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흥, 그런 표현도 쓰십니까?”
한스는 바네사를 비웃었지만, 내심 속으로 안심했다.
―찰캉.
―찰캉.
두 사람이 모두 납검하고, 한스가 먼저 돌아가려 할 때.
그는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
“왜, 뭐 할 말 있니? 더 하자구?”
바네사가 칼집에 손을 대자.
한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바네사 누님.”
“……말하렴.”
“아이젠은 누님보다 강합니까? 약합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에.
바네사는 한 호흡에 답했다.
“그야 당연히 아이젠이 나보다 강하지.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렇단 말입니까.”
―뿌득.
한스가 이를 갈았다. 감히 아이젠 따위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얻어맞고 눈물이나 질질 짜던 놈이.’
빼빼 마른 숟가락 같았던 녀석이, 이제는 바네사 누님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한스의 생각에, 바네사 누님은 자신과 비슷한 실력.
한스는 소가주전 본선을 준비하며 지난 석 달간 죽어라 검술에만 매진해왔다.
그런데도 아이젠은 여전히 저만치 앞서가 있단 말인가!
‘절대 납득할 수 없어. 아이젠, 네놈 따위는 내가 반드시 뛰어넘겠다!’
* * *
“캬샤샤샤샷!”
―츠팟!
아이젠은 자신을 향해 펄쩍 뛰어오는 프렘린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숫자는 여덟.
그렇다면 여덟 개의 박살을 준비하면 된다.
‘결사신권 4성, 홍화의 기운.’
주먹에 홍화의 강기를 불어넣자마자 사신강림의 반동이 찾아올 기세였다.
마치 쥐가 나기 직전의 그 싸늘한 느낌.
그러나 아이젠은 무시하고, 마저 홍화를 주먹에 불어넣었다.
―꽈아아악!
아이젠의 주먹이 꽉 쥐였다. 동시에 힘이 거세게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윽, 아프네!’
근육 경련이 와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여덟 발의 박살을 온전히 품었다.
‘결사신권, 박살(撲殺) 연타!’
―퍼버버버버버버벅!
“캬악!”
“크엑!”
“캬삿!!”
아이젠의 주먹에 맞은 프렘린들이 나가떨어지고.
개중 몇몇은 맷집도 좋은지 다시 일어났지만, 다른 몇은 정신을 잃었다.
‘죽은 놈은 없나.’
겨우 박살 한두 발 정도로는 죽일 수 없다. 그것이 상급 마물.
영설산의 그런트 때와는 다르다.
‘좋아.’
하지만 아이젠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좀 더 높은 경지까지 올라설 수 있다면!
“캬캬캬캬.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군. 그나저나 넌 왜 주먹을 쓰고 있는 거지?”
마혼, 버디의 물음에.
아이젠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좀 덤벙대는 사람이라서. 검 같은 걸 들고 다니면 잃어버리거든.”
“캬캬캬캬! 멍청한 대답이군! 이거나 받아라!”
아니, 농담한 건데. 마물은 농담 따먹기도 할 줄 모르나?
아이젠이 고개를 젓는 사이.
버디의 팔뚝이 다시 한번 움푹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덟 발의 창수형 수리검이 튀어나왔다.
‘저건 무한대인가?’
저 수리검은 좀 전부터 팔에서 나왔다. 그런데 별다른 제약도 없이 수리검을 계속 뽑아내는 걸 보면, 능력에 제한 사항이 없는 모양.
그런 데다가 단 한 발이라도 몸에 박히면 끝장이라니.
‘페널티가 심하잖아, 이거.’
하지만.
이런 일로 좌절할 아이젠이 아니었다.
그는 좌절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어디 해보자고.”
“캬캬캬캬! 죽어랏!”
―휘이익!
―슈슈슈슉!
버디가 팔을 크게 휘두르자.
창수형 수리검이 또다시 부채꼴 모양으로 날아왔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수리검들의 칼날 끝을 보며, 아이젠은 미소 지었다.
‘결사신권, 사신강림!’
―콰아아압!
사신강림의 반동이 채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또 사신강림을 사용한다. 블렌하임과 겨뤘을 때처럼!
―으드드드득!
아이젠의 근육 한 올 한 올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근섬유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이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
마침내 홍화가 견디지 못하고 아이젠의 몸 밖으로 튀어나오자.
아이젠은 눈을 번쩍 빛내더니, 양주먹을 힘껏 끌어당겼다.
‘결사신권, 권왕백무!’
―퍼버버버벙!
허공에서 주먹이 터졌다.
아이젠은 지금 멀리 있는 것을 타격하는 환교신권이 아니라 권왕백무를 사용했다.
만약 주먹 끝이라도 수리검에 베이는 날에는, 아이젠은 그야말로 누에고치가 되고 말 터.
하지만 아이젠은 자신이 있었다.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할 자신이!
―파바바박!
―탱그랑! 탱그랑!
아이젠의 권왕백무는 각각의 수리검 옆면을 정확히 타격했다.
덕분에 아이젠은 실낱만큼도 베이지 않고 수리검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수리검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이젠의 강함을 증명했다.
버디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인간…… 제법이다.”
“그런 말 많이 들어왔어. 특히 최근에.”
“캬캬캬캬. 근접전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버디의 팔뚝이 메꿔졌다. 수리검들은 더 이상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다만 버디의 네 개 손에, 각각 하나씩 수리검이 쥐여 있었다.
즉 사검류.
“과연 날 상대로도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지 볼까! 캬캬캬캬!!”
―다다다다!
버디가 수리검들을 추켜세우고 아이젠을 향해 달려왔다.
조건은 여전히 같다. 수리검에 조금이라도 찔리면 아이젠은 흰 달걀처럼 되어버린다.
즉, 아이젠은 버디와 근접해서 싸우는 한편 단 한 번도 베여선 안 된다.
‘까다로운 조건이구만.’
아이젠에게 까다로움과 즐거움은 같은 말이었다.
마침내 버디가 아이젠과 보폭 하나 차이로 다가와 섰을 때.
‘박살!’
아이젠은 가장 먼저 박살로 버디의 턱을 가격했다.
이 녀석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
―퍼벅!
주먹이 쏜살처럼 버디의 턱을 스치고.
버디는 아주 약간 기울어지는 듯했지만, 전진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죽어라!!”
―쉬쉬쉬쉬쉭!!
버디의 네 팔이 휘둘렸다. 각각의 손에 들린 수리검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아이젠을 공격했다.
‘유랑보!’
아이젠은 유랑보를 이용해 전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넘겼는데.
―꽈드드드득!
이놈의 반동이 또 말썽이었다.
‘윽.’
아이젠은 종아리 근육이 호박돌처럼 단단하게 뭉치는 것을 느꼈다.
근육이 뭉쳤을 땐 그 부위에 힘을 빼야 한다.
해서 아이젠은 유랑보를 사용하면서도 종아리와 허벅지에 힘을 주지 않는, 다소 독특한 스탠스를 취해야 했다.
―쉬쉬쉬쉬쉭!
버디의 수리검은 계속해서 아이젠을 찌를 것처럼 덤볐다.
아이젠이 조금이라도 발을 멈추면 그의 몸에 생채기가 날 터.
‘하지만 한계다!’
더 이상 발에 힘을 줄 수는 없다.
아이젠은 유랑보를 마치고 뒤로 돌아.
―휘릭.
버디를 향해 주먹을 쏘았다.
‘권왕백무 : 관(貫)!’
―파앙!
한 발의 폭음과 함께 버디의 가슴팍이 움푹 패였다.
“우욱?!”
버디는 속에 있는 걸 게워내는 듯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키웠으나.
―쉬이이이이!
버디의 가슴은 금방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마치 고무공을 바닥에 튕기면 형체를 잃었다가 금세 돌아오듯 말이다.
버디가 웃었다.
“캬캬캬캬캬! 잊었나?! 난 마혼! 겨우 이 정도의 주먹에는 죽지 않아!”
“그래, 실망할 뻔했다.”
아이젠은 겨우 관 한 발로 버디를 이길 수 있으리란 안일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도 체크는 끝났다.’
버디는 단단하다.
그러나 그뿐.
단단하면 부순다, 그것이 아이젠의 쇄금이다.
‘권왕백무 : 관! 열 발!’
주먹을 깊이 끌어당긴 아이젠은.
다음 순간 소리를 찢고 돌파하는 주먹을 버디에게 먹여줬다.
그것도 열 번이나 되는 관을.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팡!!!
소리가 뒤늦게 울리는 주먹을 남기고.
아이젠은 바닥으로 크게 밀려났다. 주먹을 내지른 반동으로 밀려난 것이다.
치이이익― 바닥을 끌며 밀려난 아이젠은 버디를 살폈고.
버디는.
“우, 오오오옥……!”
형체를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어디가 팔이고 어디가 다리인지, 또 어디가 몸통이고 어디가 머리인지조차 구분이 안 되고 있었다.
아무리 버디라도 아이젠의 관을 열 발이나 동시에 맞고는 견딜 수 없었던 모양.
그러나 버디는 그 와중에도 죽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우우욱…… 제법이구나, 인간……. 하지만!!”
―덥석!
버디는 갑자기 근처에 있던 프렘린을 한 마리 붙들었다. 조금 전 아이젠이 기절시켜 놨던 프렘린 중 하나다.
“캬악?”
프렘린이 불길함을 느끼고 음성을 내뱉을 때.
―콰득!
버디가 프렘린을 집어삼켰다.
‘미친, 뭐야 저게?!’
아이젠은 처음 보는 인외마경에 놀랐다. 원래 마물끼리 잡아먹기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잡아먹히고 있는 프렘린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으므로.
“캬아아아아!!! 아파, 아파!!! 버디 님, 아파요!!! 으아악!!!”
―우두둑. 우두두둑.
버디는 대답하지 않고 프렘린을 씹어 먹었다. 그의 뼈와 버디의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꺼윽.”
마침내 버디가 프렘린을 피부 한 점 남기지 않고 삼켰을 때.
그의 몸은 어느새 본래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
아이젠은 잠깐 아연실색했으나.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
“동료를 먹으면, 강해지는 구조냐?”
“동료? 캬캬캬캬……. 넌 내가 이 프렘린들과 동료로 보이나? 이 녀석들은 짐승, 난 마혼. 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구.”
버디는 확답을 주겠다는 듯 질문했다.
“넌 한낱 돼지 새끼와 동료가 될 수 있나? 캬캬캬.”
“……될 수 없지.”
아이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동료라면 애초에 돼지 새끼로 구분하질 않겠지!”
아이젠이 발을 구르고 뛰어올랐다.
버디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젠의 주먹은, 버디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권왕백무 : 관(貫)!’
―콰아앙!!
아이젠의 주먹이 버디의 뺨을 정확히 때렸다.
그러나.
“……윽!”
충격을 입은 것은 오히려 아이젠의 주먹 쪽이었다.
아이젠은 바닥을 딛고 내려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할짝.
버디는 뺨에 묻은 피를 핥았다. 그 피는 아이젠의 주먹에서 나온 피였다.
“몇 대 맞아줬더니 정말로 내게 공격이 든다고 생각했나? 네깟놈의 주먹은 아무것도 아니야. 캬캬캬캬.”
“봐줬어?”
“그래. 내가 어떻게 강해지는지 보여주기 위해……. 어때, 이제 패배감이 좀 느껴지나? 캬캬캬! 울며 빌어도 살려주지 않을 테니 소용없다고! 캬캬캬캬!”
이 자식이.
아이젠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감히 봐줘? 나를?’
차라리 고치가 되고 말지.
상대에게 얕보이는 굴욕을 당할 줄이야.
아이젠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런 한편으론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심호흡을 크게 했다.
“후우우…….”
대강 알겠다.
아이젠은 버디의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
지금 상태로는.
“그렇다면, 한 단계 더 강해지면 되지.”
아이젠은 홍화, 사신강림에 이어, 또 하나의 기술을 더 사용하기로 했다.
이제 반동 같은 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결사신권, 천수관음(千手觀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