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바네사는 타케오를 따라 웃을 수는 없어 그냥 조용히 있기만 했다.
‘저 두 눈.’
바네사는 1방계 장남 타케오 반 그린우드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 주워들은 적이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시력을 잃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4년 전쯤의 일. 제국과 리타스나트 공화국 간의 소규모 전투에 참전한 후유증이라고 들었다.
‘거기서 양쪽 눈을 모두 잃었다고 했어.’
전쟁 중 상대를 잘못 만나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고 귀환했다. 그러나 타케오는 절망에 빠지는 일 없이 금세 원래의 실력을 복구했다고 한다. 아니, 심지어는 4년 전보다 더 압도적으로 강해져 있었다.
왜일까? 여러 가지 추리를 해볼 수는 있겠으나, 바네사는 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전쟁의 경험.’
타케오는 전쟁터 출신이다. 피와 살점이 튀기는 현장에 직접 있어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바네사에게는 그 경험이 없다.
하지만.
‘내게는 아이젠과의 대련이 있어.’
아이젠도 분명 참전 경험은 없다. 그런데, 바네사는 어째서인지 아이젠 역시 전쟁의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젠은 왜인지 정말로 최전선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대련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네사 자신은 그런 아이젠과의 결투 경험이 있다.
바네사는 검을 꽉 쥐었다.
“그럼 제2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던 마테오 백작이 선언하고.
파지직!
그가 전과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시작할까요?”
바네사가 검을 들었다.
그러자 타케오도 허리춤에 있던 참철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
팟!
바네사와 타케오가 동시에 발을 굴렀다. 좀 더 빠르게 상대편에 접근한 것은 타케오 쪽이었다.
타케오의 검은 바네사의 뺨을 가를 듯이 휘둘렸고.
쐐애애애액!
마치 화살이 날아드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바네사는 몸을 뒤로 뺐다.
‘참철검술, 연공난무!’
파파파파팡!
그리고 타케오의 검을 여러 차례 쳐서 방향을 비틀어냈다. 타케오가 균형을 잃고 주춤하는 사이, 바네사는 지체 없이 다음 기술을 선사했다.
‘참철검술, 연풍참!’
촤악!
캉!!
그러나 연풍참은 아슬아슬하게 타케오의 검에 막혔다. 타케오는 그 새하얀 눈동자 너머로 바네사를 바라보며(물론 실제로 볼 수는 없겠지만) 싱긋 웃었다.
“제법 힘이 실려 있는데?”
“어머, 설마 여인이라고 얕본 건 아니겠죠?”
“그런 적은 없어. 난 상대가 누구라도 최선을 다하거든.”
태앵!
바네사의 검이 튕겨 나가고, 타케오가 쏜살같이 바네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바늘처럼 바네사에게 쏘아졌다.
퍼엉!
마치 공기가 압축되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바네사의 등 뒤가 터져 나갔다. 그러나 바네사는 다치지 않았다.
참철검에 찔릴 뻔한 그 순간, 복부 앞쪽에 실드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의 이름은 바로 참철검술 4성, 오러 실드.
‘위험했어!’
바네사는 참철검술 4성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러 실드는 임시방편으로 기껏해야 편린 정도밖에 구사할 수 없다.
차앙―
오러 실드는 금세 깨져 버렸다. 타케오의 일격조차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상당했다.
- 오오.
- 방금 보았는가? 오러 실드였어.
- 대단하군! 저 아이도.
- 유일하게 출전한 여인이라기에 조금 무시했는데 말이지.
- 오러 실드를 쓰다니, 어디 가서 무시 받을 만한 실력은 아니구만. 하하.
그 말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바네사는 참철검 위에 얇게 오러를 도포했다.
‘참철검술, 연풍양단!’
촤악! 촤악!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 그와 함께 타케오의 신형도 잘려 나가기를 바랐지만.
태앵! 태앵!
타케오는 여유롭게 바네사의 검로를 읽고 연풍양단을 막아냈다. 그의 몸은 아주 가벼웠다.
“이게 다야?”
뿌득! 타케오의 도발에 바네사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보는 게 아니라 느낀다고 했지?’
그렇다면 느낄 수 없는 공격을 선사해 주지!
바네사가 검 손잡이를 사선으로 그러쥐었다. 힘을 조금이라도 풀면 참철검이 손아귀를 벗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바네사의 손가락은 검을 완벽하게 묶어놓고 있었다.
오러를 참철검 위에 두르고, 빠르게 달려든다!
‘참철검술 4성, 속동검격!’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속동검격의 편린을 구사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바네사의 몸짓은 빠르고 매서웠다.
쉬이이익!
속동검격은 단지 느끼는 것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다. 고도로 단련된 사람만이 아는 본능적인 위기감으로 감지해야만 막아낼 수 있을 터.
검 끝이 타케오를 상하로 가를 듯 매섭게 날아드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바네사는 분명히 들었다.
“고작 이 정도 속도로 날 베려고? 잊은 건 아니겠지? 난 참철검술 5성의 검사. 속동검격이라면 나도 쓸 수 있어.”
그 긴 문장을, 찰나라고 할 만큼 짧은 순간 만에 들어버린 것이다.
촤아악!
그 직후 바네사의 옆구리가 잘렸다. 잘린 곳으로부터 피가 철철 새어 나왔지만 바네사는 아프기보단 안심했다.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다면 바네사는 내장을 쏟아내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으윽.”
그래도 아픈 건 사실. 바네사는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프다고 봐준다면 이 경기의 이름이 소가주전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케오는 바네사의 기개에 놀랐다.
“대단한걸? 제대로 베였을 텐데 일어날 수 있다니.”
“전쟁터에서, 후우, 칼에 베였다고 봐주는 사람 보셨어요?”
“본 적 없지.”
타케오는 손뼉을 칠 뻔했으나 아직 소가주전 중이었으므로 상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검을 그러쥐었다.
타케오는 문득 자신의 눈을 쓸어 만지게 되었다. 시력을 잃어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두 눈.
그러나 그 눈으로, 타케오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바네사에게서 강철 같은 의지를.
그래서 타케오는 반사적으로 묻게 되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죠?”
바네사는 검을 쥐다가도, 뜬금없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타케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지?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도 제법 들었을 것 같은데.”
타케오는 시력을 잃은 후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한순간도 오만해선 안 된다는 사실. 리타스나트 공화국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그가 두 눈을 잃은 것은 순전히 오만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겸손을 잃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겸손하면서도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타케오는 현재 참철검술 5성의 기사. 그리고 바네사는 기껏해야 4성 정도. 정확히는 3성 상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길바닥 싸움이었다면 둘 사이에 격차가 얼마나 나든 컨디션 좋은 쪽이 한두 번은 더 이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초식이 갖춰진 참철검술에서 5성의 경지에 오른 타케오에게 3성 상위에 불과한 바네사가 이길 방법은 없다.
설령 타케오가 죽을병에 걸려 골골댄다고 해도 바네사에게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5성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바네사는 어째서 저렇게 열심히 하는가. 아무 소용도 없는 행위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 텐데.
타케오는 바로 그것이 궁금한 것이었다.
질문을 받은 바네사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질문을 하나 했더니…….”
그러더니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그야 소가주가 되고 싶어서 아니겠어요? 소가주전에 나온 건 그 때문이니까.”
“정말 소가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근력의 차이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그 여린 신체로, 5성 참철검술을 소화하는 나를 이길 수 있다고?”
“그야 당연히 확신할 순 없겠죠. 하지만.”
바네사가 양손으로 검을 꽉 쥐고, 머리 옆으로 칼날을 바싹 붙여 보였다.
“시도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건 성미랑 안 맞아서요.”
물론 바네사도 애초에 소가주전을 포기했던 만큼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젠을 만나고 그녀는 달라졌다.
시도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겠다!
팟―!
바네사가 펄쩍 뛰었다. 그녀의 신형은 잔물결이 흩어지는 것처럼 허공에서 사라졌다. 타케오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오러조차 놓쳐 버린 것이다.
‘어디 갔지?’
사람은 반드시 기척이라는 걸 내뿜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그 사람이 죽었을 때뿐이다. 실제로 타케오는 지금 관객석 어디에 누가 앉아 있는지 손가락으로 짚을 수도 있을 정도로 경기장의 모든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명, 바네사의 기운만은 빼고.
쉭!
사라졌던 기척이 뒤쪽에서 나타났다. 타케오는 자신의 포착이 다소 늦었다고 생각했다. 바네사의 칼날은 이미 타케오의 귀를 자를 기세로 내려치고 있었다.
‘시도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건 성미랑 맞지 않다고?’
타케오는 문득 바네사가 좀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무방한 명문이었다. 하지만 타케오는 그 문장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내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3성 따위가?’
그의 치명적인 단점 중 하나인, 오만감이 가슴속 깊이 퍼지는 순간이었다.
쑤욱!
그때 바네사는 보았다. 타케오의 참철검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을 말이다.
‘뭐지?!’
타케오의 양손 어디에도 참철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무기가 허공에서 증발한 것처럼 보였다.
놀라 당황할 틈도 없다. 바네사의 검은 이미 타케오의 귀를 자르기 위해 내리꽂히고 있었으니.
‘벤다!’
바네사가 잡념을 지우고 일격에만 집중할 때.
“?!!”
짧은 사이, 바네사는 배 왼쪽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쓰러졌다. 물론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한 건 덤이었다.
툭.
바네사의 검은 맥없이 바닥을 공격했다. 타케오는 뒷짐 지고 물러섰다.
“으, 커헉! 크흑!”
바네사는 바닥에 손을 짚고 간신히 앉아 있었다. 바들거리는 팔뚝 하나로만 지탱하는 탓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보다는 배의 통증이 더 심했다.
- 아니?
- 세상에! 잔인해라!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와 동시에 관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건 바네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배를 바라보면, 배에 지름 5cm 정도의 둥근 구멍이 뻥 뚫려 있다는 것만은 볼 수 있었다.
줄줄줄줄…….
그 작은 구멍을 통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바네사는 고통을 참으며 상처를 움켜쥐었다.
“윽……!”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 왜 갑자기 배에 구멍이 뚫린 거지?
바네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쳐들고 타케오를 보았다. 타케오의 사라졌던 참철검은 어느새 다시 그의 오른손에 쥐여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