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어떻게 알았지? 우리가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흑기사의 물음에, 아이젠이 대답했다.
“어떻게 모르겠어. 그렇게 살기등등하게 기세를 풍기고 계신데.”
“흠.”
세 흑기사가 나란히 섰다. 그러자 마치 경사가 진 것처럼 키가 구분되는 게 우스웠다.
키가 큰 놈이 말했다.
“소개부터 하지. 나는 잭스, 이 녀석은 제럴드, 끝에 있는 녀석은 번치.”
“뭔 헷갈리게 셋씩이나 있어. 이름 기억 안 해도 되지? 서운해하지 말고.”
“기억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차피 죽을 텐데.”
“게오르크가 죽이라고 했으니까?”
“?!”
아이젠이 갑자기 정곡을 찌르자 세 흑기사의 표정이 변했다.
아이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것까지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알고 있었나……. 그렇다면 더욱 살려둘 수 없겠군.”
―스릉!
세 명의 흑기사 모두 검을 뽑았다.
만년한철로 만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잘 벼려진 검들로 보였다.
아이젠은 뻐근한 목을 잠시 풀며 말했다.
“잭스, 제럴드, 번…… 뭐라고 했더라?”
다음 순간, 아이젠의 신형이 사라졌다.
목소리는 세 흑기사의 등 뒤에서 들렸다.
“미안, 이름 벌써 까먹었다.”
―퍼엉!!
* * *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근육이 갈라진다.
온몸에 내공이 흘러들어 뼛속 깊이깊이 스미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젠은 곧바로 주먹을 뻗었고.
―퍼어어엉!
세 명의 흑기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키 큰 놈 잭스에게 주먹을 날렸다.
잭스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아이젠의 주먹을 막아냈다.
―치이이이.
잭스가 뒤로 크게 밀려났다.
아이젠은 선 자리에서 눈을 감고 호흡했다.
그리고 번쩍― 다시 눈을 떴다.
“방금 건 준비 동작. 그럼 바로 시작할까?”
결사신권(抉死神拳), 홍화(紅花)의 기운.
―푸화악!
연분홍빛 오러가 아이젠의 몸 밖으로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
흑기사 셋 중 키 큰 놈, 잭스는 그걸 보며 검을 그러쥐었다.
“그린우드의 직계 공자라 해서 방심하진 않는다.”
“오냐. 그래야 할 거야.”
―쉬쉬쉬쉭!
잭스의 검이 사모처럼 아이젠을 찌를 듯 날아온다.
아이젠은 가볍게 몸을 옆으로 젖혀, 잭스의 칼날을 피했다.
“제법인데.”
잠깐의 호응.
그러나, 아이젠의 주먹에 자비는 없었다.
“제이슨보다 잘 싸우나 한번 볼까?”
박살(撲殺) 악지섬(顎之殲)!
―콰앙!
아이젠의 주먹이 잭스의 턱을 쳐올렸다.
잭스는 칼날을 바로 세워 간발의 차로 아이젠의 주먹을 막았다. 하지만, 칼날에 실금이 쩍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강하다!’
맨주먹으로 철인 검에 실금이 가게 하다니.
잭스는 방심 따위 하지 않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의 힘을 이 집쥐공자가 가지고 있으리라곤 믿기 어려웠다.
잭스가 칼날을 갈무리하고 아이젠과 눈을 맞췄다.
“제이슨? 제이슨 흑기사님을 알고 있나? 아아. 하긴, 그러고 보니 너는 제이슨 흑기사님의 암살 타깃이었지.”
뭐야, 제이슨 흑기사님이라고 존칭을 쓰는 걸 보면, 제이슨보다 후임인가?
아이젠은 너스레를 떨었다.
“잘 알지.”
“존경했던 분이다. 비록 그분께선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잭스가 검을 꽉 쥐었다.
그러자 키 중간 놈 제럴드, 키 작은 놈 번치도 힘줘 검을 잡았다.
잭스가 마저 말했다.
“그분께서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일, 우리가 달성하겠다!”
―팟!
세 명의 흑기사가 아이젠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고 보면 어느덧 세 명은 삼각형 구도로 서 있어, 아이젠이 미처 빠져나갈 공간이 없도록 좁혀들고 있었다.
잭스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A 포메이션! 살아 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A 포메이션?
뭔 유치한 소리야. A가 있으면 B도 있고 C도 있냐? 아이젠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이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찰나에 사고를 마쳤다.
‘빠져나갈 공간이 없다면.’
안 빠져나가면 그만!
아이젠은 주먹을 힘껏 잡아당겼다.
‘박살 연타!’
―퍼벅! 퍼벅! 퍽!
세 개의 주먹이 각 흑기사의 명치를 타격했다.
“크헉!”
키 작은 놈 번치는 미처 막지 못하고 박살에 맞아 날아갔고.
“윽!”
키 중간 놈 제럴드는 검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고통을 호소했으며.
“후!”
키 큰 놈 잭스는 가볍게 박살을 멀리 튕겨 날려 보냈다.
아이젠은 세 녀석의 방어 형세를 보고 속으로 판단을 내렸다.
‘작은 놈은 2성, 중간 놈은 3성. 그리고 큰 놈은 4성.’
호오, 대단한데?
아이젠의 기억에, 제이슨이 아마 2성의 흑기사였다.
기사가 2성을 달성하는 것도 대단한 성과다. 몇 년간 끊임없는 반복 훈련이 있어야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2성의 경지.
‘사람들은 2성쯤은 개나 소나 달성하는 줄 알지만.’
실상은 2성까지 오르는 데만도 상당한 노력과 재능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중간 놈은 3성에, 큰 놈은 4성이라.
‘제이슨보다 후임이라 했던 것 같은데, 제법인걸.’
분발해라, 제이슨.
물론 이놈들이 제이슨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뇌살(腦殺)을 사용해 그들을 굴종시킬 생각은 없었다.
첫째는 귀찮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개심시킬 가치가 별로 없다, 너흰.”
제이슨도 건방진 놈이었지만, 아이젠에게 당한 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해 왔었다.
하지만 이 세 놈의 눈빛을 보면 그렇지 않을 듯하다.
올곧게 날이 선 눈동자에서는 주인을 향한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다.
게오르크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나한텐 아니거든.’
그래서 아이젠은 고민 없이 세 놈 다 결딴을 내주기로 했다.
홍화의 기운을 양 주먹에 싣고.
“결사신권―”
“―! 다들 B 포메이션!”
아이젠이 다시 주먹을 힘껏 당기자.
잭스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를 신호로 세 명의 흑기사가 움직임을 나누었다.
꼭짓점을 이으면 마치 이등변삼각형이 될 듯한 모양.
‘뭐야, 진짜 B랑 C도 있는 거였어?’
아이젠은 세 흑기사의 면면 하나하나를 살폈다.
아마 자신의 공격 방향을 분리하기 위해 이런 전형을 갖춘 것일 터.
‘내가 한쪽을 공격하면, 다른 두 놈 쪽에서 내 등을 치겠다 이건가.’
그야말로 뼈를 내주고 살을 도려내겠다는 심리.
아이젠은 피식 미소 지었다.
‘근데 소용없어.’
결사신권, 교아(鮫牙)!
아이젠은 손바닥을 세워 길게 그었다.
교아는 반드시 적중한다. 적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그렇기에 셋이라는 숫자조차 아이젠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투확!!
허공이 크게 찢어졌다.
“막아!”
“윽!”
“커헉!”
이번에도 번치는 교아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리타이어한 듯 보였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기는 했다.
다른 두 놈은 비교적 멀쩡했다. 물론 옷이 해지는 것 정도는 별일 아니라고 치부한다면 말이다.
“후후. 대단하군, 집쥐공자 아이젠!”
“그 별명 별로 안 좋아하는데. A랑 B가 나왔으니 이번엔 C냐?”
“입 다물어라!”
“네가 말 걸었잖아.”
―팟!
잭스가 먼저 덤벼 달려들고.
제럴드와 번치가 시차를 두고 뒤이어 달려들었다.
“C 포메이션! 분쇄해 주마, 아이젠 폰 그린우드!”
아이젠이 바라던 대로 C까지 나왔다. 이번에는 시차 공격인가.
앞선 공격이 실패해도 나머지 둘이 성공한다면 아이젠에게는 조금이나마 상처를 입힐 수 있을 테니, 나쁜 전략은 아니다.
물론 아이젠이 셋 다 무위로 돌리면 실패한 계책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이젠은 그렇게 해주기로 했다.
‘힘 좀 줘볼까!’
―쉬이익!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잭스의 검을.
콱― 아이젠은 왼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막았다.
“윽?!”
뒤이어 날아드는 제럴드의 검 역시.
콱― 왼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멈춰 세웠다.
“헉!”
마지막 세 번째, 번치의 검도 날아들고 있었는데.
아이젠은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번치의 검보다 높이까지 올려.
콱! 그의 검을 짓밟았다.
“으악!”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면, 세 흑기사 모두 아이젠에게 붙들려 움직일 수 없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잭스는 힘을 줘 빼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치 단단한 돌에 칼날이 박힌 것 같달까. 이 상황에서는 세게 힘줘 빼려 하면 오히려 칼날이 부러질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힘이!’
고작 열여섯 살짜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제야 잭스는 생각할 수 있었다.
‘제이슨 흑기사님. 그분은 분명 나보다는 약하셨지만 경험에서만큼은 나보다 뛰어났다. 그런 분이 아이젠 집쥐공자를 잡아내지 못했다는 건.’
아이젠에게는 노련함까지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의 생각처럼 아이젠이 세 사람을 멈춰 세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현재 아이젠은 홍화의 기운은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됐지만, 발목 피로도는 아직 다 가시지 않았는데.
‘유랑보와 목롱보를 사용해 세 놈을 일일이 잡는 것보단, 셋 다 그냥 나 있는 곳에 묶어두는 게 더 낫지.’
하는 판단에서였다.
아이젠은 생각하면서도 계속 셋의 검을 붙들어두고 있었다. 현재의 아이젠으로서는 사흘 밤낮을 이러고만 있을 수도 있었다.
마침내 잭스와 제럴드, 번치가 소리쳤다.
“크윽! 당장 이거 놔!”
“놔줘!”
“이이익!”
그러나 아이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놔줄 생각 없어.”
“이 새끼!!”
“새끼? 얻다 대고 새끼래, 건방진 새끼가.”
아이젠은 마침내 발목 피로도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생각하고.
근육을 안쪽으로 당겨, 세 흑기사를 모이게 했다.
마치 소용돌이에 휘감기는 것처럼 잭스, 제럴드, 번치는 아이젠의 안쪽으로 잡아 당겨졌다.
“어엇!”
그 틈을 타 아이젠은, 이미 양 주먹에 홍화를 불어넣은 뒤였다.
‘결사신권, 권왕백무(拳王百舞) : 관(貫)!’
―퍽!
―퍽!
아이젠은 양팔에 붙어 있는 잭스와 제럴드를 날려버렸다.
그들은 강한 장력에 끌리듯 날아갔기 때문에, 각자의 손에서 검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커헉!”
“크아악!!”
다만 아직 발치에 있는 번치에게만큼은 주먹을 먹이지 못했는데.
“어, 어어어…….”
번치가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아이젠을 올려다보자.
아이젠은 사람 좋은 미소를 장착하고 싱긋 웃어 보였다.
번치도 무의식중에 따라 웃으려는 찰나.
“웃지 마, 정 들어.”
―퍽!
그 역시 검을 놓치고 멀리 날아갔다.
번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얼굴을 맞은 즉시 기절했으므로.
떨그렁― 떨그렁―
마침내 세 자루의 검을 바닥에 떨쳐놓은 아이젠은, 격렬한 움직임 탓에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게오르크도 참. 내 실력을 너무 얕보는 거 아냐? 겨우 이 정도 녀석들밖에 안 보내다니. 5성, 6성쯤은 되는 흑기사들을 보냈어야지.”
아이젠이 농담조로 말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잭스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시퍼런 피멍이 크게 들어 있어, 얼핏 보면 얼굴 전체가 파란 사람처럼 보였다.
“크, 으으윽…….”
아이젠은 잭스에게서 기척을 느끼고 그가 넘어져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아이젠은 잭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당장은 살려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