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천막으로 돌아온 아이젠은 침대에 모로 앉은 채 아이기스를 만지작거렸다.
아이젠이 그 위에 손을 얹을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아이기스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내 힘이라.’
아이젠은 사실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을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왜냐하면, 아이젠은 두 주먹만으로 투신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니까.
그런데 지금 그에게는 아이기스라는 아티팩트가 생겼다. 현무는 말했다. 아이기스는 원래부터 자신의 힘인 것이라고.
하기야,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명검사들이 부러진 직검을 들고 다닌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위엄에 걸맞은 아티팩트를 하나씩 쥐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테오발트 가주 역시 그렇잖은가.
그렇다면 아이젠도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아이기스를 마음껏 활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어떻게 하는 거지?”
생각해 보니 아이기스의 사용법 같은 건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이젠은 공연히 아이기스를 툭툭 치며 현무를 깨워봤지만.
“야, 들리냐?”
돌아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현무와 따로 대화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닌 모양이었다.
재밌게 싸우는 데만 집중하느라 정작 사용법을 까먹다니.
뭐, 사실 상관은 없었다. 아이젠은 모든 일은 차차 진행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으므로.
“재밌겠어.”
아이젠이 읊조리는데.
웅성웅성…….
천막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아이젠이 옷을 갖춰 입고 장막을 걷어 나가니.
근처에 기사들과 하인들이 몰려 있었다. 정확히는 큼지막한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아이젠은 멀지 않은 곳에서 모니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니카.”
“앗, 네, 도련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모니카는 이게 자기가 말해도 되는 일인가, 싶은 얼굴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1방계의 랄프 도련님께서 돌아가셨대요.”
“랄프?”
랄프라면 아이젠도 기억하는 얼굴이다. 마혼 버디와 싸울 때 사사건건 멍청한 짓만 골라 해서 열 받았던 녀석.
알브레히트가 그를 업고 피쉬트랩 던전에서 빠져나가면서 탈락한 줄은 알았지만, 죽었다니?
아이젠은 심각한 얼굴로 모니카를 제치더니, 기사들의 틈바구니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노시스 사막 한복판에 놓여 있는 랄프의 시체를, 아이젠은 볼 수 있었다.
‘이건?’
아이젠은 반사적으로 코를 막았다. 콧잔등을 찌를 듯한 독한 냄새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아이젠은 여러 번 이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 시취(屍臭)였다.
랄프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하게 터져 있었기에 치아로 신원을 식별할 수 있었다.
“우웩.”
“우욱.”
“야, 야. 토할 거면 멀리 가서 해.”
그 모습에서 구토감을 느끼고 속을 게워내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물론 아이젠으로서는 이런 사체를 여러 번 본 적이 있기에 별 감흥은 없었지만.
그가 집중하는 것은 조금 다른 데 있었다. 터진 얼굴에만 신경 쓰기 쉬우나 실제로는 랄프의 다른 부위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 그의 온몸.
랄프는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마치 사망한 지 몇 주는 넘은 것처럼.
‘사람의 부패 속도는 이렇게 빠르지 않아. 여기가 사막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랄프가 이렇게까지 문드러지려면 최소 2주는 필요해.’
그 말인즉 아이젠이 랄프와 던전에서 헤어졌을 때, 랄프가 던전을 나가자마자 죽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부패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랄프의 몸이 썩어 있다. 어떻게?
아이젠은 문득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몸에 회혼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뒤를 홱 돌아보자.
“진정해라. 나니까.”
그곳에 서 있는 건 알브레히트였다.
아이젠은 알브레히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알브레히트는 그 인사를 받는 시늉만 하더니 랄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입니까?”
“보고 느껴지는 게 없는지 묻는 거다.”
아이젠은 알브레히트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짐이 안 좋은데요.”
“같은 생각이야. 혹시 기억하고 있나? 랄프를 처음 봤을 때.”
아이젠과 알브레히트가 랄프와 처음 맞닥뜨린 건 정말 뜬금없는 상황에서였다. 마혼 버디와 한창 겨루는 와중에 랄프와 갑자기 조우했었다.
“그때 그 아이의 행색이 어땠는지 머릿속에 남아 있나?”
랄프는 온몸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아이젠이 느낀 인상이었다.
아이젠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그때 이미 죽어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어떻게요? 새삼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죽은 자가 걸어 다닌다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는데.”
중원 무림에서 그런 술법을 쓰는 일파가 있긴 했다. 혈교라는 녀석들이었는데,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고 강시로 만들어 전투 병기로 부리곤 했다.
알브레히트가 대답했다.
“확실친 않지만 암흑마법 중에 저런 사술이 있는 모양이야.”
“…흐음.”
“뭐, 현시점에서 이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으니… 어쨌든 본선 2차전에서는 주의하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암흑마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요아힘.’
아모스를 섭취한 자 중 기묘하게도 암흑마법을 쓰는 이들이 있었다. 제리도 그렇고, 버디도 그렇고.
블렌하임은 그노시스에 가면 요아힘을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아직까지 마주친 적은 없으나, 아마 이 넓은 땅 어딘가에 요아힘이라는 작자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있는 것이라면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다.
“방주님.”
“음?”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제게 신경을 써주시는 겁니까?”
아이젠이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묻자.
알브레히트는 피식 웃더니, 아이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왜긴 왜야. 우린 서로의 훌륭한 대련 상대 아닌가. 자네가 죽어버리면 나도 곤란해.”
* * *
사울 장로는 장로이니만큼 본인만의 천막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차를 내오고 있었다.
“이거,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영설산 쪽에 볼일이 있어서.”
사울 장로가 정중하게 차를 대접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젤라 공작부인. 테오발트 현 가주의 아내였다.
기젤라는 차를 받아 들고는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요.”
“그렇습니까?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기젤라는 그 품격에 걸맞지 않은 협소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사울 장로도 예를 표하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곧 소가주전 본선이 시작되는데 나와 계십니까? 공작부인.”
“……둘만 있는 건데도 존댓말을 쓰실 건가요? 오라버니.”
기젤라의 눈초리가 서운하다는 듯이 변하자.
사울 장로는 잠시 멈칫하고 망설이더니,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상해하지 말거라, 기젤라. 이제는 존댓말이 더 익숙해 그러는 것이니.”
기젤라와 사울 장로는 친족간이었다. 정확히는 사울 장로가 기젤라의 큰오빠였다.
사울 장로의 본명은 사울 드 브루봉. 그는 명실상부한 그린우드 가문의 외척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게냐? 네가 이 오라비를 다 찾고.”
“다름이 아니라. 오라버니께서는 혹시 소가주전 우승자를 누구로 점치시는가 해서요.”
“허허, 참. 네가 그 얘기를 여기저기 묻고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다. 아마 카론 영감님께도 찾아갔겠지?”
“네, 뭐…….”
사울 장로는 본인의 찻잔에도 차를 쪼르륵 따르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걸 물어봤자 나는 모른다. 누가 우승자가 될지 어찌 알겠느냐?”
“하지만 전 제 배가 아파 낳은 자식이 소가주가 되었으면 해요. 오라버니도 그렇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오라버니에게도 힘이 실릴 텐데.”
“무슨 뜻이냐?”
“만약 게오르크나 한스, 바네사가 우승자가 되면, 오라버니에게도 발언권이 더 생긴다는 뜻이에요.”
탕! 사울 장로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거세게 내려놓았다. 그 탓에 바깥으로 차가 조금 튀었다.
“기젤라. 쓸데없는 소리 마라. 나더러 그린우드 가문을 쥐고 흔들라는 말이냐?”
“그런 말은 안 했는걸요? 하지만, 제 아이 중 하나가 우승자가 되면 그러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는 거죠.”
“터무니없는 소리. 그린우드 가문은 엄격한 규율과 율법에 의해 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가문이다. 외척이랍시고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르는가? 다시는 그런 말 입에도 담지 말거라.”
사울 장로가 워낙 단호하게 말하자, 기젤라는 뾰로통해져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았다.
“설마 오라버니도, 아이젠 그 아이를 후보로 염두에 두시는 건 아니겠죠?”
사울 장로는 다시 차를 마시려다 멈칫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카론 영감님한테서는 은연중에 그런 기운이 느껴졌거든요. 아이젠, 그 아이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망나니짓만 골라 하던 그 아이가.”
“…흐음. 최근 몇 달 사이 많이 바뀌긴 하셨지.”
“구체적으로요?”
사울 장로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울 장로의 생각에 아이젠 공자는 확실히 대단하다. 대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사울 장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사울 장로는 조금 전 영설산에서 이미 결론을 내렸다. 아이젠 공자가 소가주전의 우승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건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공자께서 소가주에 오르신다 해도, 그건 그분께서 알아서 하실 일.’
다만 사울로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근 시일 내에 아이젠은 사울 본인조차 뛰어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미래를 언뜻 기대하고 있기도 한 사울 장로였다.
다만 기젤라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다. 기젤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순박하고 순수한 면이 있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것은 순수한 악의이기도 했다. 기젤라는 가끔 선을 넘는 권력욕을 품을 때가 있다.
그래서 사울 장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건 내가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다. 이만 돌아가지? 나도 다음 소가주전을 위해 준비할 것이 있어서.”
“흥. 알았어요. 대답하기 싫다 이거군요.”
기젤라는 새침한 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장막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행여나 아이젠 그 아이가 우승자가 된다고 해도, 그건 오히려 그 아이에게 독이 될지도 몰라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긴요? 글자 그대로의 의미죠. 이 가문 안에서 그 아이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걸요.”
“…하긴, 그도 그렇군.”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아이젠을 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뜻만은 아니다. 기젤라가 말하는 것은 바로 아이젠의 친어머니가 이 가문 안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젠만큼은 기젤라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다. 테오발트 현 가주의 외도로 낳은 아들, 그것이 아이젠 폰 그린우드.
기젤라는 그 사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젠을 자식으로서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의 핏줄이니 자기 핏줄보다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클라우디아 부인.’
사울 장로는 마음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부인’이라고 부르면 기젤라는 또 화를 낼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젤라가 태연한 척 말했다.
“클라우디아, 그녀는 지금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린우드 소가주전 본선 2차전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