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화아아아아!
아이젠의 등 뒤에서, 천 개의 손이 꽃처럼 피어났다.
마치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 같은 모양새.
“호.”
버디도 아이젠의 그 모습에 자못 놀란 눈치였으나.
이제 표정을 지우고 수리검을 쥔 네 개의 팔을 들어 보였다.
“캬캬캬. 뭔가 대단한 걸 하려는 모양인데.”
“맞아. 기대해.”
“캬캬캬캬! 기대는 무슨! 넌 제대로 발악도 못 하고 죽을 것이다!”
―파박!
버디가 발을 박차고 뛰었지만.
아이젠은 놀란 기색도 없이 천 개의 손에 홍화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끄응!’
덕분에 근육통도 천 배가 된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지만.
―불끈!
아이젠의 팔뚝에는 힘이 들어갔다.
‘결사신권, 박살(撲殺)!’
―파바바바방!
옥수수를 기름에 튀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아이젠의 주먹이 버디의 몸을 일제 타격했다.
그러나.
“소용없다고!! 캬캬캬!!!”
버디는 그 자체가 단단한 바위라도 되는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쉬익!
버디의 손에서 휘둘린 수리검이 나아갔다.
아이젠은 천 개의 손으로 버디를 붙들어 막으려 했으나.
‘윽!’
막을 수 없다!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신강림의 반동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피해야 돼.’
어차피 버디의 수리검은 칼날에 조금이라도 베이면 치명상이 된다.
아이젠은 발을 굴러 수리검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쉬익!
수리검이 허망하게 바람을 가를 때.
“칫!”
버디는 아쉬워하며 아이젠의 머리카락을 몇 올 잘라냈을 뿐이다.
버디는 들고 있는 수리검에 침을 묻혀가며 즐거워했다.
“캬캬캬캬! 날랜 고기가 더 맛있는 법이지!”
“뭘 자꾸 맛있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우뚱!
아이젠의 다리가 힘을 잃고 무너졌다.
‘젠장.’
마침내 아이젠의 허벅지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린 것이다.
사실 이미 한계를 넘었다. 사신강림은 글자 그대로 사신처럼 아이젠의 근육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홍화의 기운은 더는 쓸 수 없어.’
―파아앗!
천수관음이 거두어졌다.
몇 수 써보지도 못하고 능력이 힘을 다했다.
“캬캬. 뭐야, 끝난 거냐?”
“글쎄, 어떨까?”
아이젠은 센 척해봤지만.
이미 그의 숨은 차오르기 시작해 어느덧 헐떡이고 있었다.
‘하아.’
아이젠은 완벽한 맨몸 상태가 되었다.
버디도 아이젠이 무방비가 되었음을 알고 매서운 눈빛을 띠었다.
“캬캬캬캬. 보아하니 이제 더는 힘을 쓸 수 없는 모양이군. 맞지?”
“……똑똑도 하네.”
“이제 내 수리검의 먹잇감이 될 일만 남았다! 캬캬캬캬!”
“그건 좀.”
아이젠은 배에 힘을 모았다. 찡그린 얼굴로 길게 숨을 내뱉어 코어 근육을 강화했다.
‘침착해, 아이젠. 흥분해서 일 그르치지 말고.’
아이젠은 유랑보만을 사용해 충분히 버디의 공격을 전부 피할 수 있었다.
이미 파파 그런트, 마마 그런트를 상대할 때 한번 해보지 않았던가.
아이젠이 쉽게 흥분하는 일만 없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캬캬캬캬! 잡힌 고기부터 먹어볼까!”
“뭐?”
―펄쩍!
버디가 뛰었다.
아이젠이 아닌, 알브레히트 5방주를 향해서!
‘앗!’
알브레히트 5방주는 현재 고치에 칭칭 감긴 상태.
그 안에서 살아는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절도 안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생각건대 문제 하나.
‘버디가 알브레히트를 고치째 집어삼킨다면 어떻게 되지?’
아이젠은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알브레히트 5방주를 구하겠다는 마음에서 발이 먼저 뻗어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버디의 노림수였다.
“걸려들었다!”
―샤아아악!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수리검.
아이젠은 몸을 일자로 뻗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수리검의 위협을 느끼고.
‘피해!’
허리를 슥 아래로 굽혔다.
그 반동으로 위로 올라가 버린 왼팔을.
―촤악!
수리검이 베고 지나갔다.
“……!!”
큰 통증은 없었다. 칼에 베였을 뿐이니까.
자상은 대략 15cm 정도. 깊이는 깊지 않다.
일반인이라면 이 정도 베인 것만으로도 비명을 내지르겠지만, 아이젠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긴장 상태를 지속했다.
“이 멍청한 놈.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하자마자 흥분하면 어떡하냐.”
아이젠이 작게 자책했다.
벌주는 것은 이것으로 끝.
아이젠은 다가올 환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디가 네 개의 손을 모았다.
“캬캬캬캬! 걸렸다!”
그러더니 입으로 주문을 외었다.
“암흑마법 : 주박술!”
아이젠의 왼팔이 일시적으로 무거워졌다.
어느새 수 마리의 하얀 뱀이 그의 왼팔 위에 올라타고 있었으므로.
―샤아아아!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아이젠을 집어삼킬 것 같던 하얀 뱀은.
아이젠의 얼굴 대신 왼팔을 휘감아 올라갔다.
“―!”
아이젠은 왼팔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하얀 뱀은 점점 명주실처럼 변해가고, 아이젠의 왼팔은 고치에 휘감기는 미라 상태가 되었다.
그의 팔은 뒤로 꺾일 것처럼 뒤틀리고 있었으나.
‘흡!’
아이젠이 힘을 꽉 주자, 뒤틀리기를 멈추고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아아…….
소리가 멎은 뒤.
아이젠의 왼팔은 어느새 깁스를 한 것처럼 고치로 뒤엉켜 있었다.
“……후.”
그제야 아이젠이 마른 숨을 내뱉었다.
‘수리검이 박히진 않았어. 하지만 단지 베였을 뿐인데도 이 정도인가.’
아이젠은 잠시 왼팔에 내공을 불어넣어 보았다.
그러나 왼팔에는 내공이 흐르지 않았다.
즉 아이젠의 왼팔은 완전히 봉인당한 상태.
“까다로운 기술을 쓰는군.”
“캬캬캬캬. 주박술에 당하면 모두가 속수무책.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겠지?”
“그래, 뭐.”
“단지 베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힘을 낸다!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캬캬캬캬캬!”
“아, 거. 웃음소리 되게 열 받네. 좀 조용히 웃어.”
아이젠은 이제 왼팔을 잃었다.
하지만 아이젠에게는 아직 오른팔이 있다. 그리고 두 다리도 있다.
아이젠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반동의 통증이 함께 찾아왔지만 견딜 만했다.
‘사신강림의 반동이 슬슬 끝나간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아이젠은 두 다리를 딛고, 힘을 주고, 온몸에 호신강기를 둘렀다.
‘결사신권―’
아이젠은 이번엔 좀 천천히 운공하기로 했다.
아직 사신강림의 반동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아이젠은 내공을 예민하고 섬세한 꽃처럼 다뤄야 했다.
‘사신강림(死神降臨).’
온몸의 혈관으로 부드럽게 내공을 흘려보냈다.
천천히 흘러드는 내공으로 인해 아이젠의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고.
―출렁.
기존에는 넘실거리기 바빴던 홍화의 기운도, 아이젠의 몸속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버디가 비웃었다.
“캬캬캬캬. 더 해볼 셈이냐?”
“프렘린한테 잡아먹히는 것보단 낫잖아.”
“캬캬캬! 소용없는 짓이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안 세봐서 모르겠는데.”
―쑤욱!
버디의 팔이 또 한 번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창수형 수리검들을.
“캬캬, 내 말을 무시한 걸 후회하게 해주마!”
―부웅!
흩뿌렸다.
―솨아아아!
아이젠을 향해 여덟 발의 수리검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던지는 줄만 알았더니.’
직선으로 던질 줄도 알았나.
아이젠은 유랑보를 이용해 가볍게 수리검을 피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버디가 노린 바였다.
“캬캬캬!”
―불쑥!
버디는 수리검 뒤에 숨어 어느새 아이젠이 피한 방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네 개 손에는 마찬가지로 수리검이 쥐여 있는 상태.
“죽어!”
버디가 일제히 수리검을 휘저어 내렸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버디가 노린 바라면.
아이젠은 그 뒤까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높이 팔을 든 덕에 버디의 간장(肝腸)은 무방비 상태.
아이젠은 가볍게 오른손 주먹을 휘둘렀다.
‘박살.’
―퍼벅!
주먹은 버디의 배를 가볍게 때렸다.
이 정도의 주먹은 원래 버디에게 아무 타격도 주지 않지만.
“……욱?!”
그것이 장기가 있는 위치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아무리 단단한 복근을 가진 사람이라도, 간땡이를 제대로 맞고서 정신을 차릴 수는 없는 법.
마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커헙!”
버디의 몸이 앞쪽으로 크게 기울자.
아이젠은 다시 한번 오른 주먹을 잡아당겼다.
“몸이 단단하시다고?”
“이 자식……!”
“장기도 좀 단련하지 그랬어.”
―파바방!
‘권왕백무 : 관(貫)!’
관(貫)은 버디의 뱃살을 타점 삼아 정확히 날아들었다.
그리고 버디의 안쪽 장기, 간(肝)을 부술 듯이 타격했다.
“커윽!!”
버디의 몸이 기우뚱― 넘어가는가 싶더니.
―쿠당탕!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크악! 캬아아악!!”
“아프냐? 새끼야, 내가 더 아파.”
겨우 주먹 두 번 휘둘렀다고 아이젠은 찌릿찌릿한 근육 통증을 느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고.
버디를 이 정도로 마무리해선 곤란하다.
아이젠이 다시 한번 버디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는 그때.
“―어?”
―파사삭.
풀숲을 헤치고 등장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아이젠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아이젠보다 좀 더 많은 듯 보였지만, 연령대 자체는 갓 스무 살을 넘긴 핏덩이처럼 보였다. 유독 새하얀 피부는 마치 죽은 사람을 연상케 했다.
아이젠과 버디의 혈투를 지켜보던 핏덩이의 이름은 랄프 반 그린우드. 1방계의 둘째 아들.
‘뭐야, 이놈은!’
“……어어?!”
그는 아이젠과 버디의 혈투를 직관하다가, 문득 사색이 되어버렸다.
“캬캬캬!”
버디가 삽시간에 목표물을 전환하고 그에게 칼을 날릴 때.
아이젠이 또 반사적으로 몸을 먼저 던졌다.
“멍청아, 피해!”
“으학!”
랄프는 피하지 못했다. 그저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런 그에게 버디의 수리검이 직선으로 날아들자.
아이젠은 결국 자신의 오른발을 쭉 뻗어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콱!
수리검이 박히는가, 싶던 그때.
‘천만에!’
아이젠은 다리를 휘저어 수리검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덕분에 아이젠의 종아리에 큰 상처가 남았지만, 다행히 수리검이 박히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촤악!
아이젠의 선혈이 흙바닥을 수놓았다.
랄프가 놀라서 소리쳤다.
“야, 야! 너 다리에 피!”
“알아.”
“미, 미안해! 나 때문에!”
“미안할 거 없어. 나도 후회 중이니까.”
그렇게 아이젠의 오른쪽 다리도.
―샤아아아아!
하얀 뱀이 등장함과 동시에, 삽시간에 고치에 싸였다.
“후우…….”
아이젠은 이번에도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입해 발목이 뒤틀릴 뻔한 것을 막아냈다.
아이젠은 이제 왼팔과 오른쪽 다리를 깁스한 몰골이 되었다.
버디는 그런 아이젠을 보며 등이 꺾일 듯이 웃어젖혔다.
“캬캬캬캬! 이런 멍청한 놈!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네가 죽게 생겼구나! 캬캬캬캬!”
“흐음. 그래? 구한 건 맞지만 내가 죽겠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아이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만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식은땀도 흐르지 않았다.
이미 왼팔도 잃고, 오른쪽 다리마저 잃었지만.
“위기는 날 더 강하게 만들 뿐이거든.”
“뭐, 뭐?”
랄프가 버디 대신 대꾸하자.
아이젠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뭐지?”
“라, 랄프 반 그린우드. 근데 너 왜 반말…….”
“랄프.”
“어? 아니, 예?”
아이젠이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로 빠져 있어, 뒤지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