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힘, 그리고 힘 】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어.”
“아. 아니에요, 별말씀을 다 하시네.”
“그리고 저 아이도.”
알브레히트는 랄프를 가리켰다.
아이젠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갑자기 왜 나타나선.’
아이젠이 위기에 처할 뻔하게 했다.
얄미운 놈일세,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랄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프렘린들에게 습격당할 것이 두려웠던 모양.
그러더니, 랄프는 갑자기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리고 기절해 버렸다.
“엥?”
뭐야, 왜 기절해?
아이젠이 다가가서 쿡쿡 찔러보니, 랄프는 파리한 안색으로 정말 기절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안색이 안 좋다 싶더라니. 마음가짐이 약한 놈이구만.’
쓰러진 랄프를 향해 아이젠이 쯧쯧 혀를 차던 때.
―저벅저벅.
알브레히트가 성큼성큼 걸어와 랄프를 등에 업었다.
“이 랄프라는 아이는…… 내가 보호해야겠군. 그래도 항렬로 따지면 조카뻘인 셈이니까.”
“음, 그러시겠어요?”
아이젠은 자신이 신경 쓰기도 귀찮다고 생각한 판에 잘됐다고 느꼈다.
다만 의례적으로 한번 물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대로 여기서 데리고 나가시면, 랄프는 기권패가 될 텐데요?”
던전 주변에 만년한철로 만든 철창까지 쳐져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기권패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 벗어나는 게 아니라 흑기사를 부르는 방법도 있겠지만.
알브레히트가 말했다.
“마혼을 맞닥뜨린 것 정도로 기절한 녀석이다. 그런 정도의 녀석이라면 2차전을 나가는 것보단 여기서 기권하는 편이 나아.”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다.
더군다나 만약 알브레히트가 없는 상태에서 아이젠이 만약 랄프를 방치해 두고 간다면, 랄프는 프렘린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딱 좋을 터.
상급 마물들을 사냥하고 부산물을 얻어오는 것이 조건부인 시험에서, 그 상급 마물들을 상대하지도 못한다면.
‘여기서 탈락하는 편이 이놈한테 나아.’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
아이젠은 그렇게 대화를 끝맺었으나.
알브레히트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한 얼굴로 아이젠을 쳐다보았다.
아이젠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체 팔짱을 끼고 물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딱 한 번만, 하나만 묻겠다.”
“네.”
“네가 한 짓이냐?”
주어가 없이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지만.
아이젠은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것이 아이젠 본인이 맞는지.
알브레히트는 그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아이젠이 아니라는 의사를 표명하자, 알브레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믿으마.”
“……갑자기요? 이렇게 쉽게?”
언제는 죽일 기세로 덤비시더니만.
‘탈피 직전 나방 신세 한번 되었다기 풀려나시니 사람이 달라졌네.’
알브레히트가 초연히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거 아는가? 내게는 병이 있다. 이미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만.”
“…….”
아이젠은, 알브레히트에게 병이 있으리라 짐작 정도는 했다.
조금 전 최초에 나타난 버디가 알브레히트와 아이젠에게 수리검을 던졌을 때.
아이젠은 가볍게 피했지만 알브레히트는 그러지 못했다.
수리검이 쏜 살보다 빠른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이젠조차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참철검술의 달인인 알브레히트가 못 피할 리 없을 터.
살피건대 그에게는 신체적으로 뭔가 결함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근육이 녹아내리는 병이지. 지금 내 나이가 쉰셋인데, 의사 말이 신체 나이는 벌써 일백 살이 넘는다더군. 허, 말이 되나? 내 수명보다 신체 나이가 더 많겠어.”
“음. 그것참 안되셨네요.”
“큭큭.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들켰어요?”
아니, 사실 안됐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오로지 무를 추구하며 살아온 아이젠이다. 만약 아이젠이 근육이 녹아내리는 병 따위를 앓았다면.
그는 살아갈 낙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렇다면 알브레히트도 별반 다르진 않을 터.
문득 젊은 날 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아이젠이었다.
알브레히트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유전되는 병은 아니라고 했어.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전문가가 유전병이 아니라고 말했더라도, 아비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아. 혹시 두 아들놈이 내 병을 타고나지는 않았을까…… 항상 그게 걱정이었다.”
플로리안과 틸만. 두 아들이 자신의 병을 물려받은 것은 아닐지.
그리고 그 병이 화근이 되어, 영설산에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닐지.
알브레히트는 아비로서 그것이 걱정이었다. 두 아들의 주검을 주워섬기면서, 탓할 대상을 찾았다.
그것이 아이젠이었다. 그린우드 가문에서 유일하게 주먹을 쓰는 아이젠 폰 그린우드.
하지만 아이젠은 아니다. 알브레히트의 생각에 그는 아니다.
“자넨 범인이 아니야. 룬잭을 죽인 것도 자네가 아니지?”
“……네. 프렘린에게.”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자넨 악한보다는 선인에 가까워.”
“선인이요? 에이, 그럴 리가.”
그야 천마 도강문과 비교하면 착한 축에 속하긴 하겠지만, 아이젠은 스스로 선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젠이라고 사람 한 명 안 죽이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전생에든, 이번 생에든.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눈은 틀림없어.”
“그러신 분이 절 범인으로 의심하셨고?”
“그건 미안했네.”
알브레히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젠에게 미안해서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두 아들을 허무하게 보냈음을 한탄하는 회한의 눈물일 뿐.
아이젠은 무심결에 팔짱을 풀고.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명예롭게 싸우다 갔을 겁니다. 둘 다.”
“그래.”
알브레히트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랬길 바라네.”
* * *
―저벅. 저벅.
알브레히트는 수풀을 걸었다. 그는 지금 철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속검격으로 버디를 일도양단할 때, 이미 마테오 백작에게 들켰을 것이다.
가문의 규율을 어긴 죄로 엄벌을 받아도 할 말 없다, 알브레히트는 그리 생각하며 자수의 마음가짐으로 철창을 향해 걸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는 걷는 한편 좀 전에 헤어진 아이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현 가주 테오발트를 떠올리기도 했다.
알브레히트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테오발트 녀석. 좋은 아들을 뒀군.’
알브레히트에게 이제 아들은 없다.
아들의 대체재를 찾을 생각 따위는 없다. 하지만 아이젠 그 아이에게는―
최소한 살인범으로 의심했던 죄만은 덜어내고 싶었다.
‘어떻게 한다.’
알브레히트가 그리 고민하는 때.
그는 문득 등에 업은 랄프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걷는 동안 단순히 풀숲이 춥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랄프의 체온이 지나치게 낮았다.
‘이상한데?’
혹시 랄프에게 뭔가 이상이 생긴 건가, 알브레히트가 의문을 품고 그를 등에서 내려놓으려는 순간.
“핫!”
랄프가 깨어났다.
알브레히트는 마치 시체가 일어난 광경을 본 것처럼 퍼뜩 놀랐다.
“이놈, 놀랐잖으냐.”
“앗, 알브레히트 5방주님?”
랄프는 자연스레 알브레히트의 등에서 내려왔다.
“절 업어주신 겁니까? 황송하게도.”
“음. 괜찮다. 기절을 했던데, 몸은 좀 괜찮으냐?”
“물론입니다!”
“랄프, 네게는 아쉬운 말이겠지만 아무래도 넌 이 피쉬트랩 던전에 더 머무르기에는 실력이 부족한 것 같구나. 기권하는 게 어떻겠느냐.”
“음. 방주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기권하겠습니다.”
랄프는 알브레히트의 말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너무 시원스럽게 말하니까 오히려 알브레히트가 말릴 정도였다.
“아니…… 고민을 좀 더 해보고 판단해 보거라.”
“아닙니다! 알브레히트 5방주님의 말씀이 맞아요. 전 이 던전에 있기엔 모자란 녀석입니다.”
랄프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허리를 크게 숙이고 손을 내밀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5방주님!”
“음. 그래.”
알브레히트는 랄프의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가 손을 놓자, 랄프는 재빠른 걸음으로 철창으로 향했다.
“그럼 전 이 길로 흑기사에게 기권 의사를 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거라.”
배알도 없는 녀석인가. 알브레히트가 랄프의 뒷모습을 보며 품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랄프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도 이제 가봐야겠군.’
알브레히트도 철창 밖으로 움직이려 발을 움직이는데.
멈칫―
문득 그의 발이 멈췄다.
본능이 던지는 물음이 있었다.
방금 만진 랄프의 손.
그 손 말이다.
‘왜 이렇게 차가웠지?’
조금 전 등에 업었을 때도.
악수를 했을 때도.
손이 지나치게 차갑다. 마치 죽은 자의 손처럼.
그러고 보면 랄프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새하얀 피부는 그린우드에서 보기 드문데.
‘단순히 햇볕을 덜 받고 자란 녀석이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알브레히트는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의문을 지울 길이 없었다.
* * *
“자, 이 정도면 됐겠지?”
아이젠은 앞으로 1시간 동안 무혈신공을 운공할 수 없다.
결사신권이야 사용할 수는 있다. 아이젠이 피스풀 지하감옥에서 했었던 것처럼. 하지만 내공이 없는 이상 강한 힘을 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그때와 같이 혈공(血功)을 사용하면 내공도 사용할 수는 있을 테지만.
그런 위험요소를 떠안을 필요는 없다, 아이젠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서 아이젠이 선택한 방안은.
“난 참 똑똑하단 말이야.”
수풀의 가지를 꺾어 몸에 덧대는 것이었다.
지금 아이젠의 모습은, 아이젠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올곧은 나무인지 사람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을 이렇게 꾸미는 데만 벌써 10분이 걸렸다.
‘적이 나타난다면야 안 싸울 이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자중은 해야지.’
아이젠은 강해지기 위한 싸움을 할 뿐, 멍청하게 맞붙어 개죽음당하는 건 그의 시나리오에 없다.
아이젠은 얌전한 걸음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아이젠이 조용히 걸을 때, 문득 하늘 위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랄프 반 그린우드 님께서 탈락하셨습니다…….]
마테오 백작님의 목소리.
알브레히트의 인도대로, 랄프는 역시 탈락했나 보다.
‘기권패인가. 쯧, 안됐네, 그 녀석.’
랄프, 그도 분명 영설산의 시련을 통과하고 이곳에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한 가닥 하는 녀석일 터.
“……?”
가만.
그렇다면 어째서 고작 상급 마물 따위에게 기절을 했지?
영설산에서도 그런트들을 상대했을 텐데 말이다. 심지어 화이트 오크도 분명 만났을 터.
‘화이트 오크는 프렘린이나 버디보다 더욱 상위에 있을 거야.’
같은 마혼이라도, 화이트 오크와 버디는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겪어온 경험이 다르다.
그런 존재와도 맞닥뜨리며 잘 버텨온 주제에, 프렘린 따위에게 겁을 먹고 기절했다고?
물론 화이트 오크는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유효타를 먹이는 게 시련이고, 또 정확히는 겁을 먹었다기보단 긴장이 풀려서 기절한 거였겠지만.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