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상한데.”
아이젠은 본능적으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구체적으로는 위화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감정이었다.
―파사사삭.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젠이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새는 없었다. 바람이 크게 불었나 보다.
그 바람은 차갑고 어두운 한기였다.
“……에이, 모르겠다. 신경 끄자.”
아이젠은 지금 15개의 레드스톤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
기존에 있었던 레드스톤에다가, 이번에 얻은 레드스톤을 모두 합친 숫자.
그렇다 보니 무게감이 상당했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는 채로는 한발 한발 옮기기도 버겁달까.
그래서 그것에만 신경 쓰기도 벅찼다. 아이젠은 랄프의 일은 잠시 기억에서 접어두기로 했다.
“예삿일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아이젠의 허무한 감상이었다.
* * *
피쉬트랩 던전에서 나온 뒤, 그노시스의 사막 언덕들을 지나.
외곽까지 향하면, 그곳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으슥한 골목이 있다.
햇볕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적도 거의 없는 골목.
“…….”
그곳에, 랄프 반 그린우드는 서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알브레히트에게 업혔다가 깨어나, 어느새 여기까지 나와 있는 것이었다.
불과 몇십 분 전에 그는 그린우드 소가주전에서 탈락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다만 그는 무언가에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그는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확실합니다. 제가 보았습니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랄프의 앞에는 과연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평범한 체구의 남자이지만, 머리가 단발인 게 특징이라면 특징인 사람.
그의 이름은 발터였다. 그는 요아힘을 모시는 간부 중 하나였다.
발터의 얼굴만은 도깨비 뿔이 두 개 달린 가면 탓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흐음, 정말 확실한 거 맞아?”
“그, 그렇습니다.”
발터의 재차 질문에도 랄프는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랄프는 좀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 녀석이 분명 룬의 힘을 사용하는 걸 봤습니다. 그놈의 몸에는 분명 룬이 있어요.”
룬.
아이젠의 몸에서 푸른빛의 기운이 나오는 것을 랄프는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오러 따위가 아니다. 룬, 룬이 아니면 나타낼 수 없는 기운.
랄프는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반 그린우드가 룬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기에 오러와 룬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
그제야 발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얼굴은, 가면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랄프도 조금은 화색이 되었다.
랄프에게 아이젠이 룬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보고 오라 지시한 것은 발터였다.
발터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아힘 님에게 공적을 빼앗길 수는 없지.’
그는 명백히 요아힘을 모시는 사람이다.
하지만 요아힘이 알 수 없도록 딴 주머니를 차고 있기도 했다. 발터는 제법 야심가였으니 말이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놈의 몸에서 룬을 뽑아내야겠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요아힘 님이 아니라 나를 더 높이 등용해 주시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발터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자, 랄프도 함께 기뻐하며 웃었다.
“하, 하하하…….”
그러나 사실 랄프의 마음속에는 한 문장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그래서 저는 이제 살려주시는 거죠?”
“수고는 했다.”
“가, 감사합니다.”
“근데 살려줄 수는 없어.”
“네?! 왜, 왜요!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랄프 반 그린우드.
불현듯, 그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툭.
랄프가 화들짝 놀라 손을 들어 보니, 새끼손가락이 어디에 걸렸는지 조금 찢어져 있었다. 그 탓에 손가락이 뭉그러져 있었다.
그의 몸은 썩어가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처음보다 훨씬 더 부패가 진행됐어!”
랄프가 절규했다.
랄프는 사실 며칠 전 이미 죽었다. 그노시스에 입성하기 전에, 발터와 마주하면서부터 말이다.
랄프가 죽었는데 여전히 말을 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안 된다니까. ‘최후의 숨결’에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힘 같은 건 없어. 그냥 잠깐 숨만 붙여놓는 정도지.”
바로 발터의 능력 ‘최후의 숨결’ 덕분이었다.
랄프가 소리 질렀다.
“그, 그러면 왜 내가 살아날 수 있다고 거짓말했어! 날 죽인 건 다름 아닌 당신이잖아! 아이젠이 룬을 가지고 있는지만 알아오면 살려준다고 했잖아!”
“그랬지.”
“근데 왜……!”
―덥석!
발터의 손이 랄프의 입을 잡아 막았다.
랄프는 놀라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발터가 말했다.
“넌 내가 성인군자로 보이냐?”
“읍, 으으읍……!”
“누가 내 말 믿으라던? 병신.”
“살려……!”
―퍼억!
랄프는 입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발터가 랄프의 얼굴을 움켜쥐어 터뜨려 버렸으므로.
발터는 손에 묻은 유기물들을 털어냈다.
“쳇, 더러워.”
그런 한편 마음속으로 칼을 품었다.
‘아이젠.’
특이한 이름이다. 강철이라니.
그 아이젠은 블렌하임을 죽였다. 물론 블렌하임은 발터보다도 낮은 등급의 간부인지라 죽어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맨몸으로 블렌하임과 맞서 이겼다는 것이 껄끄럽다.
‘블렌하임, 그 녀석은 힘이 장사였는데 말이지. 힘 대 힘으로 붙어서 그 녀석을 이겼다고?’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가능한 일일까.
발터는 피식 웃었다. 사실 별로 중요치도 않은 일이었으니.
“최후의 숨결.”
그가 다시 읊조리자.
바닥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마치 연못에 염산을 푼 것처럼.
그러다가.
―쿠구구구구!
―쿠구구구궁!
땅속에서 하나둘씩 썩은 팔이 올라오더니, 땅을 헤집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
“크어어어.”
“가아아아아.”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등장하는 것들은, 그 지역에 묻혀 있던 시체들이었다.
원래는 그노시스의 시민들이었을 것이다. 이곳 골목은 연고자가 없는 시체를 묻어두는 무덤이기도 했으니까.
그것을 발터가 일으켜 세운 것이다. ‘최후의 숨결’이라는 비상한 능력을 사용하여.
“큭큭. 일대일에서 아무리 강해봐야, 수없이 많은 내 좀비들을 상대로는 이길 수 없지.”
발터는 멀거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한창 그린우드 가문의 소가주전 본선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
그리고, 발터는 능히 그 행사를 망쳐 버릴 수 있었다.
“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주지.”
발터의 발이 움직였다.
* * *
아이젠이 무혈신공을 재운용할 수 있을 때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아이젠은 생각보다 태연하게 피쉬트랩 던전 숲속을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뭐지?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근처에서 프렘린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아이젠이 걷는 동안 단 한 마리의 프렘린도 습격해 오지 않았다.
아이젠은 자신의 위장 능력이 생각보다 쓸 만한가 보다 싶었다.
“역시, 난 무식하게 힘만 센 건 아니라니까.”
레드스톤을 짊어지고 걸으려니 안 그래도 몸이 불편했는데 다행이었다.
물론 간혹가다, 이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캬르르릉. 캬르르릉.”
아이젠은 멀리, 프렘린 한 마리가 나뭇등걸에 기대어 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 딴 데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와중인데 천하 태평하기도 하지.
‘졸리니? 그래, 잘 자.’
아이젠은 굳이 그 프렘린에게까지 손대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무혈신공을 쓸 수 없는 지금 구태여 시비를 걸 필요가 없기도 했고.
그렇게 사박사박 수풀을 밟으며 프렘린을 지나치려는데.
“캬릉!”
‘깜짝이야.’
프렘린이 잠꼬대를 좀 거칠게 했다.
아이젠은 놀라서 하마터면 프렘린의 얼굴을 짓밟을 뻔했다.
그나저나, 아이젠은 문득 고개를 들어 수풀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공기가 싸늘해.’
추운 바람 탓도 있겠지만, 던전 내부가 전체적으로 싸늘해진 느낌이다.
이유를 알 만했다. 버디가 죽었기 때문이리라.
버디는 단순히 마혼인 것을 떠나, 이 피쉬트랩 던전을 지배하는 우두머리였다.
그런 버디가 죽었으니 그 밑에 있던 프렘린들은 살판이 열렸을 터.
‘버디 놈이 죽으니까 오히려 프렘린들이 날뛰기 시작한 거야.’
실제로 프렘린들의 울음소리 사이사이로 사람의 비명이 들리는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숲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물론 당연히.
‘나랑은 상관없지.’
아이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때였다.
“캿!?”
“어라.”
프렘린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프렘린은 잠깐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려다가.
헐레벌떡 소리를 질렀다.
“인긴―!?”
“조용히 좀.”
아니, 지르려 했다.
아이젠이 순식간에 프렘린의 등 뒤로 이동해 그의 목을 조르기 전에는 말이다.
“캭! 캬샷! 크컥!”
“입 다물고 얌전히 죽어줄래?”
“캬악!”
아이젠은 이두와 삼두근을 활성화해 프렘린의 목을 조였다.
―꽈아악!
프렘린은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양팔을 휘적거렸다. 손톱이 아이젠을 긁으려 할 때면 아이젠은 조금씩 자세를 비틀어 그의 공격을 빗나가게 했다.
“캭! 캬아악!”
“하나, 둘, 셋…….”
아이젠이 숫자를 헤아리고.
그렇게 약 20초 정도가 지났을 때.
“캬악…….”
―쿵!
프렘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젠은 살짝 흐르는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아따, 그놈 건강하네.”
아이젠은 이런 식으로 이 숲을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이젠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다시 숲을 밟았다.
―파스스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천천히 걷던 아이젠의 무혈신공이, 이제는 어느덧 서서히 돌아오려고 할 때쯤.
아이젠의 발길은 숲속 광장에 닿았다. 우연히 나온 이 장소는 마침 나무나 풀이 듬성듬성하게 자라 있어 꽤 넓은 광장이었다.
“……음. 이 정도면 적당하겠는걸.”
아이젠은 광장 중앙에 서서, 레드스톤을 넣어둔 가방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제법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젠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대상이 없이 말하는, 혼잣말처럼 들렸으나.
사실 그가 말하는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이제 그만 나오지? 던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따라다녔는데 대체 언제 덤벼올래?”
아이젠은 알고 있었다.
마테오 백작의 텔레포트에 의해 피쉬트랩 던전으로 공간이동 된 후.
처음부터 줄곧, 아이젠을 쫓아오는 세 개의 기척을 말이다.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중간 언제쯤에는 반드시 그를 습격해 오리라 믿었으므로.
그런데, 피곤해 죽겠는데 아이젠은 계속 기척이 근처에 머무르기만 하자 살살 열이 받았다.
룬잭과 싸울 때도, 알브레히트와 싸울 때도, 버디와 싸울 때도. 세 개의 기척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젠은 그냥 그들을 호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나와?”
아이젠이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풀숲에서는 작은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단한 은신 능력.
이 정도의 은신을 할 수 있는 데다 이곳 피쉬트랩 던전에서 아이젠을 자유롭게 쫓을 수 있는 존재는, 아이젠이 알기로는 한 종류밖에 없다.
‘흑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