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아이기스 】
뜨거운 물로 목욕을 마친 아이젠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사막마을이라고 해도 귀족의 몸을 씻어줄 물 정도는 아낌없이 제공되는 편이었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던 아이젠은, 천막 한쪽에 서 있던 유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미안. 많이 기다렸나?”
“아니.”
유진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아이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현재 하반신만 가운으로 가리고 있을 뿐 상반신은 양 팔뚝의 팔찌를 빼면 나신이었던 탓인데.
‘뭐야, 이 자식.’
그의 상체 근육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단련되어 있었다.
유진은 운동 쪽은 전문가가 아니기에 잘은 모른다. 하지만, 뭔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전에 봤을 때도 옷 위로 드러나는 근육이 심상치 않았는데.
오늘 봤을 땐 느낌이 또 다르달까.
‘비유하자면 그냥 무기와 아티팩트 정도의 차이야.’
전에 보았던 아이젠의 몸이 사흘 밤낮으로 달궈져 만들어진 도검이었다면.
오늘 본 아이젠의 몸은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이 쌓여 만들어진 아티팩트 같았다.
꿀꺽.
유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되었다. 남자로서, 사내로서 닮고 싶은 몸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다.
“뭘 그렇게 보냐. 사내놈이 변태같이.”
“내가 또 언제 그렇게 봤다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가. 피곤하다.”
아이젠은 닷새 내내 먹을 것도 하나 없이 계율의 관에서 끝없는 수련을 해왔다.
‘최초에 강망태신을 사용했을 때는 알브레히트 5방주님에게 거의 죽을 뻔했지.’
그 반동이 찾아왔을 때, 아이젠은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아무래도 알브레히트 방주님이 죽이지 않는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게 틀림없다.
아무튼 가까스로 수백, 아니, 수천 번의 위기를 극복하며, 아이젠은 단련을 끝마쳤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을 끝낸 그의 몸은 어느새.
‘무혈신공 5성.’
무혈신공 5성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당초 소가주전에서 5성 이상을 달성하는 것이 아이젠의 목표였던 만큼, 아이젠은 이제 일차적인 목표는 이루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 남은 것은, 소가주전에서 우승자 자리를 차지하는 것.
‘아무리 관심없다고 했지만, 기왕지사 이렇게 됐는데 중간 탈락자로 남는 것보다는 우승자가 낫지.’
물론 그건 달성해도 되고 달성하지 않아도 되는 목표겠지만.
아이젠이 게오르크와의 숙원을 끝마치려면, 결국은 소가주전에서 그와 맞닥뜨려 이겨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게오르크는 누가 뭐래도 소가주전의 강력한 최종 우승 후보.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젠은 자신감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감이.
‘5성에 오르기도 했으니, 이제 더욱 많은 결사신권의 묘리를 구사할 수도 있고.’
두루두루 좋은 일만 발굴되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라고?”
아이젠이 다시 한번 되묻자.
유진이 아이젠의 양팔에 매여 있는 팔찌, 그러니까 아이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엉?”
“사용법을 알아낸 것 같다.”
“뭐라고?”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 * *
아이젠은 어느덧 옷을 갖춰 입었다.
아이젠과 유진, 두 사람은 지금 천막을 나와 걷고 있었다.
유진의 말은 이렇다.
“너도 그린우드 가문의 직계잖아. 아니, 직계인 건 차치하고 어쨌든 그린우드. 맞지?”
아이젠은 뭔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너도 그린 오러를 쓸 수 있어야 이치가 맞지 않겠어?”
“어?”
아이젠의 팔짱이 저절로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그 역시 당연히 그린 오러를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전생을 깨달은 이후부터 그는 줄곧 무혈신공의 내공만을 써왔다. 그러니까 연분홍빛의 내공, ‘홍화(紅花)’ 말이다.
‘하긴 그러네. 나도 그린 오러를 쓸 수 있을 텐데 왜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홍화만을 쓰고 있었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아이젠은 이미 무혈신공의 홍화만으로도 정점에 오를 잠재력이 있다. 즉 그에게 있어 그린 오러는 딱히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동안 단 한 번 발현하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 그린 오러가 어쨌다고.”
“그걸 말해주기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가자. 그 팔찌, 초대 가주의 물건 맞지?”
멈칫―
아이젠이 결국 멈춰 서고 말았다.
그는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모르는 척하지 마. 다 알고 온 거니까.”
“알다니, 뭘 어떻게 해서?”
“추리.”
“추리?”
“카론 영감님의 추리.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추론한 바에 의하면 그 물건은 그린우드 초대 가주의 물건, 아이기스야. 맞지?”
“…….”
뭐야, 이 정도면 거의 역사서를 들여다보고 온 수준 아니야?
유진이 말을 이었다.
“원래는 참철검이었던 물건이 어째서 지금은 암가드의 형태를 띠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게 초대 가주의 물건이 맞다면 사용법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몰라.”
“……뭔데? 그 사용법이.”
아이젠은 아이기스에 대한 언급은 은근슬쩍 뭉개고, 사용법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러자 유진이 대답했다.
“팔찌에 그린 오러를 주입해 봐. 그린우드 가문의 물건이라면 그린 오러를 써야만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 * *
유진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초대 가주 지안니 폰 그린우드가 아이젠에게 아이기스를 넘겨줄 적에.
그는 분명 말했다. 아이기스는 주인을 가린다고.
‘그리고 실제로 홍화의 기운은 아무리 주입해 봤자 아이기스에 걸려 있는 결계 같은 것에 가로막혀 효과를 내지 못했어.’
그것은 어쩌면, 아이기스 자체가 그린 오러만을 받아들이는 아티팩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홍화로는 아이기스와 동기화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젠은 지금 계율의 관에 홀로 들어와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시 이곳에 들어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암만 생각해도 홀로 아이기스를 받아들일 만한 공간은 이곳밖에 없었다.
“후우.”
아이젠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는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 홍화의 기운밖에 사용해 보지 않았다. 다른 오러를 써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비단 아이젠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기존에 사용하던 오러가 아닌 다른 오러를 쓰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이것은 말하자면 아이젠에게만 발생한 특수한 사례.
실제로 그의 몸에 그린 오러가 있기는 한 건지, 그런 것은 모른다. 아이젠이 전생을 깨달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오러를 단 한 방울도 짜내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젠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홍화의 기운 옆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음을.
그것은 룬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침착해라, 아이젠. 다른 모든 그린우드가 쓸 수 있는 것이 그린 오러라면, 당연히 나도 쓸 수 있어.’
두 다리를 땅 위에 딛고 서서.
아이젠은 여러 차례 심호흡을 반복하다가.
“흡!”
마침내 단전에 힘을 주었다.
휘오오오…….
어디선가 바람이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계율의 관, 사방이 가로막혀 아무것도 드나들 수 없는데 바람이 불다니.
필시 연풍의 오러가 발현하는 특징이었다.
“하아아…….”
낮게 읊조리며 마음속의 그린 오러를 계속 끌어내던 아이젠은.
이윽고, 홍화의 기운 옆에서 또 다른 오러가 발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휘오오오오!!
바로 그린 오러.
아이젠이 열여섯 평생의 자신의 몸에서, 처음으로 그린 오러를 발현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금세 발현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어쩌면 아이젠은 이미 그린 오러를 시동할 만한 계기 정도는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지 그가 평생 사용하지 않아봤을 뿐.
‘아직 끝이 아니야.’
그린 오러를 발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이젠은 방심하지 않고, 자신의 그린 오러를 두 양극점에 끌어모았다.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을 향해 모여드는 그린 오러는, 홍화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어, 좀 더!’
아이젠은 멈추지 않고 그린 오러를 발현했다.
그린 오러의 총량은 많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제 막 깨우치기 시작한 오러이니까.
아이젠은 온몸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쌀알만 한 양의 그린 오러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아이기스를 향해 흘려넣었다.
“흡!”
그리고 이내.
푸화악!
아이기스의 틈새를 파고들어 그린 오러가 흘러들어 갔다.
꿀렁꿀렁.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빅샤크에 홍화가 먹힐 때의 기분처럼, 아이기스에 그린 오러가 조금씩 흘러들어 가 아이젠의 몸에서 기운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니.
두근!
아이기스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아이젠은 명백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양 팔뚝에서, 마치 두 개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박동하는 것을.
두근! 두근! 두근!
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고, 거세지고, 커졌다.
결국 소리는 멎어 들었다.
그리고, 아이젠의 귓가를 파고드는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누구지? 나를 깨운 게…….]
아이젠이 서 있던 건 계율의 관 정중앙.
그 반대편에, 아이젠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이 한 사람의 소년이 서 있었다.
입고 있는 하늘하늘한 옷, 피부, 머리 색, 눈동자까지 모두 새하얀 그 소년은, 아이젠과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젠의 근육이 워낙 빵빵하다 보니, 왜소한 체격의 소년은 상대적으로 훨씬 어린 나이처럼 여겨졌다.
아이젠은 그 소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가, 아이기스냐?”
[그래.]
아이젠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에는, 불쾌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넌 누구지? 지안니는 어디 있어?]
소년은 바로 아이기스 그 자체였다.
아이젠의 양팔에 매여 있던 아이기스는 어느새 파란 빛을 잃고 있었다.
당연했다. 아이기스가 현현했으니, 아이젠의 팔찌는 지금 암가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소년, 아이기스의 순박함마저 느껴지는 질문에.
아이젠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지안니는 죽었다. 넌 이제 내 소유물이 됐고. 힘을 좀 빌리고 싶은데?”
그러자 아이기스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불쾌함이 한층 가중된 얼굴을 해 보였다.
[죽어? 지안니가?]
“그래. 벌써 천 년 전 일이야.”
[천 년? 말도 안 돼.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을 리가 없어.]
“사실인데.”
아이젠은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저 눈송이처럼 새하얀 소년을 이 자리에서 굴복시키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어.’
결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이기스의 손에서, 번쩍하더니 참철검이 생겨났다.
그것은 아이젠도 본 적이 있었다. 아이기스의 원래 형태.
말하자면 아이기스가 아이기스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지안니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풋내기한테 날 넘기다니.]
“왜, 힘을 빌려주기 싫으냐?”
[빌려줘? 웃기지 마. 날 네 아래로 보는 거야?]
아이젠은 씨익 웃었다.
“글쎄. 그럼 여기서 결정하자고.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