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아이젠의 왼팔과 오른 다리는 봉인됐다.
버디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아이젠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쪽씩 없으면, 한쪽씩 더 힘을 실으면 그뿐.’
아이젠은 실시간으로 몸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신강림의 반동이 줄어들고 있다. 가속화되고 있는 것.
‘전보다 빨라.’
일전에 블렌하임과 싸우며 사신강림을 썼을 때보다 회복 속도가 빨랐다.
아이젠이 4성에 오르며 회복력도 꽤나 좋아진 모양.
“후우.”
아이젠은 심호흡 후 몸에 정기를 담았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랄프가 소리쳤다.
“저, 저게 뭐야?!”
랄프는 고치를 보고 소리친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시선은 버디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 저건 또 뭐고! 그러고 보니 프렘린이잖아?”
‘이제야 본 건가?’
사실 보기야 진즉 봤겠지만, 랄프로서도 경황이 없었나 보다.
안 그래도 새하얗던 랄프의 피부는, 더욱 사색이 되어 마치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아이젠은 시끄럽다고 생각하며 그저 몸에 내공을 담았다.
“펴, 평범한 프렘린이 아니잖아! 어떻게 저렇게 클 수가! 위험해! 위험해!!”
“……야.”
“어, 어?”
“시끄러워. 입 좀 다물고 그냥 뒤로 빠져 있지?”
“……으!”
자신은 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아이젠은 당황한 기색이 아닌지라, 랄프는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랄프가 소리쳤다.
“흑기사! 흑기사들은 어디 있지? 보고해야 돼!”
“캬캬캬캬. 저놈들 말이냐?”
버디가 비웃으며 랄프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파스스―
수풀을 자르며 등장하는 것은 프렘린들이었다.
“캬앗.”
“캬샤샷.”
그들은 저마다 한쪽 팔에 사람을 한 명씩 걸쳐 들고 있었다.
용모로 보건대 흑기사. 피를 흘리며 주검이 되어버린 흑기사들이 그들의 손에 쥐여 있었다.
랄프가 사색이 되었다.
“으, 으악!”
“…….”
아이젠도 조금은 놀라보기로 했다.
흑기사라면 그린우드 가문 내에서도 다들 한가락 한다 싶은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조차도 프렘린을 상대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일까?
‘아니. 그건 말도 안 돼.’
흑기사도 기사다. 상급 마물 정도야 일기로 잡을 수 있을 터.
그런데도 그들이 저렇게 처참하게 죽었다는 건.
‘뭔가 있어.’
뭔가 있다,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버디의 말이 이어졌다.
“캬캬캬. 인간들은 참 멍청하지. 마물을 가둬놓으면 양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건가?”
“그러게. 멍청한 생각이야.”
길들일 수 없기에 ‘마물’인 것이다.
그린우드 가문이 프렘린을 양식하려 했던 것은 실수다. 버디 같은 놈이 나오게 했으니까.
“캬캬! 이 지역은 이제 내 소유물이다! 너흰 침입자고! 인간, 너희의 그런 자만심이 너희 종을 모조리 몰살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짐승 주제에 어려운 단어를 잘도 골라 쓰는구만.”
“캬캬캬캬!”
아이젠은 버디와의 대화를 마치고, 슬쩍 랄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이.”
“뭐? 너 근데 왜 아까부터 반말을…….”
“저기 보이지?”
아이젠은 고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랄프는 아이젠의 반말은 차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젠이 말을 이었다.
“저 안에 알브레히트 5방주님이 들어계신다.”
“뭐, 뭐라고?! 알브레히트 방주님이?”
“그래. 내 왼팔과 오른쪽 다리처럼 되신 거라고 보면 돼. 저 고치는 찢을 수 없어.”
“그, 그럼 어떻게 해! 안에서 숨이라도 막히시면!”
“그러니까 네가 가서 구해.”
“내, 내가? 방금 네가 고치는 찢을 수 없다고 말했잖아.”
“뭐 방법이 있겠지. 찾아보라고.”
아이젠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내가 저놈을 유인하는 동안에.”
랄프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아이젠은 빠르게 발을 굴려 앞으로 뛰었고.
“캿.”
버디는 웃음을 지우고 다가오는 아이젠을 바라봤다.
아이젠은 이번에도 버디의 몸통을 노리고 주먹을 뻗었다.
버디는 학습이 됐는지, 네 개의 팔 중 두 개는 간과 췌장을 보호했다.
“캬캬캬! 똑같은 수에 몇 번이나 당할 것 같으냐?!”
그때.
―팟!
아이젠은 다시 발을 굴려 방향을 틀었다.
거의 90도 각도로 꺾여 들어가며, 아이젠은 버디의 측면으로 빠졌고.
“―!?”
버디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이젠은 어느새 거기 없었다.
“여기다.”
아이젠은 어느새 버디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다.
그는 버디의 등뼈가 만져지는 위에 손을 얹었다.
‘인간의 뒤쪽에서 담낭, 위, 십이지장은 등 근육과 뼈로만 보호되어 있다. 마물은 어떨까?’
버디의 신체 구조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장기의 위치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결사신권, 박살(撲殺)!’
―퍼벅! 퍽! 퍽!
아이젠은 장기가 자리해 있을 법한 버디의 등에 주먹을 정확히 찔러 넣었고.
“으억! 컥!”
버디는 허리가 활처럼 휘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뚱뒤뚱 넘어질 듯했지만 버디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크으!!!”
등 쪽이 너무 아프지만 팔이 닿지 않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이젠은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지?”
“이 자식! 비겁하게 내장을 때리다니!”
“이게 인간이 싸우는 방식이다.”
버디가 몸을 돌리자.
아이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버디는 네 개의 팔을 전부 등 뒤로 넘기느라, 또다시 앞쪽이 무방비였다.
“씹어 삼킬 줄만 아는 마물은 모르겠지만.”
상급 마물이라 해도 마물.
사람과는 지능이 다르다.
‘권왕백무 : 관(貫)!’
아이젠의 주먹이 직선으로 날아갔다.
홍화의 기운을 듬뿍 담아서!
―퍽!
아이젠은 자신의 주먹이 버디의 명치 깊숙이 들어갔음을 느꼈고.
“우거걱!”
버디는 피를 토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리검을 휘두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 따위가! 죽어!”
―쉬익!
자신을 향해 수리검이 떨어져 내릴 때.
아이젠은 피하지 않았다.
한편.
랄프는 알브레히트의 고치 앞에 다가와 있었다.
“바, 방주님! 들리십니까? 저 랄프입니다! 1방주 프리드리히 반 그린우드 님의 아들 랄프요!”
“…….”
그러나 고치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올 리 없었다.
랄프는 자신의 참철검을 뽑아 들어, 그린 오러를 불어 넣었다.
그리고 고치에 대고 검을 휘둘러 봤지만.
―치이익!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이, 이런.”
“…….”
랄프가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안에서 음성이 들리는 듯도 했다.
자세히는 신음 소리.
“읍…….”
“아, 알브레히트 방주님!? 들리세요? 제 말이 들리십니까!”
알브레히트는 숨통이 조여들고 있었다.
랄프가 계속 말을 걸어봤지만, 그 이상의 말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알브레히트의 고치 아래쪽이 버둥거렸다.
랄프가 자세히 바라보니 고치 끝에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건 미처 고치에 다 싸이지 못한 칼날이었다.
“이건 검이잖아? ……그렇다면, 설마 알브레히트 방주님의 참철검, 빅샤크인가?”
랄프가 제 나름대로 추리를 하자.
칼날이 조금 움직였다. 마치 알브레히트가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확실히 그랬다. 알브레히트는 고치에 싸이기 직전, 마검 빅샤크를 양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태로 고치에 싸인 것이고, 그렇다 보니 아직도 빅샤크를 손에 들고 있었던 것.
참철검 빅샤크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이걸 이용해서 고치를 자르라는 듯 말이다.
“아하! 알겠습니다, 방주님!”
랄프는 자신의 참철검을 납검하고, 고치 아래쪽으로 이동해 빅샤크를 잡아 빼려 했다.
상식적으로 자신의 검보단, 아티팩트 취급을 받는 알브레히트의 마검 빅샤크가 몇 배는 더 강할 테니까.
“엇차!”
하지만 고치가 워낙 밀도 높게 알브레히트를 감싸고 있어서, 참철검을 뽑아낼 만한 공간이 없었다.
랄프가 칼날을 양손으로 잡고 힘을 줘도 미동도 안 했다.
“윽! 젠장, 안 뽑혀요, 방주님! 힘 좀 줘보세요!”
“읍…….”
바로 그 순간.
“캬샤샷.”
“캿. 캿. 인간 고기.”
랄프의 뒤쪽에서 음성이 들렸다.
랄프가 기겁하며 돌아보니 조금 전 흑기사의 시체를 들고 왔던 프렘린들이 뒤에 서 있었다.
“으악. 오, 오지 마!”
스릉― 랄프가 참철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뽑자마자 프렘린들이 달려들어.
“캬앗!”
“캿! 캿!”
“이, 이거 놔!”
―팟!
랄프에게서 참철검을 빼앗았다.
랄프는 졸지에 무장해제 상태가 되었다.
‘저 멍청이가, 뭐 하는 거야.’
아이젠은 무심결에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겼고.
“캬캬캬캬! 한눈파는 거냐, 인간!”
버디가 수리검을 휘둘렀다. 그는 어느새 명치의 상처를 회복한 뒤였다.
아이젠은 유랑보를 뒤쪽으로 사용해 재빨리 몸을 움직여 간신히 수리검을 피해냈다.
―치이익.
아이젠의 발이 흙바닥을 끄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그의 이마에는 핏대가 솟아 있었다.
“후.”
“캬캬. 인간, 화난 얼굴인데?”
“화났지.”
아이젠은 슬슬 귀찮은 지경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상대했다면 눈앞의 버디 같은 놈, 얼마든지 휩쓸어버릴 수 있었는데.
방해꾼이 많았다. 여기서 방해꾼이란 버디의 부하인 프렘린들이기도 했고.
알브레히트와 랄프도 아이젠에게 있어선 방해꾼이었다.
“여기서 너희 같은 잡것들한테 죽어줄 생각은 없거든.”
“캬캬. 뭐야? 잡것?”
“그래. 잡것.”
아이젠의 몸이 불타올랐다.
넘실거리는 홍화의 기운이 아이젠의 몸에 미처 다 담기지 못하고, 밖으로 출렁출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신강림의 반동은, 끝났다.’
이제 반동은 끝났다.
아이젠은 손가락 마디, 발가락 끝까지 힘을 불어넣었다. 전신에 힘을 준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온몸의 근육을 활성화시켰다.
물론 왼팔과 오른쪽 다리에만큼은 아무리 내공을 흘려도 차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홍화(虹花). 사신강림(死神降臨). 천수관음(千手觀音).’
아이젠은 모든 강화 형태의 결사신권을 사용했다.
아이젠의 몸이 뜨거워지고.
뜨거워진 몸은 주변마저 열기로 바꿔놓았다.
―콰아아아!
“……!”
좀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분위기에.
버디는 부들부들 떨었다.
“캬캬캬…… 뭐지, 인간?”
“별거 아니야. 이제 끝내려는 거다.”
시간 낭비는 끝이다.
아이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 그거 아나? 역량이라는 말이 있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캬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여기서 내 역량을 다해볼까 해.”
―쑤욱!
한순간 아이젠의 몸에서 홍화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부우웅!
아이젠의 오른쪽 주먹으로 모든 홍화가 이동한 것이지만 말이다.
“방해물은 치운다. 내 앞길에서 꺼져.”
아이젠이 그렇게 읊조리는 순간―
―화아아.
아이젠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올랐다.
관철의 룬. 그것이 또 한 번 발현된 것이다.
물론 상황을 알지 못하는 버디로서는 그저 아이젠의 몸이 푸른색과 연분홍빛으로 바뀌어 빛나는 기이한 현상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알 거 없어.”
―쉭!
아이젠이 사라졌다.
‘결사신권, 목롱보(目弄步).’
아이젠은 버디의 코앞으로 이동해 있었고.
버디는 순간 시야가 꽉 차는 느낌이 들어 아무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다.
“뭐, 뭐야!”
버디가 놀랄 때.
아이젠은 죽은 눈으로 버디를 노려보았다.
“뭐긴 뭐야. 엿 된 거지, 너희 모두.”
무혈신공 4성의 권위에 올라.
4성의 사용자로서 쓸 수 있는 가장 큰 힘.
아이젠은 주먹에 자신의 역량을 담았다.
‘결사신권, 천차횡도(千車橫道: 천 개의 수레가 활로를 횡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