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저승에 있는 내 아들들에게 사과라도 전해줘라!!”
―부웅!!
알브레히트가 외치며 참철검을 내려칠 때.
‘죽을 생각 없거든!’
아이젠도 몸을 깊이 굽혔다. 허벅지 끝이 땅바닥에 닿을 만큼.
그리고 그 추진력을 이용해.
‘목롱보!’
―파앙!
뒤로 뛰었다.
―태앵!
알브레히트의 참철검이 땅바닥을 내려치자.
그제야 아이젠은 안심한 기색이었다.
식은땀이 배어 나왔지만 닦을 수는 없었다.
아이젠은 오랜만에 온몸에서 불타오르는 긴장감을 맛보았다.
‘이런, 미친.’
아이젠은 사울 장로와도 여러 번 대련해 본 적이 있다. 사울 장로 역시 현재의 아이젠과는 비견도 안 될 만큼 강자다.
그런데 알브레히트는 사울과 비견도 안 될 만큼 더한 강자다.
단 한 번의 수 싸움 만에 아이젠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오러를 안 쓴 거라니.’
아이젠은 까딱하다간 여기서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자 생사경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죄송하지만 전 천년만년 장수할 겁니다.”
“어리석은 바람을 품는구나. 열여섯 살이 너의 마지막 나이가 될 것이다.”
―철컹!
알브레히트가 참철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참철검은 좀 전과 마찬가지로 매서운 기운을 담고 있었다.
아이젠은 쫄지 않고 온몸에 홍화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무혈신공 4성, 홍화(虹花)의 경지.’
―파핫!
아이젠의 몸에서 연분홍빛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아이젠은 잠깐 고심했다. 조금 전 프렘린들을 상대할 때 이미 사신강림을 한 번 써버린지라, 여기서 또 썼다간 몸에 무리가 많이 갈 터였다.
‘하긴, 블렌하임과 싸울 때는 여러 번 썼지.’
알브레히트는 블렌하임과는 비교하는 게 죄송할 정도의 강자.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대우해 주는 게 인지상정.
‘결사신권―’
아이젠이 두 발을 지지대 삼고 자세를 잡았다.
양팔을 앞으로 뻗어 크게 심호흡한다.
“후우우우…….”
“…….”
웬일인지 알브레히트는 아이젠의 준비 과정을 가만 지켜봐 주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젠도 조급할 필요 없이 천천히 사신강림의 묘리를 온몸 곳곳에 끌어 담았다.
‘사신강림(死神降臨)!’
―푸화악!
마침내 연분홍빛 오러가 터질 듯한 기세로 아이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그제야 알브레히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냐?”
“네?”
“그것으로 내 두 아들을 죽였는가…….”
“아니. 그런 적 없다니까요.”
“그래. 제법 강한 기세구나. 플로리안과 틸만으로서는 상대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라.”
“들리세요?”
“어쨌든 내 두 아들을 죽인 죄는 무겁다.”
알브레히트의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이젠은 더 대꾸하는 게 의미가 있긴 한 걸까 싶었다.
‘벽 보고 대화하는 것 같네.’
절레절레― 아이젠이 고개를 젓자.
―팟!
알브레히트가 아이젠에게 뛰었다.
‘어차피 아무리 강하게 때려봤자 5방주님한테는 생채기 하나 안 나.’
아이젠은 그사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리 대단한 공격이라도 알브레히트를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를 무력화시키는 데 치중해야 할 것.
‘오러를 못 쓴댔지.’
알브레히트는 지금 오러를 쓸 수 없다. 정확히는 ‘쓰지 않는다’는 쪽이 더 맞겠지만.
오러를 써서 마테오 백작님에게 들키면 알브레히트는 가문의 규율을 흐트러뜨린 죄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벌이란 즉 파면.’
알브레히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그린우드다.
그린우드의 이름을 잃는 것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더 있다면.
‘알브레히트에게 나는 오러를 쓸 필요도 없는 애송이.’
알브레히트는 애초에 오러를 써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못 느끼고 있을 터.
아이젠은 자신이 얕보이는 지금, 그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선 이것부터 막고.’
―부웅!
알브레히트의 참철검이 떨어져 내릴 때.
아이젠은 이번에도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잘리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권왕백무 : 관(貫)!’
이번에는 관(貫)을 사용해 맞받아쳤으므로.
―콰과과광!
아이젠의 주먹과 알브레히트의 참철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 순간, 아이젠의 주먹에서 오러가 일부 사라졌다.
‘앗?’
아이젠이 위화감을 느끼기도 잠시.
―퍼엉!
거대한 굉음을 내며 서로가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가고.
―치이익!
알브레히트는 조금도 넘어지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우당탕!
아이젠은 중심을 잃고 나뒹굴었다.
“아야.”
방금 뭐였지?
아이젠은 주먹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이곳에 실려 있던 홍화의 기운이 한순간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알브레히트는 초연한 얼굴로 아이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한 거냐, 못 배운 거냐? 네놈은 내 참철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가.”
‘참철검?’
그러고 보니.
초대 가주 지안니의 참철검도, 현 가주 테오발트의 참철검도.
제국에서는 아티팩트 취급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알브레히트의 검도 아티팩트가 아니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마검 빅샤크’. 내 참철검의 이름이다.”
“아티팩트……인가요?”
“그렇다. 이 녀석은 먹보라서 가까이 있는 상대의 오러를 집어삼키고 말지. 내 오러와 적 오러를 구별하지 않고 말이다.”
오러를 집어삼켜?
그 말인즉.
“제 오러를 뺏어먹었다는 겁니까? 그 검이?”
“그렇다.”
“…….”
그렇다면 아이젠에게는 불리하다.
근처에 있기만 해도 오러를 뺏어먹는다면, 전투의 9할이 근접전이어야만 하는 아이젠으로서는 불리할 수밖에.
물론 상성 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전투도 재밌겠다고 생각하는 아이젠이었다.
“제 오러를 잘 안배해야겠군요.”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그 사실을 제게 알려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알브레히트의 입매가 비틀렸다.
“알려준다고 해도 네놈에겐 승산이 없을 테니까. 네놈이 아무리 오러를 쏟아붓는다 해도 빅샤크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테니까.”
자세히 보니 알브레히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흘리는 피눈물이었다.
“두 아들 녀석이 느꼈을 무력감을 너도 한번 맛봐라. 아이젠 폰 그린우드으으으!!!”
―콰아아아아!
알브레히트는 마치 전차처럼 아이젠을 향해 달려왔다.
‘저게 사람이 뛰어서 나는 소리가 맞냐고!’
한 발 한 발 땅을 디딜 때마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난다.
아이젠은 양손에 홍화의 기운을 불어넣고, 강경하게 자세를 잡았다.
‘결사신권, 천수관음(千手觀音)!’
―촤앗!
그리고 천수관음을 펼쳤다.
이로써 아이젠은 홍화, 사신강림, 천수관음까지 사용한 것.
그런데도 알브레히트와 싸워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이 한 몸 불사를 수만 있다면!
아이젠이 다가오는 알브레히트의 턱주가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아, 물론 진짜 불사르면 곤란하고. 난 생사경에 도달해야 하니까.’
―콰아아아앙!!
두 신형이 맞닿았다.
―휘오오오.
잠깐의 모래바람과 함께 사태가 마무리되고.
서 있는 것은.
“이제 알겠느냐? 아이젠 폰 그린우드.”
당연히 알브레히트였다.
아이젠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팔에 길게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멋쩍은 미소를 짓는 아이젠이었다.
“하아. 강하시네.”
“네놈은 날 이길 수 없어. 내가 오러를 쓰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 두 아들은 이길 수 있었겠지만.”
―부들부들.
그때 아이젠은 보았다. 알브레히트의 팔이 떨리고 있는 것을.
‘뭐지?’
아이젠의 주먹은 딱히 효과가 없었을 텐데.
알브레히트는 왜 팔을 떨고 있는 것일까?
알브레히트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반대쪽 팔로 떨리는 팔을 붙들어 멈췄다.
“내 두 아들의 복수…… 그리고 룬잭의 복수를. 지금 끝내겠노라!”
알브레히트가 빅샤크를 높이 들어 올렸다.
―부웅!
검이 휘둘리는 그때.
‘이대로 끝날 수야 없―’
아이젠은 몸을 굴려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응?’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크윽!”
―쿠당탕!
갑자기 알브레히트가 무게중심을 잃고 제자리에서 쓰러졌으므로.
그는 조금 전까지도 계속 떨리고 있던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별안간 벌어진 상황에 아이젠은 의아했으나.
우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이러시는 거지?’
“큭. 으극……!”
그건 얼핏 발작 증세처럼도 보였다.
그러기를 잠시, 알브레히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참철검을 꽉 쥐었다.
“……후. 이런. 잠시 추태를 보였군.”
“…….”
그때 문득 아이젠은.
이곳 피쉬트랩에 입성하기 전, 사흘간 적도심경과 겨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아이젠은 자신처럼 쉽게 흥분하는 적과 싸우는 방법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아이젠이 당시 깨달은 수칙은 하나.
‘흥분하는 적은 속내를 찔리는 것에 약하다.’
아이젠이 말했다.
“5방주님, 어디 아프신 건가요? 팔이 떨리시는데.”
“닥쳐라. 네놈 목을 자르는 데엔 어떠한 문제도 없으니.”
“그럼 잘라보시든가. 자르라고 대줬는데도 못 자르셨잖아요, 방금.”
“……! 네놈이.”
아이젠은 일부러 알브레히트를 도발했다.
알브레히트가 발끈하고 반응하는 것을 보면, 실제로 그는 어디가 아프기는 한 모양이다.
‘몸에 무슨 문제가 있나?’
하긴 마흔세 살쯤 됐으면 안 아픈 것도 이상한 일이다. 어디 한두 군데쯤 몸이 성치 않아야 일반적이다.
알브레히트는 고개를 털고 참철검을 쥐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내 두 아들의 영혼을 위로할 기회를 주마.”
“싫어요.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왜 위로를 해.”
“끝까지 시치미를 떼겠다면!”
“시치미가 아니라 진짜라니까.”
“처참히 죽여주마, 아이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융!
아이젠과 알브레히트 모두, 각자를 향해 무언가가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음을 들었다.
―슈팟!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젠은 몸을 재빠르게 뒤로 젖혀 피했고.
알브레히트도 피하려는 그때.
“음?!”
알브레히트의 다리가 조금 전 그의 팔이 그랬던 것처럼 부들 떨렸다. 마치 쥐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덕분에.
―서걱!
알브레히트의 큰 팔뚝에 무언가가 꽂혔다.
―콱!
아이젠을 스쳐 지나 나무에 꽂힌 것은 단검.
정확히는 ‘창수형 수리검’이라고 불리는 무기였다. 크기가 작고 유사시에는 단검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무기 말이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이건 그린우드가 쓰는 무기가 아니다.
흑기사들이 쓰는 무기 역시 아니다.
대체 어디서 이게 날아온 거지?
아이젠은 고개를 돌려 알브레히트를 살폈다. 그의 팔뚝에 꽂힌 것 역시 창수형 수리검. 꽂힌 곳에서부터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이 정도쯤이야!”
“캬캬캬캬. 괜찮지 않을 텐데?”
두 사람의 대화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들린 건 수리검이 날아왔던 방향.
목소리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뒤이어 음성이 한 번 더 들렸다.
“암흑마법 : 주박술!”
그러자.
―쉬이이이이이!!
알브레히트에게 꽂힌 수리검에서부터 뱀의 형상을 띤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샤아아아아!
알브레히트의 몸을 마치 고치처럼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