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마혼 버디 】
“크으음!”
알브레히트는 글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팔에 꽂힌 수리검에서부터 새하얀 뱀들이 집어삼킬 듯 알브레히트를 깨물었고.
―쉬이이이이!
결국 알브레히트는 삽시간에 온몸이 하얀색으로 뒤덮이더니.
―사아아아아!
마침내 뱀의 형상이 사라지고 나서는, 알브레히트는 커다란 고치 안에 갇혀 있는 형태가 되었다.
“……으읍!”
고치 안에서 작게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알브레히트는 아직 죽지는 않은 듯했다. 다만 숨통이 조여드는 모양.
아이젠은 침착하게 손날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결사신권, 박살편!’
그리고 박살편의 힘으로 고치를 자르고자 했다.
아이젠은 손날로 알브레히트의 고치에 있는 힘껏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치익!
고치는 아이젠의 손날에도 베이지 않았다. 마치 바위를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리만이 남았다.
‘음?’
강철조차 잘라버리는 것이 아이젠의 손날이다. 박살편이라는 이름 그대로 박살의 채찍과도 같은 위력을 담고 있을진대.
알브레히트를 감싼 고치에는 작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캬캬캬. 소용없어. 날 죽이지 않는 한 그 고치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
다시 예의 그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젠은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어두운 수풀 사이를 헤치고 등장한 것은 프렘린.
정확히는, 프렘린보다 거대하고 피부색이 좀 더 진홍색에 가까운 프렘린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팔이 두 쌍인 것이랄까. 오른쪽 어깨 위에는 커다랗게 베인 흉터가 있었는데 꽤 오래전에 생긴 것인 듯했다.
‘흐음.’
프렘린은 원래 말을 한다. 상급 마물이니까.
하지만 아이젠이 판단하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진홍색의 프렘린은 단순히 상급 마물 정도가 아닌 듯했다.
온몸으로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니.
“왜 소용이 없다는 거지?“
아이젠이 묻자.
진홍색 프렘린이 고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개의 팔 중 하나로 말이다.
“저 고치는 암흑마법으로 만들어진 것. 나를 죽이기 전에는 그 어떤 수를 써도 절대 잘라낼 수 없다.”
“그래? 그럼 간단하네. 널 죽이면 해결된단 소리잖아.”
“캬캬캬캬. 네가 나를? 캬캬캬캬! 네까짓 게 나를?!”
진홍색 프렘린이 우렁차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이내 웃음을 멈추고, 잠시 아이젠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던진 건 두 개인데 한 놈만 맞았나. 그 빠른 수리검을 피하다니, 제법이군.”
“…….”
아이젠은 머리털 나고 마물이 암흑마법을 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어떻게 짐승, 맹수에 불과한 마물이 암흑마법을 다룰 수가 있을까?
“너, 정체가 뭐지?”
아이젠이 순수한 궁금증의 발로에서 묻자.
진홍색 프렘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버디! 이 피쉬트랩 던전의 주인이다. 감히 날 이곳에 수십 년이나 가둬둔 너희 그린우드에게 오늘에야말로 복수하겠어! 캬캬캬캬!”
수십 년이나 가둬놨다, 그 말 하나로 아이젠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도 결국은 여기 잡혀온 마물이란 거다.
‘던전의 주인은 무슨. 그냥 세입자잖아.’
방을 뺄 수 없는 세입자. 영원히 이곳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 마물.
다시 말해.
아이젠에게 버디는 그냥 레드스톤 하나에 불과했다.
“어, 그래. 그럼 한판 할까?”
―꽈아아악.
알브레히트의 숨통이 조여지는 소리를 아이젠은 들었다.
고치가 점점 더 알브레히트의 온몸을 옥죄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알브레히트 5방주님은 강해. 하지만 상대가 암흑마법이라면 빠져나올 방법은 없어.’
암흑마법에 걸린 주술을 해제하려면, 규칙에 따라야만 한다.
버디가 말하는 암흑마법의 주술 해제 방법은 버디를 쓰러뜨리는 것.
즉 무슨 수단을 쓰든, 버디를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고치는 잘라낼 수 없을 것이고.
그럼 알브레히트가 제아무리 강자라도 손 하나 못 쓰고 죽게 될 것이다.
“구해드릴게요, 5방주님.”
딱히 공명심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일차로, 아이젠은 알브레히트와의 오해를 풀고 싶었다. 두 아들을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그를 이 세상 하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차로는.
“얼른 덤비지?”
아이젠은 버디와의 싸움을 기대했다.
“안 덤비면 내가 가고!”
―츠팟!
아이젠이 발을 구를 때.
버디는 흉험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쉬쉬쉬쉬쉭!
숲속에서 튀어나온 수십 발의 화살이 아이젠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이젠은 이미 허공에 뜬 상태.
몸을 돌려 화살을 막아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사신권, 나교아(拏鮫牙: 낚아채는 상어의 어금니)!’
아이젠은 양손을 교차했다.
그리고 부웅! 휘둘러.
―슈르르륵!
날아드는 모든 화살을 낚아챘다.
화살들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아이젠의 손아귀에 붙잡혀 딸려 들어갔다.
“!”
버디는 놀란 기색이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팔 안쪽이 움푹 하고 패는가 싶더니.
‘뭐야?’
버디의 팔에서 조금 전 보았던 수리검 여덟 개가 칼날을 드러내며 올라왔다.
“캬캬캬! 독 안에 든 쥐로다!”
버디가 거칠게 팔을 휘두르자.
―촤아악!
여덟 개의 창수형 수리검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며 아이젠을 향해 날아들었다.
‘쳇.’
다행히 아이젠은 이제 땅에 발을 디딜 만큼은 내려왔다.
그는 땅에 발을 딛는 즉시.
―치이익!
자세를 잡아, 몸을 비틀었다.
‘환교신권!’
―파팡!
아이젠의 주먹에서 튕겨 나간 내공이.
―퍼억! 퍼억!
위협하며 날아오는 수리검들을 모조리 타격해 떨어뜨렸다.
―탱그랑! 탱그랑!
버디는 이제 완전히 웃는 기색을 지웠다.
“캬캬…… 네놈, 제법 하는군. 내 수리검을 피한 건 우연이 아니었나 보지?”
“그럼.”
아이젠은 눈치채고 있었다.
박살이나 권왕백무로도 수리검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태여 환교신권을 이용해 수리검을 하나하나 맞춰 떨어뜨린 이유는.
‘단 한 개만 박혀도 끝난다.’
조금 전 알브레히트가 당한 꼴을 봤기 때문이었다.
알브레히트는 팔에 수리검이 꽂혔다. 그에게는 별로 치명적인 피해도 아닐 터.
그런데도 꽂힌 수리검에서부터 뱀이 튀어나와 그의 온몸을 감쌌다.
즉, 단 한 개의 수리검이라도 몸에 박히면 아이젠도 저 모양이 될 것이다.
―꽈아아악!
지금 알브레히트를 한 번 더 조이는 고치를 보며 하는 생각이었다.
‘누에가 될 생각은 없지.’
“캬캬캬. 너는 제법 하는군. 오랜만에 만난 인간, 제대로 몸을 풀어주마.”
―뿌득! 뿌드득!
버디의 몸에서 근육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젠은 버디의 온몸 곳곳에 자리한 근육이 제법 섬세함을 깨달았고.
‘호, 몸 좋은데?’
그도 마찬가지로 몸을 풀어주기로 했다.
―우득! 우드득!
―뿌득! 뿌드득!
아이젠이 몸을 푸는 소리와 버디가 근육을 푸는 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지니, 그 소리가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파스스.
그사이 숲속에서 몇 마리의 프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아이젠에게 화살을 날린 범인들인 듯했다.
‘하나, 둘, 셋…… 총 여덟 마리인가.’
프렘린 여덟 마리.
그리고 버디 한 놈.
보아하니 버디라는 녀석의 프렘린의 우두머리로 보인다.
게다가 제법 통솔력도 뛰어난 걸 보면…….
“네놈, 마혼이냐?”
“―!”
버디가 조금 놀랐다.
“캬캬캬. 너, 마혼이 뭔지 알고 있는 건가?”
“대충은.”
“캬캬캬. 신기한 놈이군. 보통은 마물 이상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데…….”
아이젠은 이미 마혼을 한차례 본 적이 있기에 아는 것이었다.
화이트 오크, 영설산의 영물.
그는 말하자면 ‘착한 마혼’이었다. ‘착한 망나니’처럼 앞뒤가 안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으나.
‘지안니 초대 가주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오고 있었지.’
하지만 이 녀석, 버디는 아니다.
대충 짐작해 보건대 아마 이곳에 갇히게 된 후, 분노와 원념이 쌓이고 쌓여 마혼으로 각성한 것이 틀림없을 터.
즉 위험한 놈이다.
‘상급 마물이 마혼으로 각성했다면, 상급 마혼이라고 봐야 하나?’
그런 등급 체계까지는 잘 알지 못하는 아이젠이기에 구체적으로 버디가 어느 정도 강한 건지는 몰랐으나.
“재밌겠어.”
아무튼 결자해지의 밥이 될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이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덤벼, 자식아. 제대로 붙어보자.”
* * *
한스와 바네사.
둘 다 어느덧 기진맥진해진 상태였다.
“허억, 허억.”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리고.
바네사의 하나 남은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양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한스에 비해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근력으로만 따지자면 한스가 더 강하기에.
바네사는 이제 좀 힘에 부쳤다.
‘여기까지인가?’
끄득― 바네사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겨우 여기까지였던 걸까? 그린우드 가문의 가주가 되겠다던 자신의 각오는.
‘아니.’
바네사는 더욱 세게 이를 악물었다. 안쪽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것도 같았다.
‘난 여기서 지지 않아.’
설령 한스에게 지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해보고, 또 덤벼야.
바네사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후일 뒤늦게 ‘왜 그때 좀 더 온 힘을 다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참철검을 쥔 바네사의 손에 힘이 거세게 들어갔다.
“한스, 오렴.”
“……!”
한스는 바네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사태평이었다.
베인 상처도 별로 없고, 팔다리도 후들거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하아.”
한스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지쳤는지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던 것.
“그만, 누님. 그만하시죠.”
“……뭐라고?”
갑작스러운 중단 선언.
바네사가 반문하자, 한스가 한결 너그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그만하자는 겁니다. 지금 누님을 여기서 꺾는 것도 그림이 예쁘지 않겠죠.”
“……그래서 지금 나랑 무승부를 하자는 거니?”
“무승부. 네, 맞습니다.”
사실 한스는 괜찮은 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이상 싸워서 바네사를 이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없었다.
‘대체 뭐야? 바네사 누님이 원래 이렇게 독종이었나?’
여인의 몸으로 검은뿔 기사학교에 상주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보다. 그녀가 끈질긴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면 한스는 끈기가 없었다. 꼭 이겨야 할 싸움이 아니라면 이 이상의 전선은 피하고 싶었다.
한스의 그런 의중을 알 리 없던 바네사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뭐지? 봐주겠다는 건가?’
바네사의 판단에, 싸움이 길어지면 반드시 한스가 이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승부로 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하지만,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바네사도 그린우드다. 무승부 따위로 만족할 만큼 온후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바네사는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이 싸움은 피하고, 1차 본선부터 끝내자.
그제야 바네사도 검을 내려놓았다.
“그래. 우리끼리 치고받는다고 해서 콩고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