―쉬익!
자신을 향해 휘둘리는 검을, 아이젠은 두 눈으로 정확히 보았다. 검은 항상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아이젠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유랑보(流浪步).’
비틀― 칼날 끝이 몸에 닿으려는 그 순간, 아이젠은 유랑보를 사용해 피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베르너의 참철검은 휘어지는 응용으로 아이젠을 덮칠 듯 덤벼왔다.
사악―!
그건 비유하자면 마치 뱀이 개구리를 낚아챌 때의 모습이었다.
아이젠은 이미 한차례 그의 휘어짐 응용을 목격했으므로, 당황하지 않고 유랑보를 한 번 더 사용했다.
‘유랑보!’
그렇게 물 흐르듯 움직여 아이젠은 베르너의 등을 잡을 때까지 발을 뻗었다. 그로서 완전히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젠의 오판이었다.
쉬익!
‘어라, 한 번 더?’
베르너의 참철검은 한 번 더 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이젠은 보았다. 베르너의 참철검이 정말로 곡률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휘어지는 모양새를. ‘철(鐵)’이 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생명체처럼 휘는 그 검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적어도 이 경기장 안에는 없을 것이다. 아이젠을 포함해서.
푸욱―!
덕분에 아이젠은 또다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오른쪽 가슴에 베르너의 칼날이 박혔다가 빠져나왔다.
베르너는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큭큭. 왜, 당황스럽나? 두 번이나 공격당할 줄은 몰랐어? 피쉬트랩 던전에서는 아주 기세 좋았지?”
“당황까지는 아니고. 조금 신기하긴 하네.”
중원 무림 이강철이었던 시절에도 저런 특이한 검술을 사용하는 상대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이젠은 베르너의 검술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기해하고만 있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파악해 보건대 베르너의 검술은 아이젠의 유랑보로는 피할 수 없다. 유랑보로 피할 수 없다면 목롱보(目弄步)로는 당연히 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피할 수는 있겠지만 목롱보로 피한 후에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목롱보는 애초에 직선으로 운동하는 기술이지 피하는 보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 넘기면서도 곧바로 반격의 기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시점에서 목롱보와 유랑보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베르너가 싹수없게 웃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아이젠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군. 결국 그걸 써야 하나.”
게오르크와 싸우기 전에는 최대한 아껴두고 싶었는데. 아이젠은 자신의 생각이 조금 거만했는지도 모르겠다 싶어 반성했다. 그새 까먹기라도 한 모양이다.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는 것이 결사신권의 묘리라는 것을.
“그거라니?”
베르너가 반응했다. 아이젠은 손을 휘저었다.
“혼잣말이었어.”
“혼자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
“혼잣말 맞아.”
“나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웃기지 마! 마치 뭐가 더 남은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허장성세에 내가 넘어갈 성싶으냐?”
“넘어가면 어떻고 안 넘어가면 또 어때. 말꼬리 잡지 마라, 짜증 나니까.”
아이젠은 잠시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온몸에 회혼의 기운을 흘려 넣었다.
―후욱!
사신강림을 쓰지도 않았는데 회혼의 기운은 아이젠의 몸 안에서 넘실거리며 흘러 넘치고 있었다. 홍화와 그린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니만큼 그 총량에서 차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편의 베르너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아이젠이 무슨 짓이라도 펼칠 기세로 내공을 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자식, 무슨 수를 쓰려고.’
차라리 참철검술을 쓰는 사람이 상대였다면 베르너도 여러 가지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철검술의 초식은 다 같으니까. 그런데 아이젠은 주먹을 쓰기에 베르너에게는 모든 기술이 생소했다.
‘흥. 그래 봤자 우리 4방계의 응용기, ‘쇄도’만 있으면 내가 이겨.’
쇄도의 응용은 참철검의 검로를 휘게 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을 타격할 수 있다. 심지어 등 뒤로 넘어간 상대에게마저도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그리고 오러를 깊이 운용할수록 쇄도의 가동 범위는 넓어진다.
최초에 아이젠이 베르너에게 시간을 넉넉하게 준 것은 아이젠의 패착이리라, 베르너의 생각에는 그랬다.
“네가 무슨 짓을 쓰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죽기 싫으면 기권이나 해라, 아이젠 폰 그린우드!”
베르너가 득의만만하게 외쳤다.
그러나 아이젠은 회혼의 운용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베르너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눈치였다. 그것이 베르너를 기분 상하게 했다.
“칫, 이 자식이!”
베르너가 다시 아이젠에게 참철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초식도 함께 담아서 공격하는 것이기에 아이젠이 피할 방법은 제로였다.
‘참철검술, 연풍참!’
―쐐애액!
그런데.
―휘익!
베르너의 참철검은 어처구니없게 허공을 잘랐다. 분명 눈 깜짝하기 전까지 아이젠이 여기 있었는데,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베르너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뒤에서 비치는 햇살로 생긴 그림자 탓에 아이젠이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역시나 아이젠은 온몸에서 오러를 내뿜으며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어느 틈에 뒤로 이동했지? 베르너가 쇄도의 응용을 사용할 틈도 없었다.
“뭘 한 거냐? 조금 전까지 속수무책이던 놈이…….”
이때 결전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던 관객석의 사람들도 베르너의 말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볼 적에 아이젠은 별안간 베르너의 뒤로 이동해 있었다. 발을 구르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다만 가문의 방주들, 사울 장로 정도 되는 인물은 역시 알아보고 있었다. 사울 장로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저럴 수가.’
검은뿔 기사학교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이젠의 무술은 이미 어떤 경지를 돌파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울 장로는 분명히 본 것이다. 아이젠의 몸에 담겨 있던 내공이, 아이젠의 발을 잡아끌어 그를 이동시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내공의 색이…… 왜 저렇지? 회색이라니.’
엄밀히 말해 사울 장로는 아이젠의 홍화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이젠이 기사학교에 있을 때엔 아직 홍화의 기운을 제대로 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회색 오러라니, 그 흉흉한 기운에는 사울 장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평범한 오러가 아니구나. 사울 장로는 초면에 직감했다. 아마도 결사신권의 내공에 그린우드의 오러를 섞은 것이 분명했다. 그린 오러를 쓸 수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어떻게 두 개를 섞을 생각을 다 했을까.
“허허.”
사울 장로가 웃자, 옆에 앉아 있던 오드니엘 장로가 넌지시 말을 붙였다.
“뭐가 그리 웃기오?”
“아니. 별거 아니오.”
“흥. 뻔하지 뭐. 사울 장로 그대는 아이젠 도련님을 밀고 있는 게지요? 아이젠 도련님이 소가주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 모양인데, 내 생각에는…….”
“공자님.”
“응?”
“아이젠 ‘공자님’이라고 부르셔야지요, 오드니엘 장로.”
사울 장로가 예의 그 매서운 얼굴로 오드니엘을 노려보았다. 오드니엘은 잠깐 입을 꾹 다물고 그의 표정을 바라만 보게 되었다.
사울 장로가 말을 이었다.
“가문의 장로라는 자가, 아무리 아이젠 공자님을 얕보기로서니 말을 그리 함부로 하면 쓰나. 호칭을 똑바로 하시오, 오드니엘 장로.”
“크, 크흠. 얕보다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오해요.”
“오드니엘 장로, 내 한마디만 하겠소. 이스보셋 장로를 믿고 요즘 자꾸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모양인데……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 으, 크흠.”
이스보셋 장로란 오드니엘의 친형이었다.
관계도가 조금 복잡한데, 이스보셋 장로와 오드니엘 장로 역시 가문의 외척이었다. 정확히는 전대 공작부인의 외척이었고, 사울 장로는 현대 공작부인 기젤라의 외척이다.
이스보셋 장로는 오늘 이 자리에 없었다. 테오발트 가주와 마찬가지로 현재 최전선에서 장군으로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가문에 있을 때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이스보셋 장로의 권위는 날로 높아져 갔다. 그가 쌓는 전공은 모두 제국의 승리로 돌아가고, 즉 이스보셋 장로는 현재 황실의 인정까지 받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오드니엘 장로는 그러한 친형 이스보셋의 권세를 등에 업고 가문 내 이인자가 된 여우 같은 자라 볼 수 있었다.
‘사울 장로, 이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그런데 사울 장로는 그동안은 그런 관계를 묵인하고 있었다. 오드니엘 장로가 무슨 짓을 하든 사울 장로는 별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질적인 일인자는 자신이었기 때문일까? 그런데 오늘따라 웬일인지 언성을 높이다니.
“미, 미안하오. 사울 장로. 아이젠 도련…… 공자님을 얕보려는 의도는 아니었소.”
“이제라도 알았다면.”
그러더니 사울 장로가 고개를 돌렸다. 오드니엘 장로는 남몰래 속으로 이를 갈았다.
‘흥, 왜 갑자기 이렇게 발작을 하는 건지. 가만, 설마 아이젠 집쥐 때문인가?’
오드니엘 장로는 사울 장로가 갑자기 변한 계기가 아이젠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이젠, 대체 그 아이에게 뭐가 있길래?
‘설마 정말로 아이젠이 소가주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닐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