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흑기사.’
바로 제이슨과 같은 흑기사들.
그들은 스스로 기권하는 그린우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피쉬트랩 던전에 상주하고 있다.
물론 같은 흑기사라고 해도, 조금 전 버디와 만났을 때처럼 프렘린에게조차 당하는 흑기사들도 있는 법.
그러나 그를 계속 쫓아다니는 이 세 명의 흑기사는 좀 다르다고 아이젠은 생각했다.
‘최상위 수준의 은신 능력. 그리고 침착함.’
은신 능력은 차치하고.
알브레히트나 버디의 등장을 보고도, 아이젠은 흑기사들이 발가락 하나 서투르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다.
즉 제대로 훈련이 되어 있다. 평범한 흑기사와는 다르다.
아이젠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안 나오면 내가 간다.”
아이젠의 손에 마침내 홍화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무혈신공 운공이 불가능한 시간이, 끝났다.
* * *
“캬륵. 캬르륵…….”
프렘린 한 마리가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선 마치 인간에게서나 볼 법한 회한이 느껴졌다.
“제발…… 제발…….”
프렘린이 애원하자.
프렘린의 심장을 움켜잡고 있던 남자, 게오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군.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프렘린들이 밀집한 지역이 어딘지 알려주면 살려주겠다고.”
“캬샤앗…….”
“거부한 건 너다. 이제라도 불면 살려주도록 하지. 어떡할래?”
게오르크는 참철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그는 맨손으로 프렘린의 가슴 근육을 찢고,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그 안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다.
두근― 두근―
인간보다 조금 더 큰 치수인 프렘린의 심장이 맥동할 때마다 그 진동이 게오르크에게 전달됐지만.
게오르크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에 묻은 몇 점의 피가 그 얼굴을 서늘하게 했다.
“정말…… 모른단 말이다. 캬륵…….”
“그래? 이래도?”
“캬아악!”
게오르크는 터지지 않을 만큼만 프렘린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프렘린이 고통스러워했고.
프렘린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래도? 이래도?”
“캬악! 캬하악!!”
왈칵―!
마침내 프렘린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게오르크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서 프렘린을 털어냈다.
“쯧. 피만 묻었잖아.”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려던 게오르크는 옷소매로 닦아내려 했다. 그러나 얼굴을 문지르면 오히려 피가 더 번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게오르크가 피 칠갑을 하고 있던 그때.
“게오르크?”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주황 머리의 익숙한 남자.
프란츠였다.
“하, 여기서 다 만나는구만, 게오르크! 그노시스에 입성한 이후론 처음인가?”
프란츠는 예의 곡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사실 온종일 이 숲속에서 게오르크만을 찾아 헤맸지만, 그렇지 않은 체하며 허세를 부렸다.
게오르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뭐야, 프란츠였나.”
“그렇……?”
응?
프란츠가 성큼성큼 걸어오다가, 문득 주춤 뒤로 물러서게 됐다.
게오르크의 몰골이 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몸이 피 칠갑을 하고 있는 데다 바로 옆에는 심장이 꿰뚫린 프렘린의 사체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거…… 게오르크 맞아?’
꿀꺽―
프란츠의 기억에 게오르크는 항상 직계랍시고 고상한 척만 하던 재수 없는 놈이었다.
이렇게 너저분하게 싸움을 하는 녀석이 아니었을진대.
게오르크는 피곤한지 풀린 눈으로 말했다.
“싸우자고 할 거면 다음에 하지. 지금은 좀 피곤해서.”
“……웃기지 마라! 전쟁터에서도 피로를 핑계로 물러날 거냐? 이건 대련이 아니야! 실전이지!”
―쉬익!
프란츠는 게오르크의 말에서 오히려 자극을 받고 곡도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참철곡도검술을 사용할 자세를 잡았다.
게오르크는 입 안쪽의 피를 뱉어내며 대꾸했다.
“검을 맞댈 가치가 없어.”
“뭐?”
“프란츠. 네놈과는 검을 맞댈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네놈의 참철검을 내가 잘라 버렸던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불끈!
프란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게오르크와 그가 그노시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게오르크는 아주 가볍다는 듯 프란츠의 참철검을 잘라냈었다.
그때의 굴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하! 이 곡도가 보이지 않는 거냐? 스미스쏜즈의 대장장이에게서 새로 빚어 받은 검이라고. 그때랑 똑같으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프란츠는 호기롭게 외쳤다.
새롭게 벼려낸 이 곡도라면, 게오르크에게도 밀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
‘물론 아이젠 그 녀석이랑 싸우면서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지만.’
프란츠는 아이젠과 겨뤘던 때를 생각했다.
그때는 동생 아우구스트가 나타나 흐지부지됐지만.
검도 쓰지 않는 녀석을 상대로 등을 보인 것엔 프란츠도 자존심이 꽤 상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니다.
프란츠는 곡도를 휙휙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여기서 쓰러뜨려 주마! 게오르크!”
“……하아.”
게오르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허리춤에 매여 있는 참철검 손잡이를 툭툭 쳤다.
“이런 데서 검을 뽑아 들었다간, 내 참철검 ‘라니에’가 울 텐데.”
“흥! 그새 애검(愛劍) 삼기라도 되었나 보지? 하지만 그 검을 뽑지 않으면―”
―쉬이익!
프란츠의 발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곡도를 옆으로 세워, 게오르크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서 죽게 될 거다!”
―사악!
그렇게 곡도를 휘두르는 그 순간.
―턱!
게오르크가 프란츠의 곡도를 맨손으로 잡았다.
어떠한 오러도 손에 싣지 않고, 글자 그대로 맨손으로.
“―?!”
“이게 네가 새로 벼렸다는 참철검인가?”
“어, 어떻게 맨손으로……!”
놀라웠다. 단순히 잡힌 게 놀라운 게 아니다.
게오르크의 손은 프란츠의 칼날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는데.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었다. 조금도 베이지 않았다는 뜻.
‘말도 안 돼! 스미스쏜즈의 대장장이가 만든 검을?!’
대장장이가 태업을 했나?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부들부들.
프란츠는 게오르크의 손에서 곡도를 뽑아내려 했지만,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빠지직. 빠지지직.
―깽창!!
“헉!!”
프란츠의 곡도가 산산이 조각났다.
게오르크는 맨손으로 참철곡도검술을 막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곡도를 부숴버린 것이다.
만년한철로 만든 참철검을!
“마, 말도…… 말도 안 돼…….”
“여기서 그냥 돌아갔다면 살려주려고 했어.”
“뭐, 뭐라고?”
“살려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프란츠 반 그린우드.”
프란츠는 보았다.
게오르크의 눈동자가 상어의 눈처럼 세로로 찢어지는 것을.
그는 비웃고 있었다. 프란츠의 나약함을.
“큭큭큭. 제 명에 못 죽는 건 아무래도 우리 그린우드 특징인가?”
“너, 모, 목소리가.”
“내가 참철검을 부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다 봐버린 이상 어쩔 수 없지.”
“기, 기다려.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후후후.”
게오르크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경박해져 있었다.
마치 기존보다 한 옥타브는 올라간 것 같은 목소리로, 게오르크는 계속 말했다.
“걱정하지 마. 3방주님께서 슬퍼하시는 일이 없도록, 프렘린한테 당해 죽은 거로 꾸며줄 테니까.”
게오르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프란츠는 조금 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을 그제야 알아챘다. 대체 저 손에는 왜 저렇게 피가 많이 묻어 있는 것인지.
심장이 뚫린 프렘린을 보고서야, 프란츠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다.
게오르크가 실눈을 뜨고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가주가 될 때까지, 내 착한 이미지가 흩어져선 안 되거든.”
그날 숲속에 프란츠의 비명은 높고 곧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음성은 금세 잦아들어,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프란츠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숲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에 다리, 저쪽에 팔뚝, 저 산 너머에는 내장.
게오르크는 비지땀을 닦는 자세로 혼잣말했다.
“휴, 마물 소행인 것처럼 꾸미는 것도 어렵다니까. 그렇지 않아?”
그 순간 게오르크의 뒤쪽에 흑기사 한 명이 내려섰다.
그 흑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게오르크는 기척을 감지하고 말을 건 것이다.
나타난 흑기사의 이름은 포터. 포터가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노고가 많으십니다! 게오르크 공자님!”
“그래, 포터. 아이젠은?”
게오르크는 양손의 피를 풀잎에 닦아내며 곧장 본론부터 말했다.
“죽였나?”
게오르크는 몇 분 전 포터에게 말했었다.
때가 되었다고.
포터는 그 한 문장에서 아이젠의 암살이라는 숨은 뜻을 간파하고, 자신의 부하 흑기사 셋을 보내 아이젠의 암살을 지시했다.
포터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예! 죽었습니다. 방금 막 시체를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오래 걸렸네.”
그렇다. 정말 오래도 걸렸다.
벌써 반년쯤 전 일. 게오르크가 자신의 종 둘에게 아이젠의 독살을 지시했던 일부터 시작하여.
흑기사 제이슨을 보내 피스풀 지하감옥의 아이젠을 죽이라고 지시했던 일.
그리고 오늘, 다시 포터에게 아이젠의 숨통을 끊어오라는 지시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게오르크가 직접 했더라면 분명 금세 끝날 수도 있었을 일.
하지만 게오르크는 자신이 가주 자리에 오르기 전까진, 본성을 숨기고 싶었다.
그래도 어쨌든 일은 끝났다.
“죄송합니다, 게오르크 공자님.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아니야. 난 자애로운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 가문의 소가주가 될 사람이기도 하지.”
“무, 물론 그렇습니다.”
“다음은 바네사와 한스인가……. 귀찮게 두 놈 다 소가주전까지 나올 줄이야.”
게오르크는 중얼거리더니, 아직 피가 덜 닦인 손으로 포터의 얼굴을 감쌌다.
덕분에 포터의 두 뺨에 피가 덕지덕지 묻었으나, 그는 황홀경에 빠진 얼굴이었다.
“아, 아아. 은혜롭습니다, 게오르크 공자님…….”
“그래.”
게오르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포터가 게오르크에게 아이젠의 암살 사실을 고한 것으로부터 약 30분 전.
아이젠은 숲속에서 자신을 쫓던 세 개의 기척을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 세 개의 기척이, 드디어 수풀을 헤치며 등장했다.
“…….”
“…….”
“…….”
키가 큰 놈, 중간 놈, 작은 놈.
직관적이어서 좋다고 아이젠은 생각했다.
아이젠은 이들 셋 전부가 아무래도 게오르크의 부하들이리라 지레짐작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굳이 날 계속 쫓아다닐 필요가 없을 테니까.’
제이슨에 의해 자신의 암살 배후가 게오르크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알아둔 상태.
금방 또다시 접근해 오리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던 아이젠이었다.
‘최소 피쉬트랩 던전에서는 나간 다음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아이젠이 두 다리를 바닥에 지탱했다. 마치 두 개의 중심축 위에 몸을 올려놓은 듯 안정적인 자세로 말이다.
세 명의 흑기사 중 키가 큰 놈이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우리가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