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룬잭. 그는 자신이 만든 함정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당탕탕!
아이젠이 헛발을 디뎌 함정에 빠지자 나무 뒤에 숨은 채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역시 내 함정은 누구라도 당해 낼 수 없지.”
룬잭은 누가 뭐래도 함정의 명수였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저벅저벅―
의기충천한 걸음으로 룬잭은 걸었다. 그리고 함정 가까이 다가섰을 땐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하하. 창살에 찔려 죽어 버린 건 아닌가 모르겠어? 내가 좀 심했나? 이제 겨우 열여섯 살짜리 꼬맹이 녀석한테 말이야. 크크.”
그렇게 룬잭이 함정 밑으로 고개를 움푹 숙이는데.
“…응?”
아이젠은 그 안에 없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창살들만이 룬잭을 맞이할 뿐.
‘뭐, 뭐야. 어디 갔지?’
분명 이 안에 있어야 하는데? 처참하게 창살에 찔린 시체가 되어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누구지, 넌?”
룬잭은 자신의 등 뒤에서 섬찟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드는데.
찰강!
단검은 뽑히지 못했다. 아이젠이 룬잭의 허리띠를 부여잡아 높이 들어 올렸으므로.
“어어어억!”
“가만히 계세요, 손님. 움직이시면 다칩니다.”
룬잭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덩치가 제법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젠의 한 손에 통나무처럼 들리니 어이가 없었다.
‘뭐, 뭐야, 이게!!’
자신이 수풀에 숨어 지켜본 아이젠의 힘은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 혼자서 프렘린 두 마리를 상대할 때부터 알아보고 달아났어야 했나?
“이, 이놈, 날 어떻게 하려고……!”
“대충 여기 세울까?”
“헉!”
아이젠은 종잇장처럼 나풀거리는 룬잭을 붙들고 함정의 벼랑 끝에 세웠다. 아이젠이 힘을 풀면 룬잭은 창살 위로 떨어져 구멍 숭숭 뚫린 시체가 될 것이었다.
“으, 으허어헉!!”
“왜? 무서워? 이 정도에 무서워할 놈이 어떻게 이런 살벌한 함정을 파 놨대.”
“이, 이노옴, 어, 어떻게!”
“어떻게 함정에 빠지지 않았냐고? 함정을 너무 뻔하게 만들어 놨다고 하면 실례인가?”
“으, 윽! 이 자식, 감히 함정의 명수인 나를!”
“명수는 지랄.”
덜컥!
아이젠이 손을 놓을 것처럼 허리띠를 잡은 손을 느슨하게 하자.
“허억!”
룬잭은 어떻게든 아이젠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자 했다. 그의 몸은 이제 솟아오른 창살 바로 위에 거의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꿀꺽!
룬잭은 아래를 보고 침을 삼켰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창살의 밭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룬잭은 무의식적으로 구멍 숭숭 뚫린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이젠이 비웃었다.
“난 저 창살에 찔려 죽을 뻔했는데. 자기가 만든 함정에 자기가 역으로 당할 줄은 몰랐지? 고소해라.”
“이, 이거 당장 놓지 못해!”
“대답 먼저. 누구냐고 물었잖아. 누구지, 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니, 그것도 아닌가? 아이젠은 묘하게 긴가민가하는 얼굴이 되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최근에.’
스치듯 봤을 뿐인지 제대로 기억이 안 났다. 가물가물했다.
룬잭이 외쳤다.
“놓으라고!! 이 살인자 자식아!”
“놓으라고? 진짜 놔? 이대로 놓으면 넌 고슴도치가 될걸?”
“아, 안 돼! 놓지 마! 놓지 마!”
“뭐야. 어떻게 해 달라는 거야. 하나만 해. 그나저나 살인자라니? 내가 왜 살인자야.”
아이젠이 사람을 몇 죽이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악인이었다. 성웅(聖雄)이라고 불리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살인자 취급이라니.
“말이 심하네.”
“크윽,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룬잭이 대꾸했다. 아이젠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니 룬잭은 헹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네놈, 설마 잊었다곤 못 하겠지! 플로리안 도련님과 틸만 도련님을, 바로 네놈이 죽였잖아! 영설산 중턱에서!”
‘플로리안? 틸만?’
…그게 누군데?
“아.”
문득 아이젠은 눈앞의 이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났다. 알브레히트 5 방주가 자신의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던 때, 그 옆에서 알브레히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고 있던 자였다.
“이야, 나 기억력 좋네? 잠깐 본 건데 다 기억하고 있고. 역시 힘이 세다고 다 무식한 건 아니야. 그치?”
“크윽, 뭐,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자식이! 빠, 빨리 날 끌어 올리기나 해! 얼른!”
“그나저나 플로리안과 틸만이라면…….”
아이젠은 룬잭의 애원을 가볍게 무시하고 생각했다. 플로리안과 틸만이라면 알브레히트 5 방주가 껴안고 있던 그 두 아들인가. 영설산 산사태 덕에 시체가 발견됐다던.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하고 있나 보다.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음. 무슨 착각을 크게 하나 본데, 내가 죽인 거 아니야.”
“웃기지 마! 소가주전에서 우리 두 도련님이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죽인 거겠지!”
“아니라니까. 두 사람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블렌하임이라는―”
“다음 마력 열차에 이미 호송병들을 잔뜩 깔아 놨다! 저항하지 말고 얌전히 가자, 아이젠!”
마력 열차는 최근에 발전된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이동 수단이었다. 거대한 철마는 정해진 철로로만 다닐 수 있는데, 사람이나 화물을 싣고 먼 거리까지 단시간에 달릴 수 있어 이용객이 많았다.
단점이라면 비싸다는 것. 동력이 마력이기 때문에 마법사의 힘이 필요한데, 마법사들은 고급 인력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날 잡으러 오는 건가? 그 값비싼 마력 열차를 타고?”
“그, 그래!”
“아, 나 참.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 거야.”
이제 보니 함정을 판 이 남자도, 뭔가 큰 착각을 해서 이런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아이젠은 팔꿈치 각도를 조금 좁혀 룬잭을 절벽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땀범벅이던 룬잭의 얼굴이 조금은 평온해지는 듯했다.
“휴우. 그, 그래. 여기서 날 죽인다고 바뀌는 건 없어. 얌전히 자수해서 광명을 찾아라.”
“나 아니라니까. 내가 아니라 블렌하임이라고 하는 남자가 한 짓이야.”
“행여나 선처를 바라진 마라. 직계라고 해도 방계의 자제를 죽인 죄가 가벼울 성싶으냐.”
“내 말이 들리긴 하는 거야, 형씨?”
결국 아이젠은 룬잭을 땅 위로 안착시켰다.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그때였다.
퍽!
별안간 룬잭의 머리가 깨졌다.
“커…억…….”
룬잭의 앞머리가 움푹 팼다. 거기서부터 피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쿵!
룬잭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다행히 창살 위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아이젠이 고개를 돌려 보니.
“캬샤샷.”
작은 프렘린 한 마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좀 전에 아이젠이 맞서 싸웠던 녀석들보다 키가 작은 걸 보니 새끼인 듯했다.
녀석은 양손에 큼지막한 돌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걸로 룬잭을 맞힌 모양이었다.
“…다트 잘 던지겠는데?”
“캬샤샤샷! 인간! 인간 고기!”
작은 프렘린이 아이젠을 향해 겁대가리 없이 날아들고, 아이젠은 발을 비틀어 꼬아 프렘린의 등 뒤로 이동했다.
‘결사신권 연계, 유랑보-박살!’
퍼벅!
유랑보와 박살을 연계해 사용하자 단 한 수 만에 프렘린의 명치에 주먹이 꽂혀 들었고.
“캬악…….”
프렘린은 쓰러져 죽어 레드 스톤을 남겼다.
아이젠은 레드 스톤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몸이 좀 더 묵직해진 기분이었다.
“원, 별.”
한시도 긴장을 늦추기 힘든 던전이었다. 물론 모든 던전이 그렇겠지만. 어쨌든 레드 스톤 하나를 거의 줍다시피 한 셈이니 이득인가.
아이젠은 쓰러진 룬잭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룬잭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쯧. 뭔가 오해가 깊어질 거 같은 느낌인데, 이거.”
에라, 모르겠다. 아이젠은 룬잭의 시체를 그곳에 두고 발을 돌렸다.
그는 던전 끝으로 가기 위해 이동했다. 좀 전에 만난 남자와의 일은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가만, 근데 생각해 보니 외부인이잖아?’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이젠도 스스로 던전에 발을 들인 게 아니었다. 그는 마테오 백작의 벽력 마법으로 텔레포트되어 이곳에 온 것.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남자는 자력으로 이 던전에 들어왔다는 건데.
“…음.”
생각이 깊어질 듯하자 아이젠은 머리를 털었다.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아이젠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게 누구든 다가오면 싸운다. 그것이 바로 아이젠의 방식. 누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가 뭔 상관이랴.
“…어라.”
그때 그 신념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양, 아이젠은 수풀에서 또 누군가를 만났다.
“인구 밀집도가 높네, 이 던전.”
* * *
“뭐야, 직계 놈이잖아?”
잔뜩 경계하는 말투. 그는 바로 프란츠 반 그린우드, 3 방계의 장남이었다.
주황 머리인 그는 온몸이 흉터투성이였지만, 아이젠은 모른 체해 주기로 했다. 그가 신경 쓰이는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그거.”
아이젠은 프란츠가 어깨에 매달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프란츠는 태연히 말을 받았다.
“아. ‘이거’?”
프란츠의 어깨에서 주렁거리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머리가 하늘색인 어린 남자. 대충 아이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프란츠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까 마테오 백작님의 통신 마법으로 들었지? 하디 반 그린우드. 내가 탈락시켰다.”
“죽였나?”
“아니? 죽이지는 않았어.”
털썩! 프란츠가 하디를 흙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디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라, 당장은 살아 있더라도 한 시간 뒤에도 살아 있을지는 모를 것 같았다.
프란츠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근데 곧 죽을지도?”
“왜 업고 다녔지? 던전에서 내보내 주려고?”
“굳이 그런 호의를 베풀 것까지야 있나……. 그냥, 프렘린한테 먹히게 두면 시체도 안 남으니까. 그럼 내가 쓰러뜨렸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 아냐.”
프란츠가 아이젠과 눈을 마주했다.
“이제 네가 봤으니 됐어. 증인이 생겼으니까.”
그러더니 그는 참철검을 뽑아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너도 어차피 여기서 죽으려나? 그럼 목격자를 또 구해야겠는걸. 하하.”
“…….”
아이젠은 한쪽 눈썹을 치키고 가만히 말을 받기만 했다.
그가 보는 것은 프란츠의 참철검이었다. 다른 직계나 방계의 참철검과는 달리, 프란츠의 참철검은 끝이 휘어진 형태로 되어 있었다.
‘저런 걸 보통 곡도(曲刀)라고 부르던가?’
아이젠의 짐작대로, 방계들은 참철검술을 응용하고 있는 듯했다.
끝이 휘어진 곡도는 3 방계의 특징. 프란츠가 검을 들어 보였다. 칼날이 넓은 부분은 그의 얼굴까지 가릴 정도로 컸다.
“네 소문 많이 들었어. 참철검가 직계의 집쥐 공자. 검을 쓰는 집안에서 태어나 검을 쥐지도 못하는 녀석. 맞지?”
“대충은. 유명세가 쑥스럽네.”
“내가 하디를 이렇게 만든 게 불만스럽냐?”
불만? 아니,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