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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넷째는 역대급 무공천재-94화 (94/201)

94화

―휘오오오오오!!!

거센 바람이 분다.

―파스스.

바람은 풀숲을 흔들고.

―덜덜덜.

프렘린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으며.

―꿀꺽!

랄프가 침 삼키는 소리가 사위를 집어삼킬 만큼 크게 들렸다.

“……!”

버디도 잔뜩 겁먹어 있었다.

눈앞의 소년, 아이젠은 버디가 손 한 번 휘저으면 다진 고기가 될 만큼이나 작다.

그런데도.

버디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 혐오스럽던 웃음소리마저 이제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이젠의 오른쪽 주먹에 담긴 연분홍빛의 홍화가.

비명조차 집어삼켰다.

“버디. 넌 단단하다고 말했어.”

아이젠은 일장연설이라도 할 듯한 목소리로 낮게 내리깔았으나.

이어지는 말은 짧았다.

“하지만 룡피금강불침(龍皮金剛不侵)만큼은 아니겠지.”

―퍽!

둔탁하고 기분 나쁜 소음.

아이젠이 주먹을 뻗자마자 울린 소리였다.

뒤를 잇는 건 거칠지만 통쾌한 소리.

―퍼엉!!

폭발음이었다.

한순간만큼만 바람도 멎은 뒤에.

먼지가 들이치고, 폭풍이 몰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아이젠을 중심으로 반경 2m까지의 앞이 삽으로 밀어버린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곳에 오도카니 서 있던 것은 단 하나의 존재.

“커……어…….”

버디였다.

버디는 이제 그게 버디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형체가 뭉그러져 있었다.

진홍색 떡을 얄궂게 다져 뭉쳐놓은 것처럼, 버디는 몸을 잃었다.

그 와중에 숨구멍만은 막히지 않아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는 것이 애처롭게마저 느껴졌다.

“허…… 헉…….”

단단하던 신체를 더 이상 자랑조차 못 하고, 버디는 그렇게 간신히 숨만 붙은 가련한 생명체가 되었다.

그 즉시.

―팟!

아이젠의 왼팔과 오른쪽 다리를 감싸고 있던 고치가 풀렸다. 하늘거리는 명주실이 바람을 받아 허공에서 흩어졌다.

‘천차횡도(千車橫道). 한 발 한 발이 관의 위력을 내는 일격을 천 번 응축해 날리는 것.’

천차횡도는 일시적으로 홍화로 붓칠한 붉은 잔상마저 허공에 남긴다.

이것이 아이젠이 무혈신공 4성으로 낼 수 있는 최대의 기술이었다.

“후.”

아이젠은 왼팔과 오른 다리를 움직여 봤다.

큰 이상은 없고 다행히 모두 멀쩡했다.

그리고, 아이젠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알브레히트 5방주 역시 마찬가지로 고치에서 벗어났다.

―팟!

갑작스럽게 고치가 온몸에서 떨어져 나갔음에도, 알브레히트는 무게중심을 잃지 않고 바닥에 안착했다.

그러나 막혔던 폐가 뚫리는 쾌감만큼은 참을 수 없었는지,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우! 후우우!!”

“알브레히트 5방주님!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랄프가 호응하자, 알브레히트는 손을 뻗어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고치 속에 갇혀 있었던 시간이 5분은 될까?

그 짧은 5분이 알브레히트에게는 영겁 같았다. 무엇보다 숨을 참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므로.

‘저 아이가.’

알브레히트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아이젠을 쳐다보았다.

아이젠 덕에 자신은 살아날 수 있었다.

두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한 용의자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알브레히트는 나름 굴욕적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으나,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크음.”

마침내 알브레히트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고.

‘멀쩡하시구만.’

아이젠도 그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이제 마무리를 짓기 위해 버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끔찍한 몰골이군, 마혼 버디.”

“끄오오…….”

“걱정 마. 난 이제 네게 한 톨만큼도 손쓸 힘이 없으니까.”

아이젠의 몸에서, 이제 더 이상 홍화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글자 그대로 기운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이젠은 현재 내공을 완전히 쓸 수 없는 몸. 천차횡도를 사용한 반작용이다.

‘앞으로 최소 1시간은 쓸 수 없겠어.’

아이젠은 버디의 표정에서 잠시 안도감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표정이 그려지는 부분을 ‘얼굴’로 볼 수 있다면 얘기지만.

그러나 아이젠의 이어진 말에, 버디의 몰골은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 말고 이분도 용서할지는 모르겠네.”

아이젠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왼쪽을 가리켰다.

그쪽에선 어느새 다가온 알브레히트가 걸어오고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마검 빅샤크를 손에 쥔 채, 땀에 전 모습으로 아이젠 가까이 다가왔다.

“음…….”

알브레히트는 달리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고개를 숙여 아이젠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이젠은 멋쩍은 웃음으로 감사를 받았다.

알브레히트가 버디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아는 체를 해왔다.

“네 녀석의 얼굴. 기억나는군.”

“캿……?”

“그러니까 37년 전쯤이었나…… 내가 네놈 등에 상처를 남겼지.”

37년 전이면 전대의 소가주전이 있었던 때.

꽤나 오래전 일임에도, 알브레히트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소가주전 때 이곳 피쉬트랩 던전에서, 자신이 버디의 등에 깊은 자상을 남겨놓았음을 말이다.

지금 쥐고 있는 이 마검 빅샤크로.

“……!”

그제야 버디도 알브레히트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안 그래도 파리하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너, 너는……!”

“그날 널 죽여놓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지.”

“캿, 캬앗! 저, 저리 가! 멀리 떨어져!”

알브레히트가 검을 휘두를 기세가 되자.

버디는 뭉그러졌던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 다리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러더니 그 어설프게 만들어진 다리로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 처량한 모습에 아이젠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애쓴다, 애써.’

알브레히트는 그저 초연한 얼굴로 버디를 느릿느릿 쫓고 있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조금 전까지 버디는 이 피쉬트랩 던전의 주인을 자처할 만큼 강했지만.

이제는 한 마리 토끼만큼이나 연약한 처지가 되었다.

“캬앗! 이, 이대로 끝날 순 없어. 이대로는!”

그 순간, 버디가 뒤를 돌았다.

그는 벌써 어느 정도 본신의 형체를 차린 모습이었고, 이제는 네 개의 팔마저 얼추 모양만큼은 갖추었다.

그때, 한쪽 팔 안쪽이 움푹 들어갔다.

아이젠은 또 저 안에서 수리검이라도 나오는 건가 싶었지만.

이어진 광경에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 수밖에 없었다.

“캬앗! 이대론 못 당한다고!”

버디가 팔 안쪽에서 꺼내 든 것은, 검은색의 알약.

아이젠이 익히 보아온 것이었다.

‘아모스?’

그것이 어째서인지 버디의 팔 안쪽에 있었던 것.

아모스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알브레히트는 계속 버디에게 걸어갔고.

버디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아모스를 집어 들었다.

“너.”

아이젠이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어디서 났지?”

“캿! 캬앗! 이 약만 있으면 나도 다시 강해질 수 있어!”

“묻는 말에 대답해. 어디서 난 거냐?”

“캬앗!”

버디는 대답하지 않고.

―와그작!

알약을 씹어 삼켰다.

그러자, 지점토처럼 녹아내려 있던 버디의 몸이 단단한 탄력을 갖추더니.

―불쑥!

한순간에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우오오오오오!”

버디의 늘어지는 비명.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캬캬캬캬! 역시 이 약의 힘만 있으면! 진작 쓸 걸 그랬군!”

버디는 철인 같은 네 개의 팔로 아이젠과 알브레히트, 그리고 랄프를 각각 가리켰다.

“인간들 주제에! 감히 마혼인 이 몸에게 대들어! 너희 모두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갈기갈기 찢어 육포로 만든 다음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씹어 삼킬 거라고! 캬캬캬캬캬!!”

“히익!”

랄프가 놀라 넘어질 때.

아이젠은 여전히 알브레히트가 알약을 어디서 났나 궁금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마혼 버디가 암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아모스 덕분이었나?’

아이젠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아모스를 섭취한 녀석들은 모두 기이한 힘을 썼다.

사람이라고 그럴진대, 마물이라고 다를 바 없으리라.

살아온 세월도 세월이지만 어쩌면 버디는 아모스의 힘으로 마혼으로 각성한 것일지도 몰랐다.

‘프렘린들이 흑기사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아모스의 힘을 빌렸기 때문인가.’

상급 마물 정도인 프렘린들이 어째서 흑기사들을 가볍게 이길 수 있었는가, 그 의문도 해소되었다.

주변에 원을 그리며 서 있던 프렘린들이, 아모스로 각성한 버디를 보며 신나 하고 있었으니까.

“캬샤샤샷!”

“캿! 캿! 버디 님이 노하셨다!”

“캿! 건방진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주십쇼, 버디 님! 캬샤샷!”

꼴값들 떨고 있네,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조용히만 있던 알브레히트는.

“……정말 못 봐주겠군.”

아이젠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검을 양손으로 그러쥐었다.

알브레히트의 마검 빅샤크에서, 연두색의 오러가 빛나기 시작했다.

“참철검술 6성, 역속검격(力速劍擊).”

―슈팟!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알브레히트는 버디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알브레히트는 검을 부채처럼 길게 뻗은 자세였다.

그는 뻗은 자세 그대로, 다시 검을 허리춤의 검집으로 갈무리했다.

―찰캉.

마검 빅샤크가 부드럽게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이 이상 검을 뽑을 필요도 없다는 양.

“―커헉!”

그 태도가 맞았음을 증명하듯, 버디가 피를 토했고.

스르르―

다음 순간 버디의 몸이 사선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버디는 골반 왼쪽부터 오른쪽 어깨 위까지, 일직선으로 깔끔하게 베여 있었고.

그건 아이젠으로서도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완벽한 일도양단(一刀兩斷)이었다.

‘대단한데.’

이것이 참철검술 최상급자 경지에 오른 자의 솜씨인가?

아이젠은 침을 꼴깍 삼켰다. 검을 인정하지 않고 권을 받든다고 한들, 아이젠도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위력!

그런 한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어느새 또다시 호승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알브레히트 5방주님과 한판 붙어보고 싶다.’

물론 좀 전에 한판 붙긴 했지만, 싸움이 워낙 짧기도 했고, 알브레히트는 오러를 쓰지 않는 자체 페널티를 소화했다.

서로가 완벽하게 모든 힘을 쏟아부어 싸워보고 싶었다.

물론 아이젠은 지금 홍화의 기운을 밀알만큼도 쓸 수 없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이럴…… 수가…….”

―털썩!

마침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버디의 상체는, 허망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어떻게…… 난 그때와 다른데……. 캬학!”

“37년이 지났지.”

알브레히트가 바닥에 쓰러진 버디를 돌아보았다.

“그때와 다른 건 너뿐만이 아니다.”

“통탄…….”

―풀썩.

버디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캬샤샷! 버디 님이 죽었다!”

“캬샷! 말도 안 돼! 캬샷!”

“캬앗! 이제 이 피쉬트랩 던전의 주인이 사라졌다!”

“주인이 사라졌다! 주인이 죽었다!”

“캬앗! 캬아앗!”

프렘린들은 저마다 소란을 내며, 풀숲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젠은 더 이상 내공을 쓸 수 없기에 어찌 보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휴우. 방주님, 괜찮으십니까?”

아이젠의 가벼운 질문에.

알브레히트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알브레히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아이젠의 눈을 피하면서 말이다.

“음…… 고맙다.”

“네?”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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