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아이젠은 생각했다. 뭐 대단한 집안이라고 다들 이렇게 유난이야?
아니, 물론 그린우드는 대단한 집안이긴 했다. 전쟁 영웅의 가문인 데다 공작가이기까지 하니.
하지만, 소가주라는 이름 하나에 어린 공자들이 이렇게 목숨까지 걸어 가며 싸워야 하나?
‘글쎄.’
아이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문득 자신에게 팔찌를 선물해 준 지안니가 별로 맘에 안 들기 시작하는 아이젠이었다.
“에효.”
그래도 어쩌랴. 결국은 자신도 이 소가주전에 뛰어들어 있는 상황인데.
척― 아우구스트가 아이젠을 향해 곡도를 들어 보였다.
“싸, 싸울 거냐?”
겁을 먹은 기색. 프란츠보다는 신중한 타입인 모양이었다. 아이젠은 손을 휘적였다.
“가 봐. 우리끼리 더 싸워서 뭐 해.”
피시 트랩 던전에서 아이젠이 해야 할 것은, 친척들과 치고받고 패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패 죽여야 하는 것은 프렘린이지. 프렘린을 죽여서 레드 스톤을 얻은 뒤 귀환하는 것. 그것이 본선의 본질이었다.
‘싸우면 이길 수야 있겠지만.’
굳이 체력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 여기는 아이젠이었다. 아우구스트도 같은 의견이었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형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자취를 감췄다.
“흐음.”
풀숲이 조용해지자, 아이젠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쨌든 레드 스톤을 하나 더 얻게 됐으니 이제 그의 레드 스톤은 총 네 개.
‘가자.’
아이젠은 숲의 끝을 향해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 * *
“하앗!”
촤악!
바네사의 참철검이 구름을 가를 듯 휘둘렸다. 그러자.
“캬샤앗―!!”
프렘린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바네사가 프렘린을 돌아보자, 프렘린은 어느새 레드 스톤을 남기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휴.”
바네사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프렘린의 피와 땀이 섞이니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도 해 바네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상급 마물이야.’
바네사는 혈투 끝에 프렘린 한 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다. 예상 이상으로 훨씬 강한 녀석이었기에 바네사의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실 그보다는 한쪽 팔이 없어 불편한 것이 더 컸지만 말이다.
‘역시, 아직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
바네사는 사라지고 없는 자신의 왼쪽 팔을 돌아보았다.
이 팔은 블렌하임과의 혈전에서 내주고 말았다. 덕분에 목은 건질 수 있었지만, 한쪽 팔이 없으므로 전력이 반 이상 날아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참철검술 중에는 양손으로 쥐어야 하는 초식도 적지 않아.’
그런 초식들을, 바네사는 이제 한 손으로만 써야 했다. 어쩌면 참철검술을 외팔이에 맞게 일부 개조해야 할지도 모르리라. 바네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이젠…….’
바네사는 문득 아이젠을 떠올렸다. 자신과 함께 수련했던, 하지만 자신보다 더욱 월등히 강해진 아이. 자신의 동생.
아이젠은 검을 쓰지 않는다. 자신의 양손이 곧 무기라며, 오로지 주먹만으로 천하를 제패할 듯 거침없는 행보를 밟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만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이젠은 정말로 두 주먹만으로 이 소가주전에서 우승할 기세였다.
‘게오르크 공자님이 계시는 한 어렵겠지만.’
아이젠이라면 어쩌면……. 바네사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젠을 생각할 때면, 겨우 팔이 한쪽 없을 뿐인데 후일을 모두 포기한 것처럼 구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냥 팔이 하나 없어졌을 뿐이야. 별일도 아니잖아?’
바네사는 절치부심, 좀 더 자신을 연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레드 스톤을 주워 가방에 넣는데.
척.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바네사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머, 한스.”
“바네사 공… 누님.”
바로 한스였다. 누나와 동생 간의 반가운 만남도 잠시. 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레드 스톤, 몇 개나 가지고 계십니까?”
바네사의 입술이 재밌다는 듯 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러는 넌?”
둘은 신나 있는 얼굴이었다.
* * *
으슬으슬, 날이 살짝 추워지는 듯하자 아이젠은 몸을 떨었다.
“어우, 추워.”
이럴 때 모니카가 있었다면 어디서 담요 같은 걸 또 구해 왔을 텐데.
“모니카가 없으니까 불편하구만.”
아이젠은 어두워진 수풀 사이에 잠시 몸을 숨기기로 했다. 아무리 단련했어도 자연의 추위와 더위는 견디기 어려운 아이젠이었다.
스윽.
아이젠은 대충 풀숲 어딘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찬 바람이 계속 불었지만 풀잎이 가려 주니 견딜 만했다.
‘음, 따뜻하다. 좀만 쉬었다 가야지.’
아이젠이 그렇게 결정하는 순간.
파스스―
수풀이 흔들리며 프렘린 여러 개체가 아이젠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까 아이젠이 상대했던 두 마리의 프렘린보다 정확히 두 배 더 많은 개체.
“캬샤샷.”
“캬샷.”
“캬샤샤샤. 인간이다.”
“인간. 캬샤샷.”
네 마리의 프렘린이었다. 알고 보니 이 수풀은 프렘린들의 쉼터인 모양이었다.
“…….”
아이젠은 조금 초연해진 표정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좀만 쉬면 안 될까? 난 근육이 많아서 맛도 없고 질기기만 할 텐데.”
“인간 고기다!! 캬샤샤샤!!”
“응, 알았어. 그냥 해 본 소리야.”
아이젠은 쪼그렸던 무릎을 펴고 섰다. 그리고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그는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도 추우니 몸을 좀 데워 볼까?”
아이젠의 주먹에 홍화의 기운이 담기기 시작했다.
* * *
바네사는 한스와 눈을 맞추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허리춤에 달린 가방에 시선을 주기도 했다.
‘가방 밑단이 볼록 튀어나와 있어.’
최소 한 개 이상. 레드 스톤이 저 안에 들어 있었다.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은 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스도 바네사의 얼굴보다는 그녀의 가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소가주전의 본선 과제는 레드 스톤을 더 많이 얻어 피시 트랩 던전을 돌파하는 것.’
바네사의 생각에, 조금 전 자신이 프렘린을 그토록 힘겹게 사냥했던 것에 비하면 동생을 상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울 것만 같았다.
서로의 가방을 지켜보기도 잠시, 한스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여기서 누님을 다 만나는군요. 성치 않은 팔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바네사는 괜스레 시큰거리는 왼팔의 절단면을 끌어안아 보았다.
“어머, 그럼. 한쪽 팔이 없어도 너 정도는 이길 수 있거든.”
바네사가 가볍게 도발했다. 그러자 한스의 이마가 꿈틀했다.
한스는 첫째 공자인 게오르크에게만 빌빌댈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바네사와 한스의 나이 차이는 두 살. 그러나 한스의 생각에.
‘감히 내게 도발을 하다니.’
바네사는 자기 아래였다. 바네사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한스 정도라면 여기서 탈락시킬 수도 있겠어.’
서로가 서로를 깔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자연스럽게.
스릉―
한스가 참철검을 뽑았고, 바네사는 이미 꺼내 쥐고 있던 참철검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새로 만든 거니?”
“예. 누님의 검도 그렇잖아요?”
“응. 내 검이 네 검보다 단단해 보이네? 좋은 대장장이를 못 찾았나 보구나.”
“그럴 리가요. 안목이 없으신 줄은 알았지만 누구의 검이 더 우위에 있는지도 못 알아보시다니……. 누님의 좁은 식견에 경탄이 나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의 참철검은 강도나 완성도 면에서 비슷할 것이었다. 스미스쏜즈의 대장장이는 누구 하나 허투루 일하는 법이 없으므로.
검의 힘이 같다면, 두 사람 중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결정지을 방법은 하나뿐. 서로 자웅을 겨루는 것뿐이었다.
부웅!
바네사의 참철검에 그린 오러가 둘렸다. 그와 동시에 한스의 참철검에도 그린 오러가 둘렸다.
“누님,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벌써 3성 상위에 올라 있습니다.”
“어머, 그래? 우연이네. 나도 3성 상위거든.”
꿈틀― 한스의 이마가 또 한 번 꿈틀했다.
‘3성 상위라고? 그 바네사 누님이?’
한스의 기억에, 바네사는 열심히 수련하는 것에 비해 성장의 폭이 좁았다. 아마 지난 몇 년 동안 3성 중위의 실력에 머물러 있었을 터. 그런데 몇 달 만에 3성 상위에 올랐다고?
한스도 대충은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검은 뿔 기사 학교에 아이젠이 갔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누님도 아이젠과 함께 수련했다는 뜻.’
일전에 겨뤘을 때 아이젠은 한스에게 자신의 단련법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온종일 힘의 수련에만 매진한다고 했지.
한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필요도 없었다.
‘아이젠은 주먹. 나는 검!’
검 하나 쥘 줄 몰라 주먹이나 휘두르는 야만인 녀석의 단련법 따위, 따를 이유도, 따를 필요도 없다!
‘아이젠과 함께 수련한 바네사 누님, 당신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건지 깨닫게 해 주겠습니다!’
한스는 자신을 믿었다.
팟!
한스가 먼저 바닥을 박찼다. 그의 참철검이 가볍게 휘둘렸다.
‘참철검술 3성, 연풍참(軟風斬)!’
쉬이익!
한스의 참철검에 실린 연풍의 오러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바네사에게 떨어졌다. 바네사는 오른팔로 검을 꽉 쥐어 잡아, 마찬가지로 그린 오러를 품은 참철검을 휘둘렀다.
‘참철검술 2성, 연공난무!’
슈파파파파팟!
바네사의 검기가 쏟아지고.
태앵!
한스의 연풍참이 연공난무를 모두 갈랐다.
‘역시, 누님은 나한테 안 돼!’
그렇게 한스의 참철검이 바네사의 허리 끝에 닿으려는 순간, 바네사가 몸을 틀었다.
홱!
짧은 사이 한스의 시야에서 바네사가 사라지고.
‘뭐지?!’
한스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을 때.
“아쉽지? 한스.”
머리 위에서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스가 고개를 수직으로 올려 쳐다보니, 바네사는 허공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한 것처럼 한스의 머리 위에 올라서 있었다. 그런데도 한스에게는 조금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스가 위기를 감지하고 허벅지에 힘을 준 순간, 바네사가 먼저 떨어져 내렸다.
‘성락!’
콰앙!
바네사는 떨어져 내리며 한스의 온몸을 참철검으로 베었다.
슈팟! 촤악!
“으큭!”
한스가 뒤로 물러났다. 바네사는 몇 번의 공격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반대로 또 몇 번의 공격은 적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으!”
물러난 한스는 오른쪽 손목, 허벅지, 왼발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바네사가 위에서부터 그의 온몸을 벤 탓이었다. 하나하나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행동에 제약이 생길 만큼은 됐다.
“실력이 많이 느셨군요, 누님……!”
“넌 많이 줄었네.”
팟!
그 말이 자극제가 된 것처럼 한스가 또다시 바네사에게 뛰어들었다. 바네사가 보기에 그의 모습은 빨간 천에 뛰어드는 황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참철검술 3성, 연풍양단(軟風兩斷)!’
바네사의 참철검이 유려하게 휘었다. 그리고 두 번.
촤악! 촤악!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베자.
‘위험해!’
한스는 참철검을 바짝 세워 그녀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 냈다.
티잉! 티잉!
그제야 한스는 달리기를 관두고 흙바닥 위에 멈춰 섰다.
‘이건 연풍양단? 3성 상위에 올라야만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인데.’
저릿저릿―
조금 전 바네사의 검을 받아 냈던 양팔이 전기 충격을 받은 듯 덜덜 떨려 왔다. 바네사 누님은 정말로 3성 상위에 올랐단 말인가?
까득.
‘인정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